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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각자의 언어로 말한다

- 소통의 한계

 

딸아이가 오래전 외국에서 외롭게 공부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그때 우리는 종종 이런 말을 주고받았습니다.

나는 도심의 늑대 같아. 혼자서 인간들 속에 살고 있는…….”

오늘 말로 하는 대화는 딱 한 마디 했어. 내 목소리를 잊을 지경이야.”

우리는 종종 대화를 포기하고 차라리 외로움을 택합니다. 왜 그럴까요? 바로 소통에 대한 두려움 때문입니다. 고장 난 피아노 건반처럼 제 음을 전달할 수 없거나 서로 불협화음을 내지 않을까 두렵기 때문입니다. 나의 말이 상대에게 낯선 나라의 말처럼 소통되지 않는다는 좌절 때문입니다. 누군가와의 소통이 더없이 어려울 때가 있습니다. 우리의 소통 수단은 대부분 언어에 의존합니다. 그런데 소통을 위해 사용하는 언어가 참 불완전하기 그지없다는 생각을 합니다. 어쩌면 그보다 근본적으로 우리는 각자 타인 앞에서 해석하고 번역해야 하는 하나의 언어로 존재하는지도 모릅니다. 서로 다른 자신만의 사전으로 상대의 말을 해석하면서 말이지요. 그래서 언어 이상의 의사소통 수단이 필요하다고 느낄 때가 자주 있습니다.

 

나는 조용조용 설명한다. 당신은

고함치는 말로 듣는다. 당신은

새로운 방법으로 시도한다. 나는

오래된 상처가 들추어짐을 느낀다.

 ....... 

나는 비둘기다. 당신은

매로 보인다. 당신은

올리브 가지를 내민다. 나는

가시를 느낀다.

R,  맥거프, <당신과 나> 중에서

 

상대의 말과 그 속내는 똑같을까? 

우리는 서로 편지를 주고받고, 전화 통화를 하고, 또 문자를 주고받으면서 그게 짧은 글이든 목소리든 언어는 그 사람을 여지없이 드러내준다고 생각합니다. 때로는 너무 수식어가 화려해서 읽으면서 살얼음을 딛듯 아슬아슬한 경우도 있습니다. 대체 이 사람은 언제부터 나를 얼마나 안다고 이렇게 살갑게 대하는 걸까? 한두 번 보았다고 마치 나를 다 알기라도 한 듯 온갖 아름다운 말로 나를 포장하는데, 왜 그러는 걸까? 미사여구로 상대를 잔뜩 포장해놓고는 내 마음과 똑같았어요. 마치 내가 하고 싶은 말을 대신 해주시는 것 같았어요라는 말로 상대에게 되돌려주기도 합니다. 그런 진심이 의심스런 말을 들을 때면 빌려 입은 옷을 입고 무대에 선 것처럼 불편하기 그지없습니다. 이런 사람들의 공통점은 대부분 혼자 지나치게 흥분했던 것처럼 어느 날 갑자기 혼자 토라져서 사라져버린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원하는 이상적인 모습을 맘대로 투사해 상대를 영웅처럼 바라보다가 결국 실망했다며 평가절하하고 떠나가 버립니다. 때로는 자신의 일방적인 감정을 소화하지도 못한 채 분풀이를 하는 언어도 있습니다. 아무리 이런저런 이모티콘을 사용하고, 말끝마다 웃음으로 포장해도 자신의 날 감정은 그 포장 속에서도 진한 냄새를 풍겨옵니다.

 

그래서일까요. 한 사람의 말투는 그 사람의 인격뿐 아니라 모든 것을 말해준다고 감히 단언하고 싶습니다. 아무리 예쁘게 꾸며도 그 뒤의 이기적인 계산을, 아무리 친절히 말해도 그 뒤의 적대감을 감출 수는 없습니다. 아무리 웃으며 말해도 그 뒤의 두려움을,  아무리 당당하게 말해도 그 뒤의 패배감을 숨길 수는 없습니다. 아무리 잔인하게 말해도 그 뒤의 사랑은,  아무리 무뚝뚝하게 말해도 그 뒤의 관심은 묻어둘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숨겨둔 사랑과 관심보다는 당장 내 뇌리에 깊숙이 파고드는 뾰족한 언어의 칼에 얼마나 아파하는지요. 하지만 그 안의 사랑과 관심을 깨달았을 때는 이미 상처 입고 되돌아가기에 너무 늦어버립니다.

 

나도 내가 하는 말을 모른다 

타인뿐 아니라 자신의 언어 습관을 객관적으로 안다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닙니다. 이는 곧 우리 자신을 객관적으로 안다는 자체가 어렵다는 말이기도 하지요. 남이 보는 나와 내가 보는 내가 다르다는 사실은 종종 우리를 당혹하게 합니다. 이 괴리는 자신의 사진을 볼 때의 첫 느낌, 즉 낯설다고 느끼는 그 순간에도 잘 나타납니다. 더 놀라운 것은 남들에게는 사진 속의 내가 그들이 보는 실제의 나와 달라 보이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시각의 괴리만이 아닙니다. 청각도 마찬가지입니다. 초등학교 때의 일입니다. 처음으로 방송극에 출연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라디오에서 들려오는 내 목소리가 어찌나 낯설던지 어린 마음에 그냥 밖으로 도망을 갔습니다. 그리고는 창문 밖에서 간이 오그라드는 심정으로 들었던 기억이 납니다. 이런 경험은 어른이 되어서도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친정어머니에게 아이를 맡기고 출근하던 때였습니다. 엄마가 곁에 없어도 아이가 엄마를 가까이에서 느낄 수 있도록 나는 아이에게 동화책을 읽어 녹음해주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녹음이 끝난 후 들어본 목소리는 너무나 끔찍하고 낯선 목소리여서 무척이나 당황했던 기억이 납니다. 하지만 그 낯설음이 주는 당혹감보다 더 놀라웠던 것은 남편과 아이는 그게 내 목소리라고 인정한다는 사실이었습니다. 타인이 알고 있는 나와 내가 알고 있는 나. 둘 중 어느 쪽이 더 진실한 나의 모습인지는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 다만 내가 알고 있는 나의 모습과 목소리, 성격 그리고 습관화된 나의 말투들이 타인이 느끼는 것과는 사뭇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겸손해질 수 있습니다. 소통의 한계 앞에서 한 번 더 자신을 성찰할 수 있습니다.

 

동명의 자서전을 영화화한 내 책상 위의 천사로 잘 알려진 작가 쟈넷 프레임(Janet Frame)은 이렇게 말합니다. “모든 것은 언제나 이야기다. 하지만 가장 아름다운 이야기는 글로 써서 찢어버리지 않고 친구에게 전달한 이야기다. 들어주어서 고맙다고, 내 마음의 귀에 분별력 있는 열쇠 구멍을 내주어서 고맙다고 그 보상으로 해준 이야기다.” 그렇기에 시인이며 작가인 로오드(Audre Lorde)중요한 것은 말로 표현되어야 한다. 상처 받아 멍들고 오해받을 위험을 감수하고라도 언어화하고 서로 나누어야 한다는 말처럼 대화를 포기하지 않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모두 고장 난 피아노 건반처럼 화음을 낼 수 없는 존재로 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연약하고 오해를 불러오더라도 언어는 우리가 가진 최고의 소통입니다. -중략-

 

상대의 말에 자주 상처 받지는 않나요? 이런 언어의 한계 앞에서 우리는 어떻게 타인과 소통할 수 있을까요? 언젠가 친구와 했던 약속이 기억납니다. 우리가 혹시 서로에게 상처를 주는 말을 한다면 그건 진심이 아니라 언어의 한계임을 서로 굳게 믿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누군가의 말로 인해 무척 맘이 상한 오늘, 나는 신뢰를 갖기로 합니다. 내가 받은 상처는 그 사람 자신도 모르는 언어습관이나 언어의 한계 때문에 생긴 것이지, 그 사람의 본심이거나 의도는 아니라고 믿으며, 그가 준 상처와 언어의 불완전함을 포용하기로 합니다. 언어가 나아갈 수 없는 한계 앞에서 우리가 찾아야 할 해결책은 대화의 단절이 아니라 바로 상대에 대한 신뢰이기 때문입니다. -중략-      (C)이봉희, [내 마음을 만지다] 중에서

 

 

 

https://www.journaltherapy.org/3632- "여러개의 언어를 알았으면 했지"

침묵으로도 말할 수 있다

- 무언의 소통

 

 

“내 안에 더 많은 것이 존재한다”는 상징주의를 이야기할 때  즐겨 인용하는 중세시대의 말이 있습니다. 우리는 표현하는 것 이상의 존재라는 의미입니다. 그렇다면 표현하지 않은 말들은 어디에 숨었을까요?

