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설이 내렸어요 이십 년만에 내리는 큰눈이라 했어요 그 겨울 나는 다시 사랑에 대해서 생각했지요 때묻은 내 마음의 돌담과 바람뿐인 삶의 빈 벌판 쓸쓸한 가지를 분지를 듯 눈은 쌓였어요 길을 내러 나갔지요 누군가 이 길을 걸어오기라도 할 것처럼 내게 오는 길을 쓸러 나갔지요 손님을 기다리는 마음으로 먼지를 털고 오랫동안 사람이 살지 않던 내 가슴 속 빈 방을 새로 닦기도 했어요 내가 다시 사랑할 수 있다면 내 사랑 누군가에게 화살처럼 날아가 꽂히기보다는 소리 없이 내려서 두텁게 쌓이는 눈과 같으리라 느꼈어요 새벽 강물처럼 내 사랑도 흐르다 저 홀로 아프게 자란 나무들 만나면 물안개로 몸을 바꿔 그 곁에 조용히 머물고 욕심없이 자라는 새떼를 만나면 내 마음도 그렇게 깃을 치며 하늘을 오를 것 같았어요 구원과 절망을 똑같이 생각했어요 이 땅의 더러운 것들을 덮은 뒤 더러운 것들과 함께 녹으며 한동안은 때묻은 채 길에 쓰러져 있을 마지막 목숨이 다하기 전까지의 그 눈들의 남은 시간을 그러나 다시는 절망이라 부르지 않기로 했어요 눈물 없는 길이 없는 이 세상에 고통 없는 길이 없는 이 세상에 우리가 사는 동안 우리가 사랑하는 일도 또한 그러하겠지만 눈물에 대해서는 미리 생각지 않기로 했어요 내가 다시 한 사람을 사랑한다면 그것은 다시 삶을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며 더 이상 어두워지지 말자는 것이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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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땅의 더러운 것들을 덮은 뒤 더러운 것들과 함께 녹으며 한동안은 때묻은 채 길에 쓰러져 있을" 그 눈들의 "남은 시간," ㅡ 그것이 차마 고통스러 힘들어했었습니다. 이 땅의 때묻음, 세상의 나약함은 덮는다고 가린다고 사라질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알면서도 녹지 않는 눈 같은 환상이라도 있어 내 눈을 덮어주길 바란 것일까요? 어둠에 그을린 세상을 온몸으로 덮고 함께 녹아 길에 쓰러져 그 최후를 맞이하는 눈...그것을 다시는 절망이라 부르지 않을 수 있기를 기원해봅니다. 이 겨울에는 질척이는 외롭고 응달진 골목을 걸을 때 그 속에 함께 녹아 내린 희디 흰 눈의 눈물을 기억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왜 서로 사랑했는데 그 사람은 떠나고 나만 여기에 남아 있을까요? 우리는 함께 사랑한 것이 아니었나요? 그렇다면 우리의 사랑은 대체 무엇이었죠? 사랑이 길들이기라면 그것은 서로를 함께 길들이는 것 아닌가요? 길들여져 남겨진 사람은 또 어떻게 혼자서 살아가야 하나요? “
이별을 경험한 사람들의 이 같은 질문에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에서 여우는 어린 왕자에게 사랑이란 서로를 길들여서 오직 하나밖에 없는 존재가 되는 것이라고 가르쳐줍니다. 그래서 여우는 누군가가 내게 그토록 소중한 것은 “그를 위해 보낸 시간”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관계를 맺는다고?” “그래” 여우가 말했다. “넌 아직 나에겐 수많은 다른 소년들과 다를 바 없는 한 소년에 지나지 않아. 그래서 난 네가 없어도 조금도 불편하지 않아. 너 역시 마찬가지일 거야. 난 너에게 수많은 다른 여우와 똑같은 한 마리 여우에 지나지 않아. 하지만 네가 나를 길들인다면 나는 너에게 오직 하나밖에 없는 존재가 되는 거야.” - 생텍쥐페리, <어린 왕자> 중에서
어린 왕자는 여우를 길들입니다. 그리고 여우 덕분에 사랑의 의미를 깨닫고는 여우를 떠나 자신의 장미에게 돌아가려고 합니다. 어린왕자는 자신의 장미가 특별한 이유를 그를 위해 보낸 시간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여우에게는 어린 왕자와의 짧은 만남이 어린왕자와 장미와의 만남 못지않게 중요하고 긴 ‘시간’입니다.
이별의 순간, 어린 왕자는 홀로 남겨지는 여우에게 말합니다. 너를 길들인 것, 그것은 네가 원한 것이었다고. 그러니 내 탓이 아니라고 말하고는 떠나가 버립니다. 출발의 시간이 다가왔을 때 여우는 말했다.
