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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지 않은 길 - 로버트 프로스트/bhlee 역

 

노란 숲 속에 두 갈래 길이 있었습니다.
두 길을 다 갈 수 없는 한사람의 나그네인지라
아쉬운 맘으로 그 곳에 서서
한쪽 길이 덤불 속으로 굽어든 끝까지
한참을 그렇게 바라보았습니다.

그리고 똑같이 아름다웠지만
어쩌면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기에
다른 길을 택했습니다.

그 길은 풀이 더 우거지고 사람이 지난 자취가 없었으니까요.
비록 그 길로 가면 그 길도 낡아져
결국 또 다른 길과 같아지겠지만.

그 날 아침, 두 길은 모두 아무도 밟지 않아
더럽혀지지 않은 낙엽에 묻혀 있었습니다.
아, 나는 훗날을 위해 한 길은 남겨 두었습니다
길은 또 다른 길로 계속 이어지는 것을 알기에
내가 다시 돌아올 수 있을까 의심하면서도.

먼 먼 훗날에 어디에선가
나는 한숨을 쉬며 말하겠지요.
어느 숲 속에 두 갈래 길이 있었노라고
그리고 나는 사람이 적게 다닌 길을 택하였다고,
그래서 모든 게 달라졌다고.

(trans./bhlee)

 

시의 제목을 '가지 않은 길'이라고 해야할지 그동안 모두들 번역한대로 '가지 못한 길'이라고 해야할지 망설였다.

하지만 시의 내용과 또 마지막 연을 봐도 인생에서 자신의  '선택'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시이므로 그냥 나는  

"가지 않은 길"이라고 번역했다.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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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by bhlee8819/at Khuvsgul

 

 

시월에 - 문태준

오이는 아주 늙고 토란잎은 매우 시들었다

산 밑에는 노란 감국화가 한 무더기 해죽, 해죽 웃는다
웃음이 가시는 입가에 잔주름이 자글자글하다
꽃빛이 사그라들고 있다.

들길을 걸어가며 한 팔이 뺨을 어루만지는 사이에도
다른 팔이 계속 위아래로 흔들리며 따라왔다는 걸
문득 알았다.

집에 와 물에 찬밥을 둘둘 말아 오물오물 거리는데
눈구멍에서 눈물이 돌고 돌다.

시월은 헐린 제비집 자리 같다
아, 오늘은 시월처럼 집에 아무도 없다.

   - 2006년 시집 <가재미> (문학과 지성사)

풀잎 소리-  정 호 승

나의 혀에는 칼이 들어 있지 않다
나의 혀에는 풀잎이 들어 있다
내가 보고 싶은 친구의 이름을 부를 때마다
바람에 스치는 풀잎소리가
풀잎 하고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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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의 폭력은 물리적 폭력보다 더 깊은 상처를 남깁니다.
많은 사람들이 기억하지도 못하는 어린 시절 들었던 많은 폭력적 언어, 특히 한 존재에게 수치심을 유발시키는 언어때문에
일생동안 원인 모르는 마음의 상처를 안고 살아갑니다.

육체적으로 난 상처는 그 흉터가 남아 있어도 흉터를 보면서 예전의 아픔이 다시 우리를 사로잡아오지 못합니다.
하지만 언어의 상처가 낸 흉터는 보이지도 않으면서 불사조처럼 살아남아 예기치 않은 순간에 어디선가 되살아나 우리를  사로잡습니다.

내 입에서 나가는 말이 칼은 아닌지요.
내 입에서 나가는 말을 내가 남에게 듣는다면 내 마음은 어떨지요.

내가 대접받고자 하는 대로 남에게 대접하라는 말이 언어생활에서만큼 절실히 요구되는 곳도 없는 듯 합니다.


<맨드라미에게 부침 - 권대웅>

언제나 지쳐서 돌아오면 가을이었다.
세상은,
여름 내내 나를 물에 빠뜨리다가
그냥 아무 정거장에나 툭 던져놓고
저 혼자 훌쩍 떠나가 버리는 것이었다.
그때마다 고개를 들고 바라보면
나를 보고 빨갛게 웃던 맨드라미
그래 그런 사람 하나 만나고 싶었다.
단지 붉은 잇몸 미소만으로도 다 안다는
그 침묵의 그늘 아래
며칠쯤 푹 잠들고 싶었다.
헝클어진 머리를 쓸며 일어서는 길에
빈혈이 일어날 만큼 파란 하늘은 너무 멀리 있고
세월은 그냥 흘러가기만 하는 것 같아서 싫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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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그런 사람 하나 만나고 싶었다.