우리는 자신이 하는 말이 무슨 말인지는 알고 말할까요? 또, 남이 내게 하는 말을 제대로 이해하고는 있을까요?

 

셰익스피어의 극에서 무(nothing)는 없음, 아무것도 아님, 혹은 결핍이 아닙니다. 그것은 아무것도 아닌 것이라고 불리는 ‘그 무엇(something called nothing)’을 뜻합니다. 《햄릿》, 《리어왕》, 《오셀로》 등 이 모든 비극에서 주인공들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nothing’의 말이 단순한 없음이나 무의미를 뜻하는 부정어가 아니라 보다 능동적인 긍정어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 무엇(something)’을 소통하지 못하는 데서 극의 비극성이 생겨납니다. 예를 들어 리어왕은 세 딸들에게 아버지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말해보라고 합니다. 그럼 땅을 나눠주겠다고 제안한 것이지요. 땅을 물려받고 싶은 욕심에 두 딸들은 전혀 마음에도 없는 거창하기만 한 거짓 사랑을 고백합니다. 반면 셋째 딸 코오딜리어는 진정으로 아버지 리어왕을 사랑하는 딸입니다. 두 언니의 사랑 고백을 듣고 있는 코오딜리어는 고통스럽기만 합니다. 만일 ‘사랑’이란 말이 언니들이 말하는 ‘사랑’을 표현하는 말이라면, 자신의 사랑을 언니들이 사용한 것과 같은 언어로는 표현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코오딜리어는 아버지의 신뢰와 기대를 저버리고 “너는 얼마나 나를 사랑하느냐”는 기대에 부푼 왕의 질문에 “할 말이 없다(Nothing)”고 대답합니다. 하지만 그 말 뒤에 숨은 코오딜리어의 진정한 사랑의 고백을 알아차릴 수 없는 리어왕은 실망과 배반감으로 셋째 딸을 추방하고 맙니다. 그때부터 리어왕의 비극이 시작됩니다. 뒤늦게야 겉으로 드러난 언어 뒤에 숨은 무언의 진실에 하나씩 눈 떠가지만 이미 때늦은 깨달음일 뿐입니다.

 

침묵도 하나의 언어다

 

“고백을 해야 할까? 막스 피카르트의 《침묵의 세계》를 처음 읽게 되었을 때 내가 당황했다는 것을……. 나는 처음에는 그가 말하는 침묵이 그 무엇의 단순한 결핍이 아니라 능동적인 그 무엇이라는 것을 확신할 수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렇지 않다.” 프랑스의 형이상학자 가브리엘 마르셀이 막스 피카르트의 《침묵의 세계The World of Silence》를 읽고 한 말입니다. 피카르트는 말합니다. “인간은 말을 통해서 침묵의 소리를 듣게 된다. 진정한 말은 침묵의 반향인 것이다”라고. 피카르트가 말하는 침묵의 깊은 철학적 의미를 이해하지 못한다 해도 우리는 일상 언어에 숨어 있는 말들, 침묵한 의미들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그 무언(침묵)도 엄연한 하나의 언어이기 때문입니다. 머어윈의 시처럼 그 언어들은 “어둠 속에 깨어서 우리를 듣고 있습니다.”

 

이 연필 안에

말들이 웅크리고 있다 한번도

쓰인 적 없는

말해진 적 없는

배운 적 없는 말들이

 

숨어 있다

 

어둠, 그 어둠 속에

깨어서

우리를 듣고 있다

- 머어윈, <쓰이지 않은 말> 중에서

 

우리가 하는 말 중에는 의미 없는 말들이 많습니다. 그것은 말이지만 동시에 소음입니다. 소음이 ‘의미 없는 목소리(meaningless voice)’라면, 침묵의 언어는 ‘목소리가 없는 의미(voiceless meaning)’입니다. 그 언어가 목소리를 갖지 못한 데는 여러 이유가 있습니다. 알면서도 말하지 않은(unspoken) 침묵의 언어, 또는 말할 수 없어서(unspeakable) 하지 못하는 침묵도 있습니다. 또 스스로도 내 마음 깊은 곳의 진정한 목소리를 듣지 못해서 말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겉으로 드러난 말 속에 그 말과는 다른 진정한 나의 마음이 숨어 있는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프로이드는 말의 실수도 무의식을 반영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글을 쓰다보면 내가 의도하지 않은 단어를 쓸 때가 있습니다. 실수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때로는 그 우연인 것 같은 실수 속에서 나의 무의식이 건네는 말을 듣기도 합니다.

 

나는 상대의 말에 귀 기울이고 있을까?

 

독일의 한 해석학자의 말이 생각납니다. 한 남편이 있었습니다. 그는 퇴근하면서 아내에게 “머리가 아파”라고 하소연합니다. 이때 아내가 “그래요?” 하고 진통제만 가져다준다면 아내는 남편의 말 뒤에서 침묵하고 있는 진정한 목소리를 듣지 못한 것입니다. 어쩌면 남편도 그 말을 통해 자신이 무엇을 말하려는지 모를 수도 있습니다. 사실 이때 남편이 하는 말의 진정한 의미는 “머리가 아파”가 아니라 “당신의 위로가 필요해. 나를 좀 돌봐줘”라는 말이라고 합니다. 만일 아내가 남편의 말 뒤에 숨어 있는 침묵의 언어를 들을 수 있다면 아내는 ‘남편 자신도 미처 알지 못하는’ 남편의 욕구를 채워줄 것입니다. “당신 오늘도 밖에서 일하느라 정말 수고 많았어요”라며 다른 날보다 더 특별한 위로를 해줄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남편도 자신이 정말 위로받고 싶어서 그 말을 하고 있다는 것을 모른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모르면서도 아내가 그저 진통제를 내밀 때 뭔가 허전하고 마음이 허전하겠지요. 괜히 답답하겠지요.)

 

어린아이를 친정에 맡기고 직장을 다니는 엄마가 있었습니다. 낮 동안에도 수시로 아이가 궁금하고 보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지친 몸으로 퇴근해 친정에 가면 어린아이가 드라마에서처럼 달려 나오며 “엄마아아~~” 하고 매달리기를 기대했습니다. 그런데 막상 아이는 엄마를 반기기는커녕 언제부턴가 “스티커!” 하면서 손을 내밀었습니다. 얼굴은 외면한 채 말입니다. 스티커를 사가지 못하는 날이면 아이는 이내 토라져서 작은 일로도 투정을 부리거나 떼를 썼습니다. 스티커에 대한 끈질긴 집착은 오랫동안 수그러들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외국에 출장을 갔다 오면서도 엄마는 스티커를 사와야 했습니다. 그런데 아이는 단순히 스티커에만 집착했던 것일까요?