“아아! 난 울음이 나올 것 같아.” “그건 네 잘못이야. 나는 너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싶지 않았어. 하지만 내가 널 길들여 주길 원한 건 바로 너잖아.” 어린 왕자가 말했다. “그건 그래.” 여우가 말했다. “그런데 넌 울려고 하잖아!” 어린왕자가 말했다. “그래. 정말 그래.” 여우가 말했다. “그러니 넌 얻은 게 아무것도 없잖아!” 어린 왕자가 말했다. “얻은 게 있지. 저 밀밭의 색깔이 있으니까.”
물론 여우의 고통은 지난날의 행복에 이미 포함된 것인지 모릅니다. 여우는 “지난날의 행복의 일부”로 존재했던 현재의 고통을, 그런 사랑을 선택한 것입니다. 여우도 언젠가는 어린왕자가 떠날 거라고, 그 미래의 고통을 이미 알고 있으면서도 현재의 행복을 선택했고, 자신을 길들여달라고 했으니 말입니다. 어쩌면 고독하고 외로운 여우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는지 모릅니다. 이제 홀로 남겨진 여우는 어린왕자의 금발을 닮은 밀밭을 보면서 어린왕자를 기다릴 것입니다. 나타나지 않을 것을 알지만 그래도 이미 습관이 된, 그의 말대로 ‘길들여진’ 기다림과 그리움이 없다면 여우는 어떤 희망으로 하루를 살 수 있을까요? 그런 여우를 어린왕자는 어떻게 생각할까요? 혹시 부담스러워할까요? 그래서 밀밭을 피해 멀리 도망치지는 않을까요?
함께 길들이기를 연습했는데 여우는 남겨지고, 어린왕자는 자신의 장미를 찾아 떠납니다. 이처럼 길들이기란 서로 함께 이뤄가기가 힘든 것 같습니다.
어린왕자의 금발을 닮은 밀밭이 유달리 바람에 일렁이는 날이면 여우는 바보 같이 두 팔을 벌리고 어린왕자를 만나러 달려갈지 모릅니다. 그리고 이제는 더 이상 어린왕자의 금발이 아닌 밀밭에서 소리 없이 울어버릴지 모릅니다. 지금도 어디선가 밀밭 한구석이 들썩이고 있다면 그것은 바람이 아닌 여우의 울음 일지 모릅니다. 어쩌면 어린 왕자를 만나고 돌아오는 것일 수도 있겠지요. 시간을 되살려내는 건 사랑의 힘이니까요. 상대방이 떠났다 해도 그때의 시간과 장소 그리고 열정 속에서 그 사람은 영원히 존재하는 것이니까요. 마치 예술작품처럼 변치 않는 모습으로 말입니다.
시월에 - 문태준 오이는 아주 늙고 토란잎은 매우 시들었다 산 밑에는 노란 감국화가 한 무더기 해죽, 해죽 웃는다 웃음이 가시는 입가에 잔주름이 자글자글하다 꽃빛이 사그라들고 있다. 들길을 걸어가며 한 팔이 뺨을 어루만지는 사이에도 다른 팔이 계속 위아래로 흔들리며 따라왔다는 걸 문득 알았다. 집에 와 물에 찬밥을 둘둘 말아 오물오물 거리는데 눈구멍에서 눈물이 돌고 돌다. 시월은 헐린 제비집 자리 같다 아, 오늘은 시월처럼 집에 아무도 없다. - 2006년 시집 <가재미> (문학과 지성사)
언제나 지쳐서 돌아오면 가을이었다. 세상은, 여름 내내 나를 물에 빠뜨리다가 그냥 아무 정거장에나 툭 던져놓고 저 혼자 훌쩍 떠나가 버리는 것이었다. 그때마다 고개를 들고 바라보면 나를 보고 빨갛게 웃던 맨드라미 그래 그런 사람 하나 만나고 싶었다. 단지 붉은 잇몸 미소만으로도 다 안다는 그 침묵의 그늘 아래 며칠쯤 푹 잠들고 싶었다. 헝클어진 머리를 쓸며 일어서는 길에 빈혈이 일어날 만큼 파란 하늘은 너무 멀리 있고 세월은 그냥 흘러가기만 하는 것 같아서 싫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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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그런 사람 하나 만나고 싶었다.
빈혈이 일어날 만큼 멀리 있는 파란 하늘 말고 기대면 체온이 전해져 오는 맨드라미 같은 가슴을 가진 그런 붉은 마음 친구 평생 기다려왔다. 평생 그런 친구가 되고 싶었다. 그게 그렇게 큰 욕심일까 환상일까
너무 바빠서 외롭다 말하니까 누군가 웃었다. 복에 겨운 소리라고.... 나 자신에게서 유기되고 방치된 나는 어느 정류장에 툭! 짐짝처럼 던져져 있을까?