빈혈이 일어날 만큼 멀리 있는 파란 하늘 말고
기대면 체온이 전해져 오는 맨드라미 같은 가슴을 가진
그런 붉은 마음 친구 평생 기다려왔다.
평생 그런 친구가 되고 싶었다.
그게 그렇게 큰 욕심일까
환상일까

너무 바빠서 외롭다 말하니까 누군가 웃었다.
복에 겨운 소리라고....
나 자신에게서 유기되고 방치된 나는
어느 정류장에 툭! 짐짝처럼 던져져 있을까?

울컥
각혈하듯 깊은 속에서 치미는 뜨거운 고백 한마디... 

나는........
그리고 오늘도 발설해선 안 되는 비밀도 아닌

그 말을 도로 주어 삼킨다

 

091609 MP

새 - 김남조 

 

새는 가련함 아니어도 

새는 찬란한 깃털 아니어도 

새는 노래 아니여도

무수히 시로 읊어짐 아니어도

심지어

신의 신비한 촛불

따스한 맥박 아니어도

 

탱크만큼 육중하거나

흉물이거나

무개성하거나

적개심을 유발하거나 하여간에

 

절대의 한순간

숨겨 지니던 날개를 퍼득여

창공으로 솟아오른다면

이로서 완벽한 새요

여타는 전혀 상관이 없다. 

 

([평안을 위하여] 1995, 서문당)

 

선인장 사랑 - bhlee (2007)

 

괜찮아...
난 널 안아줄 수 있어

널 잃어 빈 가슴에 못 박는 아픔보다
널 안고 가시를 품는 아픔이
차라리 행복임을
너는 알까?

널 안고 흘리는 따듯한 눈물이
널 잃고 흘리는 따가운 눈물보다
차라리 축복임을
너는 알까?

 

그러니 네 상처투성이 온몸

그 가시로

홀로 아파하지마
안기지도 못하고 자꾸자꾸

도망가지마

 

맘껏 내 품에 안기렴

내 사랑  

 

MP

02/22/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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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쓰다가 언젠가 보았던 이 그림이 생각났다. 

그림:출처미상(혹시 출처를 아시면 알려주십시오.)


ㅡㅡ
언젠가 꿈을 꾸었었다. 내 몸에서 끝도 없이 장미가시를 뽑아 내는 꿈이었다.

너무 슬프고 아프고 두려워서  꿈에서 깨어서 한참을 울었던 기억이 난다. --022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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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많이 아팠던 시절이었다.  이젠 기억 저편에 있는 그런 시간을 기억할 수 있는 것이 journal의 힘이고 치유인 것 같다. 
그 막막하던 아픔의 시간들은 영원하지 않았다. 결국 가시를 꿈에서처럼 뽑아내고, 가시에 찔려도  가시보다 단단해진 나와 나의 사랑을 바라보면서 감사하게 된다.  그리고 그 가시들이 만들어준 단단한 마음을 본다. 당연히, 여전히 삶은 가시밭을 만나는 길이다.  나에게 솟아나는 가시, 혹은 나를 밖에서 찌르는 가시들... 하지만 이것도 그 때처럼 넉넉히 이길거라는 걸 알게 해주는 게
바로 지난 저널을 읽을 때의 위로와 격려다.092924


대숲 아래서 - 나태주

  바람은 구름을 몰고
  구름은 생각을 몰고
  다시 생각은 대숲을 몰고
  대숲 아래 내 마음은 낙엽을 몬다.

  밤새도록 댓잎에 별빛 어리듯
  그슬린 등피에는 네 얼굴이 어리고
  밤 깊어 대숲에는 후득이다 가는 밤 소나기 소리.
  그리고도 간간이 사운대다 가는 밤바람 소리.

  어제는 보고 싶다 편지 쓰고
  어젯밤 꿈엔 너를 만나 쓰러져 울었다.
  자고 나니 눈두덩엔 메마른 눈물자죽.
  문을 여니 산골엔 실비단 안개.

  모두가 내 것만은 아닌 가을,
  해 지는 서녘구름만이 내 차지다.
  동구 밖에 떠드는 애들의
  소리만이 내 차지다.
  또한 동구 밖에서부터 피어오르는
  밤안개만이 내 차지다.
  하기는 모두가 내 것만은 아닌 것도 아닌
  이 가을,
  저녁밥 일찍이 먹고
  우물가에 산보 나온
  달님만이 내 차지다.
  물에 빠져 머리칼 헹구는
  달님만이 내 차지다.