 

스티커를 달라는 아이의 투정은 바로 “엄마, 하루 종일 어디 갔다 왔어? 엄마가 날 두고 가버렸을까 얼마나 불안했는지 알아?”라는 의미입니다. 하지만 아이는 자신 내면의 그런 두려움을 알지도 못합니다. 그저 그 당시 자신이 좋아하는 스티커가 엄마의 ‘사랑의 표시’라고 생각하고 그것에 집착합니다. 어쩌면 스티커는 부재의 시간 동안 엄마가 자신을 기억했다는 증거품이라고 여겼는지도 모릅니다.

 

이렇게 이야기해주면 부모들은 아. 그렇구나 하고 깨닫습니다. 그리고 어떻게 아이에게 반응할까요? 아마 대부분 아이에게 눈높이로 앉아서 부드럽게 말할지 모릅니다. “00야, 네가 원하는 건 스티커가 아니란다”라고. 하지만 아무리 그렇게 말해주어도 아이에게는 소용없습니다. 그럴 때는 그냥 스티커를 주어야 합니다. 하지만 스티커만 준다면 사랑을 갈망하는 아이의 욕구는 영원히 충족되지 못할 것입니다. 따라서 엄마는 아이가 말한 스티커와 함께 표현되지 못한 말의 의미인 사랑을 듬뿍 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아이의 불안 속에는 엄마의 부재 뿐 아니라 무엇보다 미지의 것에 대한 두려움(fear of the unknown), 즉 엄마가 대체 자신을 두고 어디에 가 있는지에 대한 ‘무지에서 오는 두려움’이 더 큰 원인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엄마는 아이가 그 두려움에서 벗어나도록 주말에 자신이 낮에 무엇을 하는지 직장에 데려가 보여주고 설명해주었습니다. “우리 00이가 할머니댁에 가 있는 동안 엄마는 지금 우리가 가는 이 길로 차 타고 학교에 가는 거야.... 여기가 엄마가 학생들 가르치는 교실이야....“ 라고 말입니다. 그러면 아이는 엄마가 안 보이는 동안 불안하지 않고 ‘엄마가 지금쯤 어디 있겠지’ 하고 선명하게 상상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퇴근길에 스티커는 물론 사랑도 열심히 ‘표현’해주었습니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아이와 함께 15분 정도 뒹굴며 놀아주고 꼭 안아주기를 잊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어느 때부터인가 아이는 그렇게 집착하던 스티커를 달라고 조르지 않았습니다.

 

 

나의 속마음은 누가 알아줄까?

 

우리가 진정 원하는 것을 표현하지 못하는 것은 스스로도 그 욕구의 본질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때로 우리는 다른 곳에 그 욕구를 전이시켜 거짓 욕망에 집착합니다. 배가 부르면서도, 비만으로 건강을 해친다는 것을 알면서도 초콜릿이나 군것질을 달고 살거나, 술이나 게임 등에 집착하는 경우입니다. 그 순간 초콜릿을 먹지 말라거나 게임을 하지 말라고 아무리 설득해도 효과가 없습니다. 그보다는 그 사람이 진정 원하는 것을 탐구하도록 도와주고 그것을 먼저 해결해주어야 합니다. 그러면 거짓 욕망에 대한 강박증은 사라집니다. 이런 강박증은 때로 사람에 대한 지나친 집착을 보이기도 합니다.

 

친정어머니는 우리딸을 유달리 사랑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사랑이 지나치셔서 신경쇠약에 걸릴 지경이었습니다. 매일같이 전화를 하셔서는 “오늘은 애한테 뭐 먹였니?”라고 물어보셨습니다. 불고기를 해주었다고 하면 “야채를 먹여야지!” 하고 화를 내셨습니다. 다음 날 야채 반찬을 해주었다고 하면 “고기를 먹여야지!” 하고 또 못마땅해 하셨습니다. 무슨 대답을 해도 만족하신 적이 없었습니다. 나는 그런 어머니를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언제부턴가 어머니가 말만 시작하면 다 듣기도 전에 벌써 화부터 났습니다. 때로는 전화수화기를 귀에서 멀리 내려놓기도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안톤 체홉의 <비탄>이라는 단편소설을 읽게 되었습니다. 책의 한 구절에서 나는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주인공 포타포브는 이제는 너무 늙어 일하기 어려운 마부입니다. 그는 얼마 전 사랑하는 아들을 잃었습니다. 그가 늙어서 말〔馬〕을 제대로 몰지 못하자 마차에 탄 젊은 청년들이 노인에게 심한 모욕을 주며 입에 담지 못할 욕을 합니다. 그런데 그는 그 모욕적인 행동에 분노를 느끼지 않고 다만 소리로만 듣습니다. 그리고는 “허허, 참 유쾌한 젊은이들이야” 하고 웃어버립니다. 말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다만 말을 듣기만 한다는 그 장면은 소설의 주제와 무관하게 “아하!” 하며 머릿속을 강타했습니다. 나는 어머니를 생각했습니다. ‘나는 왜 어머니의 말을 일일이 들리는 대로 해석해서 감정적으로 반응했을까? 그냥 단순히 소리로만 들으면 되는데.’ 어머니의 지나친 간섭은 고기를 먹여도, 야채를 먹여도, 그 무엇을 해도 성에 차지 않을 만큼 아이를 사랑한다는 말의 표현임을 그제야 깨달았습니다. ‘내가 얼마나 네 딸을 사랑하는지 알지?’라는 (어머니 자신도 모르는) 어머니의 소리 없는 진심이 무시당하자 어머니는 나름대로 욕구불만이 쌓인 것입니다. 그래서 그 진심을 알아달라고 점점 더 심하게 잔소리를 하신 것입니다.

 

그 후부터는 어머니의 간섭과 잔소리에도 나는 평화로워졌습니다. 그렇게밖에는 사랑을 표현할 줄 모르는 어머니가 안쓰럽기도 하고, 또 아이처럼 귀엽게 보이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오히려 “알았어, 알았어요!! 울 엄마, 손녀 사랑은 알아줘야 한다니까”라며 웃으며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내게 찾아온 평화보다 더 중요한 것은 어느 날부터인가 어머니의 간섭과 잔소리가 점점 줄어들기 시작했다는 사실입니다. 어머니의 진정한 마음을 들어주었기 때문입니다. 간섭과 잔소리로밖에는 표현하지 못한 자신의 진정한 사랑과 욕구를 알아주자 어머니는 더 이상 잔소리를 하지 않으셨습니다. 나의 변화로 어머니도 변하셨던 것입니다.

 

내 속마음을 알아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것 같은 날이면 새삼 삶이 쓸쓸하게 느껴집니다. 때로는 알 수 없는 누군가를 향해 섭섭한 마음이 들기도 합니다. 융(Jung)은 “고독은 내 곁에 아무도 없을 때가 아니라 자신에게 중요하게 여겨지는 것을 의사소통 할 수 없을 때 온다”고 말합니다. 진정으로 서로를 신뢰하고 배려할 때, 우리는 겉으로 드러난 말 너머 말없이 침묵하는 말에 귀 기울일 수 있습니다. 자신도 미처 인식하지 못하는 서로의 욕구를 읽어주고 들어준다면 그것이 진정한 공감과 경청이며 그럴 때 우리의 삶은 훨씬 더 따뜻해질 것 같습니다.

 

[내 마음을 만지다: 이봉희 교수의 문학치유 카페]  중에서

Rene Magritte-le ciel meurtrier(the Murderous Sky)-Nat'l Gallery of Art

 

 

아아, 님은 갔지마는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얐습니다.
제 곡조를 못 이기는 사랑의 노래는 님의 침묵을 휩싸고 돕니다. 

- 한용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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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노래가 곡조를 이기지 못한다 한다.   
곡조가 사랑의 노래를 가두고 있다는 말일까?  사랑이 곡조에 갇혀있다. 그 사랑을 표현할 곡조가 없다는 뜻이기도하고  표현되지 못한 채 갇혀진 사랑이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그 누구도 들을 수 없는 노래가 되는 사랑.  님의 침묵에 나도 침묵의 노래밖에는 부를 수 없는 것일까? 