널 잃어 빈 가슴에 못 박는 아픔보다 널 안고 가시를 품는 아픔이 차라리 행복임을 너는 알까?
널 안고 흘리는 따듯한 눈물이 널 잃고 흘리는 따가운 눈물보다 차라리 축복임을 너는 알까?
그러니 네 상처투성이 온몸
그 가시로
홀로 아파하지마 안기지도 못하고 자꾸자꾸
도망가지마
맘껏 내 품에 안기렴
내 사랑
MP
02/22/2007 --------------- 글을 쓰다가 언젠가 보았던 이 그림이 생각났다.
그림:출처미상(혹시 출처를 아시면 알려주십시오.)
ㅡㅡ 언젠가 꿈을 꾸었었다. 내 몸에서 끝도 없이 장미가시를 뽑아 내는 꿈이었다.
너무 슬프고 아프고 두려워서 꿈에서 깨어서 한참을 울었던 기억이 난다. --022207 ------------
참 많이 아팠던 시절이었다. 이젠 기억 저편에 있는 그런 시간을 기억할 수 있는 것이 journal의 힘이고 치유인 것 같다. 그 막막하던 아픔의 시간들은 영원하지 않았다. 결국 가시를 꿈에서처럼 뽑아내고, 가시에 찔려도 가시보다 단단해진 나와 나의 사랑을 바라보면서 감사하게 된다. 그리고 그 가시들이 만들어준 단단한 마음을 본다. 당연히, 여전히 삶은 가시밭을 만나는 길이다. 나에게 솟아나는 가시, 혹은 나를 밖에서 찌르는 가시들... 하지만 이것도 그 때처럼 넉넉히 이길거라는 걸 알게 해주는 게 바로 지난 저널을 읽을 때의 위로와 격려다.092924
대숲 아래서 - 나태주 바람은 구름을 몰고 구름은 생각을 몰고 다시 생각은 대숲을 몰고 대숲 아래 내 마음은 낙엽을 몬다. 밤새도록 댓잎에 별빛 어리듯 그슬린 등피에는 네 얼굴이 어리고 밤 깊어 대숲에는 후득이다 가는 밤 소나기 소리. 그리고도 간간이 사운대다 가는 밤바람 소리. 어제는 보고 싶다 편지 쓰고 어젯밤 꿈엔 너를 만나 쓰러져 울었다. 자고 나니 눈두덩엔 메마른 눈물자죽. 문을 여니 산골엔 실비단 안개. 모두가 내 것만은 아닌 가을, 해 지는 서녘구름만이 내 차지다. 동구 밖에 떠드는 애들의 소리만이 내 차지다. 또한 동구 밖에서부터 피어오르는 밤안개만이 내 차지다. 하기는 모두가 내 것만은 아닌 것도 아닌 이 가을, 저녁밥 일찍이 먹고 우물가에 산보 나온 달님만이 내 차지다. 물에 빠져 머리칼 헹구는 달님만이 내 차지다. - <대숲 아래서> (1973, 예문관)
어려서부터 책을 사면 전공서적이 아닌 경우 대부분 그 책을 살 때 언제 어떤 마음이었는지 표지 안 쪽 첫페이지에 몇 줄 적곤 했었다. 수도없이 떠나보낸 책들. 그들을 다 버리려 할 때마다 그 몇 줄 글과 함께 한 번씩 책갈피를 스르륵 들쳐보면 줄쳐진 곳, 여백에 적혀있는 책과 대화한 나의 단상들을 만난다. 그 때의 시간과 추억이 소환되고 잊었던 그 시절 내 마음 갈피가 열린다.
대개의 경우 우리는 옛날 젊은/어린시절의 빛바랜 사진들을 보며 추억을 소환하곤 한다. 하지만 나에겐 누렇게 바랜 책갈피에서 발견하는 밑줄쳐진 글이나 메모와 나의 생각들이 추억의 젊은 시절 사진들을 보는 것보다 더 소중하게 느껴진다. 상실감이 더 크기 때문일까? 내가 이렇게 치열했고 순수했고 고민했구나. 이제는 잃어버린 그 시절의 나의 빛났던 “언어“가 아프다.
지난 겨울 너무 많이 아파서 꿈도 무엇도 다 힙겹고 무의미하고 버거웠던 때, 방을 가득채운 서류더미가 너무 고통스러웠다. 그래서 차마 나는 열어보지 못하고 도우미 아줌마를 시켜 수도 없이 버리고 버리고…방가득 쌓인 15박스 넘는 내가 정리했던 글들과 공부한 내용들을 버리고 나서 일주일 넘게 이유 없이 끙끙 앓았다.