   - <대숲 아래서> (1973, 예문관)

<추억의 책갈피, 내 마음 갈피>

 

책을 정리하는 일은 쉽지 않다.
어려서부터 책을 사면 전공서적이 아닌 경우 대부분 그 책을 살 때 언제 어떤 마음이었는지 표지 안 쪽 첫페이지에 몇 줄 적곤 했었다. 수도없이 떠나보낸 책들. 그들을 다 버리려 할 때마다 그 몇 줄 글과 함께 한 번씩 책갈피를 스르륵 들쳐보면 줄쳐진 곳, 여백에 적혀있는 책과 대화한 나의 단상들을 만난다. 그 때의 시간과 추억이 소환되고 잊었던 그 시절 내 마음 갈피가 열린다.
 
대개의 경우 우리는 옛날 젊은/어린시절의 빛바랜 사진들을 보며 추억을 소환하곤 한다. 하지만 나에겐 누렇게 바랜 책갈피에서 발견하는 밑줄쳐진 글이나 메모와 나의 생각들이 추억의 젊은 시절 사진들을 보는 것보다 더 소중하게 느껴진다. 상실감이 더 크기 때문일까? 내가 이렇게 치열했고 순수했고 고민했구나. 이제는 잃어버린 그 시절의 나의 빛났던 “언어“가 아프다.
 
지난 겨울 너무 많이 아파서 꿈도 무엇도 다 힙겹고 무의미하고 버거웠던 때, 방을 가득채운 서류더미가 너무 고통스러웠다. 그래서 차마 나는 열어보지 못하고 도우미 아줌마를 시켜 수도 없이 버리고 버리고…방가득 쌓인 15박스 넘는 내가 정리했던 글들과 공부한 내용들을 버리고 나서 일주일 넘게 이유 없이 끙끙 앓았다.
 
내가 간직했던 수많은 영화사에 중요한 구하기 어려운 귀한 명작 영화 비디오도 씨디도 특수쓰레기 대형봉투 6자루정도 버렸다. 어딘가 기증하고 싶었는데 인터넷을 찾아도 모르겠고 기력이 없었다. 저질 체력 앞에 모든 꿈과 열정이 다 허무하고 고통스럽고 부담되어서 다 결별하고 싶었다.
 
지난 것은 지난 것대로 그 때를 살았던 것이니 되었지… 라는 스스로의 위로는 이번에는 가슴 속 빈 공간을 채워주진 못했다. 사실 그 빈 구멍이 무엇때문인지 나는 안다….
 
이제 다가오는 추수의 계절 나는 오히려 또 비워야지 생각한다. 아직도 남은 책들과 서류들과 모든 물건들을 다 정리해야지…. 이별은 면역이 없다는 걸 알지만 이젠 그래도 좀 쉽겠지?
ㅡㅡㅡㅡ

오늘 우연히 제목이 새삼 마음에 들어와 버리려 모아둔 책들 속에서 들쳐본 <현재라는 이름의 환상>.

다른 책갈피 메모보다 평범한 메모긴 하다. (빛바랜 줄 친 부분들도 지금 읽어보니 새로운 눈으로 읽힌다. )

[그대와 나는 왜 숲이 아닌가]

 

내가 참 많이 좋아하는 내 친구, 의사이며 화가인 그가 역시 의사이며 서예가인 남편과 함께한  6번째 동인전, "빛, 색, 묵, 흙"의 오픈닝 날이다. 가보지는 못하지만 마침 내가 화과자를 보냈는데 오프닝 날에 딱 맞추게 되어서 기분이 좋다.

 

그동안 그녀가 주로 그리는 옹기종기 모인 집들의 그림은 너무나 아름답고도 정이 넘친다. 한결같으면서도 늘 변화하는 그의 색감 그리고 무엇보다 변화하는 시점은 전시회마다 새로운 감동을 준다. 그동안의 그의 그림에는 따듯한 공동체의 힘이 있었다. 그만의 색채는 늘 화가를 닮아 매력적이고 정갈하며 아름답고 따듯하고 그러면서도 특유의 힘이 느껴진다. 그 묘한 힘은 무엇일까 생각해본다.