나에게  "님"은 어떤 의미일까?  
나는 나를 떠난 그 무엇을(누구를) 보내지 아니하고 표현하지 못하는 노래를 부르고 있는 걸까? 

pic. by bhlee060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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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판 한복판에 꽃나무 하나가 있소. 근처에는 꽃나무가 하나도 없소 꽃나무는 제가 생각하는 꽃나무를 열심으로 생각하는 것처럼 열심으로 꽃을 피워가지고 섰소. 꽃나무는 제가 생각하는 꽃나무에게 갈 수 없소. 나는 막 달아났소. 한 꽃나무를 위하여 그러는 것처럼 나는 참 그런 이상스러운 흉내를 내었소.  [꽃나무- 이상 李相]
060806

봄날에선가 꿈 속에선가 - 릴케

어느 봄날에선가 꿈 속에선가
나 언제였던가 너를 만난 것이
지금 이 가을날을 우리는 함께 걷고 있다.
그리고 너는 내 손을 쥐고 흐느끼고 있다.

흘러가는 구름 때문에 우는가?
핏빛처럼 붉은 나뭇잎 때문인가? 그렇지 않으리.
언제였던가 한 번은 네가 행복했기 때문이리라.
어느 봄날에선가 꿈 속에선가…




ㅡㅡ
어느 봄날에선가 꿈에선가
당신도 한 번은 행복했었나요?

정념의 기 - 김남조  (1927. 9. 2-2023. 10. 10)

내 마음은 한 폭의 기(旗)
보는 이 없는 시공(時空)에
없는 것 모양 걸려 왔더니라.

스스로의
혼란과 열기를 이기지 못해
눈 오는 네거리에 나서면

눈길 위에
연기처럼 덮여 오는 편안한 그늘이여
마음의 기(旗)는
눈의 음악이나 듣고 있는가.

나에게 원이 있다면
뉘우침 없는 일몰(日沒)이
고요히 꽃잎인 양 쌓여 가는
그 일이란다.

황제의 항서(降書)와도 같은 무거운 비애(悲哀)가
맑게 가라앉은
하얀 모랫벌 같은 마음씨의
벗은 없을까.

내 마음은
한 폭의 기(旗)

보는 이 없는 시공(時空)에서
때로 울고
때로 기도 드린다.

새벽에 아가에게 - 정호승

  아가야 햇살에 녹아내리는 봄눈을 보면
  이 세상 어딘가에 사랑이 있는가 보다

​  아가야 봄하늘에 피어오르는 아지랑이를 보면
  이 세상 어딘가에 눈물이 있는가보다

​  길가에 홀로 핀 애기똥풀 같은
  산길에 홀로 핀 산씀바귀 같은

​  아가야 너는 길을 가다가
  한 송이 들꽃을 위로하는 사람이 되라

​  오늘도 어둠의 계절은 깊어
  새벽하늘 별빛마저 저물었나니

​  오늘도 진실에 대한 확신처럼
  이 세상에 아름다운 것은 없나니

​  아가야 너는 길을 가다가
  눈물을 노래하는 사람이 되라
  내가 별들에게 죽음의 편지를 쓰고 잠들더라도
  아가야 하늘에도 거지별 하나.

   - 2015년 시선집 <수선화에게> (비채)

한 송이 꽃-도종환 

 

이른 봄에 핀

한 송이 꽃은

하나의 물음표다

 

당신도 이렇게

피어 있느냐고

묻는 

 

 

3월의 시 -  나태주

어차피 어차피
3월은 오는구나
오고야 마는구나

2월을 이기고
추위와 가난한 마음을 이기고
넓은 마음이 돌아오는구나

돌아와 우리 앞에
풀잎과 꽃잎의 비단방석을 까는구나

새들은 우리더러
무슨 소리든 내보라 내보라고
조르는구나

시냇물 소리도 우리더러
지껄이라 그러는구나
아,
젊은 아이들은
다시 한번 새옷을 갈아입고

새 가방을 들고
새 배지를 달고
우리 앞을 물결쳐
스쳐가겠지...

그러나

3월에도
외로운 사람은 여전히 외롭고
쓸쓸한 사람은 쓸쓸하겠지



햇빛과 그늘 사이로 오늘 하루도 지나왔다
일찍 저무는 날일수록 산그늘에 마음 베인다
손 헤도 별은 내려오지 않고
언덕을 넘어가지 못하는 나무들만 내 곁에 서 있다

가꾼 삶이 진흙이 되기에는
저녁놀이 너무 아름답다
매만져 고통이 반짝이는 날은
손수건만 한 꿈을 헹구어 햇빛에 널고
덕석 편 자리만큼 희망도 펴놓는다

바람 부는 날은 내 하루도 숨 가빠
꿈 혼자 나부끼는 이 쓸쓸함
풀뿌리가 다칠까 봐 흙도 골라 딛는
이 고요함

어느 날 내 눈물 따뜻해지는 날 오면
나는 내 일생 써온 말씨로 편지를 쓰고
이름 부르면 어디든 그 자리에 서서 나를 기다릴 사람
만나러 가리라

써도써도 미진한 시처럼
가도가도 닿지 못한 햇볕 같은 그리움
풀잎만이 꿈의 빛깔임을 깨닫는 저녁
산그늘에 고요히 마음 베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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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저녁놀에 고통을 매만져 반짝이면, 그때 

손수건만 한 꿈이라도 헹구어 널어 말릴까?
일찍 저문 오늘은 꿈 대신

가도 가도 닿지 못한 햇볕 같은 그리움이라도 널어놓는다. 
산 그늘에 소리없이 베이는 마음 

포항나눔지역자활센터(2023. 6. )
한부모를 위한 글쓰기문학치료: 당신이 어떤 외로운 거리에 홀로 서있든 ©이봉희 교수

 

남들이 외면한 나를 나마저 외면하고 있지는 않았는지요

“아무도 모를 슬픔을 가졌을 당신의 뒷모습”을 자신마저 외면하지 있지는 않은지요.  이 워크숍은 한 부모로 살아가면서 마음속 깊은 곳에 웅크리고 숨어있는 상처 입고 외롭고 지친 나를 만나고 들어주고 보살펴주는 자기 돌봄과 치유, 그리고 성장을 위한 워크숍입니다.

 

마음이여 누구를 향해 외칠 것인가?

그 누가 내 아픔에 공감해줄까요.  나는 언제 위로를 받을까요? 

참된 위로란 어쩔 수 없는 불가항력적인 상황에서 겪는 무기력과 절망을 어떤 비판 없이 충고 없이 공감해 주는 것입니다. 남이 위로해 주기 전에 나는 나를 위로하고 있는지 한번 생각해 봅니다. 나를 사랑하고 나의 상처를 치유받지 않으면 나도 모르게 내 아픔과 상처와 원한을 가장 소중하고 사랑하는 내 자녀에서 쏟아내고 대물림하게 됩니다. 나를 사랑하지 못하면, 내 마음에 공감하고 내 마음을 만져주지 못하면 내 자녀도 그 모습 그냥 그대로 사랑하거나 공감해주지 못합니다. 나를 방치하면 내 자녀도 방치하게 됩니다.

 

무엇보다 오늘의 이 짧은 만남 이후에도 글쓰기 실습을 통해 알게 된 글쓰기방법(일기쓰기)으로 혼자서 자신을 돌볼 수 있게 되시기를 진심으로 소망합니다.

 

당신은 혼자가 아닙니다.

"당신이 어떤 외로운 거리에 홀로 서있든, 누군가는 이미 그곳을 지나갔고 그리고 살아남았다 "는 것을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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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한 해 한국에 돌아와서 여러 특강/워크숍을 하고도 잊고 있었다. 
자활, 복지 이런 프로그램들은 거의 경제적인 문제가 1 우선 순위이기 마련이고 당연하다.  이런 치유프로그램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기에 반갑고 감사한 마음으로 멀리 다녀왔었다. 