내가 간직했던 수많은 영화사에 중요한 구하기 어려운 귀한 명작 영화 비디오도 씨디도 특수쓰레기 대형봉투 6자루정도 버렸다. 어딘가 기증하고 싶었는데 인터넷을 찾아도 모르겠고 기력이 없었다. 저질 체력 앞에 모든 꿈과 열정이 다 허무하고 고통스럽고 부담되어서 다 결별하고 싶었다.
지난 것은 지난 것대로 그 때를 살았던 것이니 되었지… 라는 스스로의 위로는 이번에는 가슴 속 빈 공간을 채워주진 못했다. 사실 그 빈 구멍이 무엇때문인지 나는 안다….
이제 다가오는 추수의 계절 나는 오히려 또 비워야지 생각한다. 아직도 남은 책들과 서류들과 모든 물건들을 다 정리해야지…. 이별은 면역이 없다는 걸 알지만 이젠 그래도 좀 쉽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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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우연히 제목이 새삼 마음에 들어와 버리려 모아둔 책들 속에서 들쳐본 <현재라는 이름의 환상>.
다른 책갈피 메모보다 평범한 메모긴 하다. (빛바랜 줄 친 부분들도 지금 읽어보니 새로운 눈으로 읽힌다. )
내가 참 많이 좋아하는 내 친구, 의사이며 화가인 그가 역시 의사이며 서예가인 남편과 함께한 6번째 동인전, "빛, 색, 묵, 흙"의 오픈닝 날이다. 가보지는 못하지만 마침 내가 화과자를 보냈는데 오프닝 날에 딱 맞추게 되어서 기분이 좋다.
그동안 그녀가 주로 그리는 옹기종기 모인 집들의 그림은 너무나 아름답고도 정이 넘친다. 한결같으면서도 늘 변화하는 그의 색감 그리고 무엇보다 변화하는 시점은 전시회마다 새로운 감동을 준다. 그동안의 그의 그림에는 따듯한 공동체의 힘이 있었다. 그만의 색채는 늘 화가를 닮아 매력적이고 정갈하며 아름답고 따듯하고 그러면서도 특유의 힘이 느껴진다. 그 묘한 힘은 무엇일까 생각해본다.
그런데 이번 여름 그 더위 속에서 작업한 그림들중 팜플렛에 있는 그림 한 점의 제목이 <숲으로 가면>이다. 옹기종기 모여있던 그녀의 마을의 집들이 나무들이 모인 숲으로 자리를 옮겼다. 더위를 이기고 남을 푸른 나무들이 모인 숲의 생명력이 태양마저 푸르게 물들였다.
그녀는 늘 멀리서 집들이 모인 마을을 조망한다. 이번 숲 그림도 그렇다. 그녀의 집과 나무는 외따로 돋보이게 서 있는 적이 없다. [함께 '그러나' 홀로/ 홀로 '그러나' 함께]가 현대인의 삶, 현대인의 공동체를, 그 삶의 숲을 보여준다면 어쩌면 그녀의 그림은 [함께 '그리고' 홀로]인지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삶은 어쩌면 '그러나'와 '그리고'의 조화가 아닐까? 그 조화가 주는 따듯한 힘. 그게 늘 사회에 봉사하며 이웃에 헌신하는 삶을 살기로 유명한 그녀 부부의 마음이 아닐까 싶다.
그래서 그녀의 그림을 가만히 보고 있노라면 알랭 드 보통의 말을 빌려서 "마치 우리 자신 내면의 어떤 중요한 곳, 진지하고 진정한 곳으로 돌아온 듯한 느낌"을 받는 것인지 모르겠다.
그녀의 <숲으로 가면>이라는 제목의 그림을 보자마자 곧바로 정희성의 시가 떠올랐다. 왜 일까... 생각해보다 몇 자 적어보았다. (다시 그녀의 다른 그림들의 사진을 받아보게 되었는데 이 글은 그 중에 한 점인 <숲으로 가면>에 대한 나의 감상임을 밝혀둔다.)
나의 밤 기도는 길고 한 가지 말만 되풀이 한다 가만히 눈을 뜨는 건 믿을 수 없을 만치의 축원 갓 피어난 빛으로만 속속들이 채워 넘친 환한 영혼의 내 사람아 쓸쓸히 검은 머리 풀고 누워도 이적지 못 가져 본 너그러운 사랑 너를 위하여 나 살거니 소중한 건 무엇이나 너에게 주마 이미 준 것은 잊어버리고 못다 준 사랑만을 기억하리라 나의 사람아 눈이 내리는 먼 하늘에 달무리 보듯 너를 본다 오직 너를 위하여 모든 것에 이름이 있고 기쁨이 있단다 나의 사람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