 

그런데 이번 여름 그 더위 속에서 작업한 그림들중  팜플렛에 있는 그림 한 점의 제목이 <숲으로 가면>이다. 옹기종기 모여있던 그녀의 마을의 집들이 나무들이 모인 숲으로 자리를 옮겼다. 더위를 이기고 남을 푸른 나무들이 모인 숲의 생명력이 태양마저 푸르게 물들였다.

 

그녀는 늘 멀리서 집들이 모인 마을을 조망한다. 이번 숲 그림도 그렇다. 그녀의 집과 나무는 외따로 돋보이게 서 있는 적이 없다. [함께 '그러나' 홀로/ 홀로 '그러나' 함께]가 현대인의 삶, 현대인의 공동체를, 그 삶의 숲을 보여준다면 어쩌면 그녀의 그림은 [함께 '그리고' 홀로]인지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삶은 어쩌면 '그러나'와 '그리고'의 조화가 아닐까? 그 조화가 주는 따듯한 힘. 그게 늘 사회에 봉사하며 이웃에 헌신하는 삶을 살기로 유명한 그녀 부부의 마음이 아닐까 싶다.

 

그래서 그녀의 그림을 가만히 보고 있노라면 알랭 드 보통의 말을 빌려서 "마치 우리 자신 내면의 어떤 중요한 곳, 진지하고 진정한 곳으로 돌아온 듯한 느낌"을 받는 것인지 모르겠다.

 

그녀의 <숲으로 가면>이라는 제목의 그림을 보자마자  곧바로 정희성의 시가 떠올랐다. 왜 일까... 생각해보다 몇 자 적어보았다. (다시 그녀의 다른 그림들의 사진을 받아보게 되었는데 이 글은  그 중에 한 점인 <숲으로 가면>에 대한 나의 감상임을 밝혀둔다.)

 

<숲 - 정희성>

 

숲에 가 보니 나무들은

제가끔 서 있더군

제가끔 서 있어도 나무들은

숲이었어

광화문 지하도를 지나며

숱한 사람들이 만나지만

왜 그들은 숲이 아닌가

이 메마른 땅을 외롭게 지나치며

낯선 그대와 만날 때

그대와 나는 왜

숲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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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서적 - 기형도

내가 살아온 것은 거의
기적적이었다
오랫동안 나는 곰팡이 피어
나는 어둡고 축축한 세계에서
아무도 들여다보지 않는 질서

속에서, 텅 빈 희망속에서
어찌 스스로의 일생을 예언할 수 있겠는가
다른 사람들은 분주히
몇몇 안되는 내용을 가지고 서로의 기능을
넘겨보며 서표(書標)를 꽂기도 한다
또 어떤 이는 너무 쉽게 살았다고
말한다. 좀 더 두꺼운 추억이 필요하다는

사실, 완전을 위해서라면 두께가
문제겠는가? 나는 여러 번 장소를 옮기며 살았지만
죽음은 생각도 못했다, 나의 경력은
출생뿐이었으므로, 왜냐하면
두려움이 나의 속성이며
미래가 나의 과거이므로
나는 존재하는 것, 그러므로
용기란 얼마나 무책임한 것인가, 보라

나를
한 번이라도 본 사람은 모두
나를 떠나갔다, 나의 영혼은
검은 페이지가 대부분이다, 그러니 누가 나를
펼쳐볼 것인가, 하지만 그 경우
그들은 거짓을 논할 자격이 없다
거짓과 참됨은 모두 하나의 목적을
꿈꾸어야 한다, 단
한 줄일 수도 있다

나는 기적을 믿지 않는다

나는 집으로 간다 - 여림 (1967-2002) 

 

몇 번이나 주저앉았는지 모른다
햇살에도 걸리고 횡단보도 신호등에도 걸려
자잘한 잡품들을 길거리에 늘어놓고 초라한
눈빛으로 행인들을 응시하는 잡상인처럼
나는 무릎을 포개고 앉아 견뎌온 생애와
버텨가야 할 생계를 간단없이 생각했다

해가 지고 구름이 떠오르고 이윽고
밥풀처럼 입술 주위로 묻어나던 싸라기는
아줌마 여기 소주 한 병 주세요,
나는 석유 난로 그을음 자욱한 포장마차에 앉아
가락국수 한 그릇을 반찬 삼은 저녁을 먹는다

둘러보면 모두들 살붙이 같고 피붙이인 사람들
포장 틈새로 스며드는 살바람에 찬 손 가득
깨진 유리병 같은 소주 몇 잔을 털어 넣고
구겨진 지폐처럼 등이 굽어 돌아가는
사람들을 볼 때마다 나는 오랜 친구처럼
한두 마디 인사라도 허물없이 건네고 싶어진다