내 활동을 알리거나 블로그에 올리는 걸 잘 못한다. 그런 일조차 에너지가 부족해서일까? 나는 학자이지 나를 알리거나 하는 일에 너무 관심이 없고 정말 0점이다. 그래서 늘 잊는다.  자료 찾다가 우연히 보게 된 이 워크숍도 그때 만났던 분들이 떠올라 이곳에 올려본다. 


잘 지내고 계실지.....  그때의 워크숍이 한 작은  계기라도 되셨을지.... 정말 궁금하다. 한 줄도 글을 안 쓰시던 분, 모두 눈물을 흘리는데 계속 웃기만 하시던 분,  그분의 그 마음, 아무것도 쓰지 못하는 그 마음,  압도당하는 두려움,  너무나 잘 안다. 결국 끝날 때쯤  꾹꾹 누르던 눈물을 흘리시는데 너무 마음이 아팠다.  하루 프로그램으로 이분들을  치유하라는 모든 특강 프로그램들이 늘 안타깝기만 하다.  그래서 늘 밤새워 고치고 또 고치며 가지만 돌아올 때 맘이 안 좋다.  최소한의 마무리라도 해주고 오고 싶은데 2-3시간에 어떻게?  왜, 누구를 위해서 매번 새로운 정보와 강의로만 이런 복지활동을 운영하는 것일까? 내 마음과 힘겨움, 절망에 대한 지식과 정보가 없어서 해결되지 못하는 것만은 절대 아닌데 늘 아쉽다. 

초승달 - 박성우 

 

어둠 돌돌 말아 청한 저 새우잠,

누굴 못 잊어 야윈 등만 자꾸 움츠리나

욱신거려 견딜 수 없었겠지
오므렸던 그리움의 꼬리 퉁기면
어둠 속으로 튀어 나가는 물별들,

더러는 베개에 떨어져 젖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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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이런 눈과 가슴과 언어를 가질 수 있을까?
이토록 고통스럽고 아름다운.... 

 

초승달을 보면서  일기에 쓴 나의 말은 겨우 이거였는데.. 

"깜깜한 하늘에 차가운 초승달 

내 가슴에 꽂힌 비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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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생달 [초승달]- 김강호

 

그리움 문덕쯤에

고개를 

내밀고서

 

뒤척이는 나를 보자

흠칫 놀라

돌아서네

 

눈물을 다 쏟아내고

눈썹만 남은

내 사랑

 

(출처: [한국의 단시조 156편] 2015/책만드는 집)

 <촛불 켜는 아침- 이해인>

 

밭은 기침을 콜록이며
겨울을 앓고 있는 너를 위해
하얀 팔목의 나무처럼
나도 일어섰다

대신 울어 줄 수 없는
이웃의 낯선 슬픔까지도
일제히 불러 모아
나를 흔들어 깨우던
저 바람소리

새로이 태어나는 아침마다
나는 왜 이리 목이 아픈가
살아 갈수록 나의 기도는
왜 이리 무력한가

사랑할 시간마저
내 탓으로 잃어버린
어제의 어둠을 울며
하늘 위에 촛불 켜는 아침

너를 위한 나의 매일은
근심 중에서도
신년 축제의 노래와 같기를 -

그래서 나는 눈부신 언어를 날개에 단
아침 새가 되고 싶었다

햇빛을 끌어내려
젖은 어둠을 말리는 나무 위에
희망의 둥지를 트는
새가 되고 싶었다  


그대에게 가고 싶다 - 안도현

 

해 뜨는 아침에는

나도 맑은 사람이 되어

그대에게 가고 싶다

그대 보고 싶은 마음 때문에

밤새 퍼부어 대던 눈발이 그치고

오늘은 하늘도 맨 처음인 듯 열리는 날

나도 금방 헹구어낸 햇살이 되어

그대에게 가고 싶다

 

그대 창가에 오랜만에 별이 들거든

긴 밤 어둠 속에서 캄캄하게 띄워 보낸

내 그리움으로 여겨다오

사랑에 빠진 사람보다 더 행복한 사람은

그리움 하나로 무장무장

가슴이 타는 사람 아니냐

 

진정 내가 그대를 사랑하는 만큼

새날이 밝아오고

진정 내가 그대 가까이 다가가는 만큼

이 세상이 아름다워질 수 있다면

그리하여 마침내 그대와 내가

하나 되어 우리라 부를 수 있는

그날이 온다면

봄이올 때까지는 저들에 쌓인 눈이

우리를 덮여줄 따뜻한 이불이란 것도

나는 잊지 않으리

 

사랑이란

또 다른 길은 찾아 두리번거리지 않고

그리고 혼자서는 가지 않는 것

지치고 상처입고 구멍 난 삶을 데리고

그대에게 가고 싶다

우리가 함께 만들어야 할 신천지

우리가 더불어 세워야 할 나라

사시사철 푸른 풀밭으로 불러다오

나도 한 마리 튼튼하고 착한 양이 되어

그대에게 가고 싶다.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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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오랜 세월 새해아침이면 가슴에 떠오르는 노래입니다.

당신을 향한, 나의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한 노래입니다.

밤새 퍼부어 대던 눈발처럼 그리움에 서럽던 마음을 나의 눈물로 다 씻어 헹구고

새로 떠오른 햇살처럼 밝은 희망이 되어 당신에게 가고 싶습니다.

그 긴긴 밤을 지나는 동안 그리움 하나로 무장무장 타는 가슴이

사랑보다 더한 행복임을 자꾸자꾸 일깨워주시니 그도 감사합니다.

지치고 상처입고 구멍 난 삶을 데리고 이 모습 이대로 당신께 가고 싶습니다.

당신도 상처입고 구멍 난 삶을 데리고 당신 모습 그대로 내게 오고 싶다면 좋겠습니다.

우리 서로 울 곳이 필요할 때 서로의 등에 기대 말없이 그냥 울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 서로 빙그레 웃음 지을 일이 있을 때 하늘 보며 떠올리는

달 같은 별 같은 얼굴이면 좋겠습니다.

 

올해도 나의 사랑하는 이들이

어둠에 묻혀 어둠이 되는 것을 거부할 수 있는

인내와 용기를 잃지 않기를

그래서 어둠도 빛나고 있음을 볼 수 있게 되기를

어둠 속에서 빛을 볼 수 있게 되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모든 이들에게 새해인사를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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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가 크리스마스의 주인공은 예수님이십니다 라는 문구가 있는 카드를 보냈다. 그래서 생각난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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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돌 반 넘은 우리 손녀, 지지난주 처음 교회 예배에 참석했단다. 크리스마스 예배인데 교회가 텅 비었다고 맘이 쓸쓸했다 한다. 코로나 이후 그리 되었고, 또 팀 켈러 목사님 돌아가시고 더 그렇기도 한 것 같다.

그런데  예배 중에 그 어린 손녀가 갑자기 큰소리로 “It’s not about Santa Claus!” 하더란다. 사람들이 돌아보며 미소 지어주고….

아이의 데이캐어센터에 유대인 가족이 있는데 (같은 아파트 사는) 유대인들 행사 때마다 늘 자기네 문화를 알리려 하고 그런 사진을 게시판에 도배하다시피 붙여놓곤 한다.  또 그때마다 어김없이 부모가 학교 와서 자신들의 이야기와 놀이를 애들과 같이 하는데 이젠 심하다 싶을 정도이다.  얼마 전 크리스마스도 그렇게 와서 같이 활동하였다는 소식을 학교에서 보내주는 newsletter에서 읽었다.
우리 딸도 같은 마음이었는지  새 프로젝트 때문에  숨 쉴 틈도 없이 바쁜 와중에 크리스마스 그림책 두 권과 예수님 탄생 모형들 사서 데이케어에 갔단다. (당연히 미리 연습도 했겠지!!) 서클타임에서 책 읽어주고 인형극도 해주고 또 크리스마스 스티커 놀이랑 준비해서 아이들과 함께 활동도 하고! 크리스마스에 예수님이 빠져서 예수님 외로우실 거 같아서…라고. (역시 울 딸과 난 맘이 통해^^)
엘라가 무척 좋아했단다~  

전 세계가 화려하게 반짝이며 모두의 축제가 되는 참 특별한 날 크리스마스. 서로 온정과 사랑을 베풀고 어려운 이들을 돌아보며 그동안 못한 마음을 전하는 전통으로 살아있는 날.  싼타의 선물을 기다리는 어린시절이 아름다운 꿈(그래서 쓸쓸한 아픔을 가진 아이들도 있겠지..) 그날을 즐기는 모두의 문화도 중요하다.


하지만  크리스마스의 참 의미는 잊히지 않기를 소망해 본다.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이를 번역하면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악몽 2T3 

 

 

날 품어주던 오늘이

돌아 누었다.

 

나 꿈을 꾸었어

너무 어둡고 추웠어

진눈깨비 흩어지다가

어느새 주먹만 한 흰 눈이

아득한 바람을 타고

숨도 쉬지 않고 내려왔어

내 숨도 막았어

 

누군가에 도움을 청했지만

흩날리는 눈처럼

가볍게 섧게 날아갔어

눈길조차 없는

파닥이며 맴도는 작은 어둠이었어

 

눈 속에 갇혀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어

허리 끊어진 엉뚱한 몇 마디

투명한 단어들만 간신히 웅얼거렸어

악몽이었을까.

 

침상에 모로 돌아누운 그를 흔들어 깨웠다

아, 돌아눕는 얼굴 없는 얼굴

눈 코 입 그려 넣지 않은 헝겊 인형 같은

 

갑자기 등 뒤에서 날 부르는 소리

또 다른 꿈으로 지워질 또 다른 오늘이

시린 바람 속에 

알 수 없는 선물상자를 들고 서서

나를 깨운다.

 

일어나야지

눈을 크게 뜨고 악몽을 받아들이는 건

용기 있어 아름다운 결단이야

판도라의 상자를 여는 용기

폭설을 떨치고 날아보는 작은 노래야

 

일어나야해

또다시 지워질 얼굴을 그려야 해

 

언젠가 다다를 오늘의 끝은

눈부신 현실일 거야

 

- BHLee 

 

MP 

0719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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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꿈을 자주 꾼다. 하지만 좋은 꿈은 젊은 시절 외에 꾸지 못한다.
어릴 때는 신기하게 꿈이 잘 맞았다.  기억하는 건 초등학교 때도 군에 간 외사촌오빠가 오는 꿈을 꾸면 꼭 그 오빠가 휴가 나왔다며 우리 집을 찾아오곤 했었다. 
대학교 때는 예를 들면 전날 학교에 불이 나거나, 대통령의 목소리가 학교에서 방송되는 걸 듣거나 같은 꿈을 꾸면 그다음 날 학과 혹은 학부 톱으로 장학금을 받곤 했다. 

내내 그런 꿈을 어김없이 꾸었었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특히 결혼 이후부터는 거의 악몽의 연속이었다.  
심지어 혼자 벽에 기대어 울다 지쳐서 1초 깜박하는 사이 털부숭이 남자가 무시무시한 식칼을 내게 들이대는 찰나 같은 꿈에 놀라 깨기도 했다. 그 후에도 그렇게 꿈인지 생시인지 모를 것들을  순간순간 경험하곤 했었다. 

 

악몽이 현실이 된 꿈 중 예를 들면 어느 날 꿈에서 내가 수술대 위 눈부신 전등 아래 누워있고 옆 테이블에 내 손과 발이 장갑과 부츠처럼 잘려서 놓여있었다. 너무 생생해서 일기에 그림으로 그렸었었다.  그리고 잊힐 때쯤(한 달 후쯤?) 그날도 잠이 부족한 상태에서 새벽에 학교 가는 길.... 전철역으로 내려가는 층계에서 두 번을 굴렀다.  손목과 다리 모두 다치고...  어찌할 바를 몰라하고 있는데  새벽이라 지나가는 사람도 없었다.  마침 급한 듯 지나가던 아주머니가 날 도와주려고 애를 쓰시며 연락처를 묻는데 가족은 미국에 있고 아무도 생각나지 않았다.  머리가 백지가 된 패닉상태.  지나가던 청년이 --그 급한 새벽출근시간에--나를 업고 길 위로 올려주고 나는 간신히 택시를 타고 응급실로 갔던 거 같다.  

 

암튼 내 악몽은 내 마음이 상태뿐 아니고 일어날 일들을 예고하는 내 내면의 지혜의 경고였으나 그 경고는 피할 길이 없었다. 지난여름에도 마찬가지였다.  오이디푸스처럼 꿈을 피해 도망가는 선택이었는데 꿈을 향해가는 선택이 되었고 아무 일도 아닌데 상상이상으로 심히 다치고 수술하고 아직도 회복 중이다.  그 외 늘 반복되는 꿈도 몇 가지 있다. 그 이유를 나는 스스로 분석도 하고 알고 있다.  그 꿈이 차차 빈도가 낮아지는 것도 사실이지만 여전히 꿈은 내게 악몽인 경우가 많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악몽은 단순한 꿈이 아니라 내 삶의 한 메타포가 되기 시작했던 거 같다. 

정말 삶이 외롭고 버겁고  힘들었던 아주 오래전에 쓴 이 시도  산더미 같은 그 간의 공부했던 것들을 버리던 중 공책을 뒤적이다 우연히 발견한 것이다. 

제목의 의미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하지만 저 시가 들려주는 내 마음을 나는 알고 있다.  어제의 나를 다시 만나는 이 마음을 어찌 표현해야 할까.......... 

 

가끔 악몽을 꾸고 나면 나도 영화의 주인공처럼 묻고 싶다. 

 

-언제 이 악몽에서 벗어나 행복한 꿈을 꿀까?

-그런 일은 없을 거야.  행복하면 꿈을 꾸지 않을 테니까. 

 

 

 

 

 

화이트 크리스마스 ㅡ나태주
 
크리스마스 이브
눈 내리는 늦은 밤거리에 서서
집에서 혼자 기다리고 있는
늙은 아내를 생각한다

시시하다 그럴테지만
밤늦도록 불을 켜놓고
손님을 기다리는 빵 가게에 들러
아내가 좋아하는 빵을 몇 가지 골라 사들고 서서
한사코 세워주지 않는 택시를 기다리며
20년하고서도 6년 동안 함께 산 동지를 생각한다

아내는 그동안 네 번 수술을 했고
나는 한 번 수술을 했다
그렇다,
아내는 네 번씩 깨진 항아리고
나는 한 번 깨진 항아리다

눈은 땅에 내리자마자 녹아 물이 되고 만다
목덜미에 내려 섬뜩섬뜩한 혓바닥을 들이밀기도 한다

화이트 크리스마스
크리스마스 이브 늦은 밤거리에서
한 번 깨진 항아리가
네 번 깨진 항아리를 생각하며
택시를 기다리고 또 기다린다

<시집, 슬픔에 손목 잡혀 (시와시학사 2000)>

<눈 내리는 저녁 숲가에 멈춰 서서 - R. 프로스트 (1874~1963)>

 

여기가 누구의 숲인지 알 것 같다.

그 사람 집은 마을에 있으니

그는 모를 것이다 내가 여기 서서

그의 숲이 눈에 덮이는 모습을 지켜보는 걸.