포장을 걷으면 환하고 따뜻한 길
좀 전에 내린 것은 눈이 아니라 별이었구나
옷자락에 묻어나는 별들의 사금파리
멀리 집의 불빛이 소혹성처럼 둥글다

 

--등단 후 3년 만에 요절한 비범한 재능을 가진 시인 여림(본명 여영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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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아까운 많은 아름다운 재능을 가진 이들이 머물렀던 짧은 삶을 생각하면 
힘겹다고 점점 느려지는  삶이 부끄러워진다. 
살아있음 자체가 기적이고 축복이고 감사임을 또 느끼며....

살아야 한다는 근사한 이유 - 여림 


종일,
살아야 한다는 근사한 이유를 생각해 봤습니다.
근데 손뼉을 칠 만한 이유는 좀체
떠오르지 않았어요.

소포를 부치고,
빈 마음 한 줄 같이 동봉하고
돌아서 뜻모르게 뚝,
떨구어지던 누운물.

저녁 무렵,
지는 해를 붙잡고 가슴 허허다가 끊어버린 손목.
여러 갈래 짓이겨져 쏟던 피 한 줄.
손수건으로 꼭, 꼭 묶어 흐르는 피를 접어 매고
그렇게도 막막히도 바라보던 세상.

세상이 너무도 아름다워 나는 울었습니다.

흐르는 피 꽉 움켜쥐며 그대 생각을 했습니다.
홀로라도 넉넉히 아름다운 그대.

지금도 손목의 통증이 채 가시질 않고
한밤의 남도는 또 눈물겨웁고
살고 싶습니다. 나는,
누구보다 열심히 살아 있고 싶습니다.

뒷모습 가득 푸른 그리움 출렁이는 그대 모습이 지금
참으로 넉넉히도 그립습니다.

내게선 늘, 저만치 물러서 저 혼자 살아가는 세상이여,
풀빛 푸른 노래 한 줄 목청에 묻고
나는 그대 생각 하나로 눈물겨웁습니다.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 신동엽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누가 구름 한 송이 없이 맑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네가 본 건, 먹구름

그걸 하늘로 알고

일생을 살아갔다.

 

네가 본 건, 지붕 덮은

쇠항아리

그걸 하늘로 알고

일생을 살아갔다.

 

닦아라, 사람들아

네 마음속 구름

찢어라, 사람들아,

네 머리 덮은 쇠항아리. 

 

아침 저녁

네마음 속 구름을 닦고

티없이 맑은 영원의 하늘.

볼 수 있는 사람은

외경(畏敬)을

알리라

 

아침 저녁

네 머리 위 쇠항아릴 찢고

티없이 맑은 구원의 하늘

마실 수 있는 사람은

연민(憐憫)을

알리라

차마 삼가서

발걸음도 조심

마음 모아리며.

 

서럽게

아 엄숙한 세상을

서럽게

눈물 흘려

 

살아 가리라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누가 구름 한 자락 없이 맑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My Blue Guitar by bhlee092520


[내 마음의 첼로 - 나해철] 

 

텅 빈 것만이 아름답게 울린다

내 마음은 첼로

다 비워져

소슬한 바람에도 운다

누군가

아름다운 노래라고도 하겠지만

첼로는 흐느낀다

막막한 허공에 걸린

몇 줄기 별빛 같이

못 잊을 기억 몇 개

가는 현이 되어

텅 빈 것을 오래도록 흔들며 운다

다 비워져

내 마음은 첼로

소슬한 바람에도 운다

온 몸을 흔들어 운다

 

반 고흐, 빗속의 밀밭(1889)

 

비가 오고 있다

여보

움직이는 비애를 알고 있느냐

 

....

그러나 여보

비오는 날의 마음의 그림자를

사랑하라

너의 벽에 비치는 너의 머리를

사랑하라

 

비가 오고 있다

움직이는 비애여

...

 

여보

그래도 무엇인가가 보이지 않느냐

그래서 비가 오고 있는데!