 

일 년 중 가장 캄캄한 저녁

가까운 데 농가도 없는 이곳

숲과 얼어 붙은 호수 사이에 가던 길 멈춰 서있으니

내 조랑말은 분명 이상하게 여기나 보다

 

무슨 문제라고 있느냐고

방울을 한번 흔들어 본다.

그 밖에 들리는 다른 소리란 오직

부드러운 바람과 솜털 같은 눈송이 스치는 소리뿐.

 

숲은 아름답고, 어둡고, 깊다,

하지만 난 지켜야 할 약속이 있고

잠들기 전에 가야할 먼 길이 있다. 

잠들기 전에 가야할 먼 길이 있다. 

(bhlee역)

<Stopping by Woods on a Snowy Evening by Robert Frost>

 

 

ㅡㅡ

시인은 “한 해 중 가장 어두운 날 저녁(the darkest evening of the year)” 눈 오는 숲을 지나고 있습니다. 

그러다 그 숲의 깊고 어두운 아름다움에 끌려가던 길을 멈추고 말 위에서 한참을 바라봅니다. 

이리 들어오렴... 손짓하며 부르는 듯한 숲!!!

일 년 중 가장 어두운 겨울 저녁은 어떤 저녁일까요? 나의 마음이 가장 춥고 어두울 때는 어떤 때일까요? 

그럼에도 홀로 길을 가던 긴 여정 여기서 멈추고 들어가고 싶은 그 곳.

깊고 조용하고 어두운 그러나 아름다운 그곳의 유혹—그곳이 그냥 깊고 아름답다고만 하지 않았습니다.

시인은 분명 그곳이 어둡다(dark)말합니다. 

어두운 곳, 눈이 내려 덮이고 있는 깊은 아름다운 숲에서 그가 발견한 어둠, 그 어둠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긴긴 인생의 여행길, 어두운 겨울밤과 같은 먼먼 길을 홀로 가다가 누구나 한 번쯤, 아니 몇 번쯤

그냥 그 고요한 곳으로 모든 것 다 덮는 눈 속으로, 망각의 눈 속으로 들어가 편히 쉬고 싶은 마음이 들 때가 있습니다. 

 

시인도 그랬을까요? 한참을 그렇게 바라봅니다. 이 묘한 텐션 속에 시를 읽는 나도 빨려든 그 순간

영문 모르는 작은 조랑말은 뭐가 잘못 되었나 방울을 울리고 시인은 다시 현실로 돌아옵니다.
그리고 "잠들기 전에" 이 먼 외로운 겨울 길을 계속 가야 할 이유를 기억합니다.

하지만 난 지켜야 할 약속이 있고, 잠들기 전에 가야할 먼 길이 있다고. 

잠들기 전에 가야할 길이 아직 멀다고.

 

힘겨워서 고요하고 깊은 아름다운 어두움의 유혹 앞에 잠시 망설이게 될 때마다

나를 지탱해주는 약속! 그리고 가야 할 남은 길에 대해 기억해야한다고 일깨워줍니다. 

나에게 무슨 일이냐고 이렇게 방울을 울려주는 작은 말(馬)을 생각해봅니다.
나 여기 있다고 같이 가고 있다고 말해주는 그 작은 조랑말을 생각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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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조랑말의 방울소리 082020:

요즘은 내가 살면서 난 무엇을 남기며 살았을까 가끔 생각해 본다. 앞으로 가야할 길도 생각해본다. 하고 싶은 일, 해야 하는 일, 정말 무지무지 많은데 왜 이렇게 기력이 없는지, 왜케 자꾸 몸이 가라앉는지 한해의 2/3를 허망히 보내고 이대로 주저앉아 “나와의 약속/ 사랑하는 사람과의 약속”도 제대로 못 지키고 의미 없이 남은 삶을 사는 건 아닌지 슬프고 두렵고 야속하다.

 

그런데 어제는 무슨 특별한 날도 아닌데 문자를 몇 개 받았다. 이게 내가 걸어온 외로운 길과 지켜야 할 약속을 다시 일깨우는 말방울소리인 것일까?? 그 많은 세월 동안 부족한 내가 제자들에게, 그리고 주변 사람들에게 수 없이 받은 편지와 분에 넘치는 사랑을 기억해 본다.

내가 건강이 정말 많이 안 좋았던 어느 해 일 년 간 매주 연구실 문 앞에 말없이 두고 간 녹두죽과 과일,

얼려놓고 매일 먹으라고 하나하나 작은 용기에 포장해 건네주던 녹두죽과 김치,

때로는 밤늦게 일하던 내 방문 앞에 아무말없이 걸어두고 간 고구마.

때로는 노크만 하고 두고 간 꽃다발.

아니 몇 십 년 전, 사은회 때마다 다른 교수들 몰래 내 선물은 내 연구실이 건조하다고 (그때는 낡은 건물에 석유난로를 피던 시절) 가습기를 따로 준비해서 슬그머니 건네주던 학생들, 담요나 베개 같이 정말 세밀하게 살펴서 몰래 준비해주던 학생들.

내가 다리와 허리를 굽히지도 못하게 통증에 시달릴 때 말없이 서서 신을 신을 수 있게 긴~ 구둣주걱을 사다 준 제자.

수업 중에 핫팩을 준비해 주는 제자. 말없이 의자에 방석을 놓아주는 제자.

내가 좋아한다고 늘 일부러 한방 찻집에서 대추차를 사서 수업 전에 가져다 놓는 제자.

중국에서 출장 다녀올 때마다 대추를 사다 달라고 남편에게 부탁해서 가져다주던 제자.

일 년 내 철마다 농사지은 너무나 맛있는 김치를 보내주는 10년 넘게 오래된 내담자

외국에서 보내주는 내담자의 선물들.

예전에 고속도로 운전하며 출퇴근할 때는 오늘 날씨가 추운데.... 눈이 오는데.... 비가 오는데... 안개가 낀다는데... 운전 조심하시라고 전화해 주던 제자들.

어떻게 다 이루 말할 수가 있을까? 책으로 엮어도 몇 권은 되고도 남을 것이다.

 

그들은 모두 나의 가장 훌륭한 삶의 동반자였으며, 실수 많고 부족한 나의 참 스승이었다.

나는 참 많은 빚을 진 자라는 생각이 든다.

 

그래... 수없이 사람들에게, 그리고 제자들에게도 상처받았지만

정말 수도 없이 오해도 받고, 그걸 견디며 살았지만 감사할 일이 더 많다........라고

나의 작은 말(馬)이 방울을 울리며 나의 갈 길을, 지켜야 할 나의 약속을 일깨워 준다.

 

힘들고 지칠 때, 나만 혼자 가는 길이 너무 외로울 때 수없이 받았던 이런 작은 격려들, 아니 그보다, 내가 함께 해줄 수 있는 마음이 아픈 분들, 아니, 그 무엇보다 사랑하는 가족, 그리고 아직도 깊은 곳에서 기다리는 내면의 목소리--그런 것들을 기억한다.

자꾸 머물고 싶고 잠들고 싶은 깊고 어둡고 아름다운 눈 오는 숲 곁에서 나도 방울소리에 깨어 다시 길을 떠나야 한다.

이 눈 오는 겨울 길을 계속 가야한다. 날 깨워주는 작은 조랑말의 방울소리에 감사드린다.

나의 사랑하는 가족과 제자들과 인연들에 감사드린다. 