 

<김수영, "비"(1958) 일부>

[물 새] 

 

여름 바다 보다

겨울 바다를 더 좋아하는 건

바다는 그리움이어서 그런가 보다

영원히 바라보기만 하는 나의 눈먼 자유

 

내 곁에 내려와 넘실대는 하늘

내 안에서 나만큼 낮아지는 저항 못 할 부름이건만

그 푸르름에 몸 맡기고 익사할 용기 없어 여태

더듬거리고 머뭇거리며 마지막을 유보하고 있다

 

오늘도 산산조각 난 땅 끝에서

하얗게 부서지는 하늘 끝에서

이내 지워질 편지만 터벅터벅 남기며

아쉬워 아쉬워 돌아보는 물새가 된 나

 

080103 bhlee

MP

photo by bhlee



당신도 없이 나를 견딥니다
묵은 베개의 메밀 속처럼
나날이 늙어도 꼭 그만큼입니다.
[ 이성복]

 

072812

 

 

 

"이 땅의 날씨가 나빴고 나는 그 날씨를 견디지 못했다"- 기형도
오랫동안 글을 쓰지 못했던 때가 있었다. 이 땅의 날씨가 나빴고 나는 그 날씨를 견디지 못했다. 그때도 거리는 있었고 자동차는 지나갔다. 가을에는 퇴근길에 커피도 마셨으며 눈이 오는 종로에서 친구를 만나기도 했다. 그러나 시를 쓰지 못했다. 내가 하고 싶었던 말들은 형식을 찾지 못한 채 대부분 공중에 흩어졌다. 적어도 내게 있어 글을 쓰지 못하는 무력감이 육체에 가장 큰 적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나는 그 때 알았다.
  그때 눈이 몹시 내렸다. 눈은 하늘 높은 곳에서 지상으로 곤두박질쳤다. 그러나 지상은 눈을 받아주지 않았다. 대지 위에 닿을 듯하던 눈발은 바람의 세찬 거부에 떠밀려 다시 공중으로 날아갔다. 하늘과 지상 어느 곳에서도 눈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그처럼 쓸쓸한 밤눈들이 언젠가는 지상에 내려앉을 것임을 안다. 바람이 그치고 쩡쩡 얼었던 사나운 밤이 물러가면 눈은 또 다른 세상 위에 눈물이 되어 스밀 것임을 나는 믿는다. 그 때까지 어떠한 죽음도 눈에 접근하지 못할 것이다.
<기형도, 메모(1988.11)/ 산문집 [짧은 여행의 기록]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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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메모를 쓴 몇달 후 1989년 3월 그는 뇌졸중으로 홀로 외롭게 세상을 떠나갔다.
겨우 만 29세. 아까운 사람. 아까운 천재.
그는 "또 다른 세상," 그가 견딜 수 있는 날씨가 있는 그 세상 위에 눈물이 되어 스몄을까.
하고 싶은 말이 그곳에서도 공중에 흩어졌을까?
그 곳은 어디일까.
눈앞에 당장 보이지 않아도 사랑이다. 어느 길 내내, 혼자서 부르며 왔던 어떤 노래가 온전히 한 사람의 귓전에 가 닿기만을 바랐다면, 무척은 쓸쓸했을지도 모를 서늘한 열망의 가슴이 바로 사랑이다.

고개를 돌려 눈길이 머물렀던 그 지점이 사랑이다. 빈 바닷가 곁을 지나치다가 난데없이 파도가 일었거든 사랑이다. 높다란 물너울의 중심 속으로 제 눈길의 초점이 맺혔거든, 거기 이 세상을 한꺼번에 달려온 모든 시간의 결정과도 같았을, 그런 일순과의 마주침이라면, 이런 이런, 그렇게는 꼼짝없이 사랑이다.

오래전에 비롯되었을 시작의 도착이 바로 사랑이다. 바람에 머리카락이 헝클어져 손가락 빗질인 양 쓸어 올려보다가, 목을 꺾고 정지한 아득한 바라봄이 사랑이다.

사랑에는 한사코 진한 냄새가 배어 있어서, 구름에라도 실려오는 실낱같은 향기만으로도 얼마든지 사랑이다. 갈 수 없어도 사랑이다. 魂이라도 그쪽으로 머릴 두려는 그 아픔이 사랑이다.

멀리 있어도 사랑이다.

 꽃잎 - 도종환

 

처음부터 끝까지 외로운게 인생이라고 생각하면 눈물이 난다.
지금 내가 외로워서가 아니다.
피었다 저 혼자 지는 오늘 흙에 누운 저 꽃잎 때문도 아니다.
형언할 수 없는 형언 할 수 없는
시작도 아지 못할 곳에서 와서 끝 모르게 흘러가는 존재의 저 외로운 나부낌
아득하고 아득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