 

Do not go gentle into that good night,

Old age should burn and rave at close of day;

Rage, rage against the dying of the light

- Dylan Thoma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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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우연히 받은 편지들>

안녕하세요 교수님! 어떻게 지내시는지.. 건강은 어떠신지 안부 여쭙니다^^ 너무나 늦은 시간인 줄 알지만 무례를 무릅쓰고 메시지 드려요~~

제가 아이 둘을 키우면서 독서의 중요성을 새삼 깨닫고 있어요 그중 문학의 중요성을요.. 얼마 전 아이와 함께 읽으려고 황소와 도깨비라는 책을 읽었는데요.. 갑자기 교수님과 함께 했던 오셀로가 생각나더라고요.. 두 작품은 상황도 배경도 다른 내용이지만 오셀로에서 상징적인 요소들에 대해서 교수님이 설명해 주신 것이 생각이 나더라고요.. 그리고 제가 살아가면서 누군가를 이해할 수 있는 지표로 삼게 된 것이 Trifles라는 작품이에요.. 교수님과 함께하던 시간에도 가장 좋아하는 작품이었고 현재도 가장 좋아하는..^^ 인생을 살면서 도움이 많이 된 작품이에요. 문학이라는 건 내가 경험하지 못했던 세상 혹은 앞으로 경험할지도 모르는 세상에 대한 통찰력을 키워주는 너무나 중요한 보물이더라고요.. 아이를 키우면서 특히나.. 결혼해서 모르는 남이 가족이 되면서 특히나.. 문학을 배우길 잘했단 생각이 듭니다^^

좋은 감정과 생각을 잊지 않고 전하고 싶어 두서없이 메시지 드렸어요^^ 이런저런 이유로 지치실 때도 있으시겠지만 교수님 덕분에 마음속에 보물을 품고 살아가는 제자가 있다는 것을 생각하셨으면 좋겠어요 안녕히 주무세요!

<20년 전 제자 RR>

ㅡㅡ

교수님을 처음 뵙던 날~

2018년 8월 23일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제 마음속 고통의 깊이를 모른 채 왜 이렇게 삶이 공허할까 싶었던 순간, 교수님의 강의에서 영혼이 맑고 마음이 따뜻한 그리고 참여자 모두를 품어주시는 교수님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 순간이 제 삶의 터닝포인트가 되었습니다.

학교에서 스승과 제자로 배울 수 있는 기회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성과 열정사이에서 이성적 가르침과 열정적 사랑을 보여주시는 교수님 감사드립니다.

늘 건강하세요. 사랑합니다~^^♡

<특강을 듣고 무척 높은 연봉의 전문직 직장을 그만두고 대학원에 온 정말 소중한 선생님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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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수님~

맛있는 거 먹을 때면 교수님 생각이 자꾸,

보내드리면 좋겠다는 생각이 자꾸...^^

선배에게 교수님 주소를 받아놓고도 후딱 실행을 못 하고 있었네요.

교수님, 맛있는 누룽지 보내드릴게요. 입맛 없을 때 누룽지가 좋더라고요.

 

그리고, 저 00대 대학원 상담심리학과 박사과정 하고 있어요. 아직 일을 할 만큼의 체력은 아닌 듯하고, 시간이 아까워서요.

지난 1학기 수업받으면서 교수님 생각이 더 많이 났어요.

'우리 이봉희 교수님같이 열정이 있는 교수님이 없구나'하고~.

공부하면서 교수님 말씀이 이런 거였구나 새롭게 깨닫게 되는 경험도 합니다.

 

가까이 있으면 자주 뵐 수 있으련만.

건강도 잘 챙기시고, 식사도 잘 챙기세요.

 

<나에게 배우려고 먼 곳에서 천안으로 이사까지 ㅡ아이도 전학시키고ㅡ와서 공부했던 샘. 논문 쓰고 석사학위 따고 다시 고향으로 내려갔다가 암이 발견되어 수술했었지. 문학치료의 특수함 때문에 여기저기 좋은 곳에 취업이 되어서 일하고 계신 선생님. 내가 좋아하는 대추차를 무겁게 낑낑 사들고 서울까지 왔었던 선생님.>

하나의 나뭇잎이 흔들릴 때- 이어령 

 

하나의 나뭇잎이 흔들릴 때 

나는 하나의 공간이 흔들리는 것을 보았다

조그만 이파리 위에

우주의 숨결이 스쳐 지나가는 것을 보았다

하나의 나뭇잎이 흔들릴 때

나는 왜 내가 혼자인가를 알았다

푸른 나무와 무성한 저 숲이

실은 하나의 이파리라는 것을…

제각기 돋았다. 홀로 져야 하는 하나의 나뭇잎

한 잎 한 잎이 동떨어져 살고 있는

고독의 자리임을 나는 알았다

그리고 그 잎과 잎 사이를 영원한 세월과

무한한 공간이 가로막고 있음을

하나의 나뭇잎이 흔들릴 때

나는 왜 살고 있는가를 알고 싶었다

왜 이처럼 살고 싶은가를,

왜 사랑해야 하며 왜 싸워야 하는가를

나는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그것은 생존의 의미를 향해 흔드는 푸른 행커치프…

태양과 구름과 소나기와 바람의 증인…

잎이 흔들릴 때

이 세상은 좀 더 살만한 가치가 있다는

생의 욕망에 눈을 떴다

하나의 나뭇잎이 흔들릴 때

나는 어디로 가야 하는가를 들었다

다시 대지를 향해서 나뭇잎은 떨어져야 한다

어둡고 거칠고 색채가 죽어버린 흙 속으로

떨어지는 나뭇잎을 본다

피가 뜨거워도 죽는 이유를

나뭇잎들은 우리에게 가르쳐 준다

생명의 아픔과 생명의 흔들림이

망각의 땅을 향해 묻히는 그 이유를

그것들은 말한다

거부하지 말라

하나의 나뭇잎이 흔들릴 때

대지는 더 무거워진다

눈에 보이지 않는 끈끈한 인력이

나뭇잎을 유혹한다

언어가 아니라 나뭇잎은

이 땅의 리듬에서 눈을 뜨고 눈을 감는다

별들의 운행과 나뭇잎의 파동은

같은 질서에서 움직이고 있음을 우리는 안다

하나의 나뭇잎이 흔들릴 때

하나의 나뭇잎이 흔들릴 때

우리의 마음도 흔들린다

온 우주의 공간이 흔들린다.

 

Life is fine as good as wine.- L. Hughes
앞으로 살아야 할 많은 날들은 지금껏 살았던 날에 대한 말 없는 찬사이다. - 장정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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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고 나니 세상이 다시 보여요. 기어가는 벌레 하나도 너무 소중하고, 그 생명력이 무척이나 부러워요. 살아 있다는 게 얼마나 소중한지 이제 알았어요."
한 후배가 암에 걸려 항암치료를 받은 적이 있습니다. 치료를 받는 순간순간 자신이 물 없는 어항에 갇힌 물고기인 것만 같았다고 합니다. 그 끔찍한 순간을 겪다가도 여전히 숨을 쉬고 있는 자신을 느낄 때마다 살아 있다는 것이 그렇게 감사할 수 없었다고 합니다. 살아 움직인다는 것이 그 자체만으로도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지를 깨달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벌레는 알까요?
거대한 존재들 틈에서 무심코 밟히기라도 하면 이내 사라지고 말 자신의 운명이 절망스러울 때, 힘겹게 온몸으로 기어 다녀야 하는 그 삶이 부질없게 느껴질 때, 세상의 누군가는 자신을 지켜보며 살아 있음의 소중함을 깨닫고 있다는 것을.  

스스로를 벌레처럼 작고 힘없는 존재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알까요? 내가 살아서 존재하는 그 자체가 포도주처럼 더없이 멋진 일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쓸쓸해도 오늘 또 하루 감사하며 살아 있을 것입니다. 장정일 시인의 말대로 "앞으로 살아야 할 많은 날들은 지금껏 살았던 날에 대한 말 없는 찬사"이기 때문입니다.

출처: [이봉희 교수의 문학치유카페: 내 마음을 만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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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부터일까 가지가지 통증이 내 존재의 일부라는 생각을 하며 산다.  야속하게 끈질긴 방문객 혹은 동반자. 그러려니 하지만 가끔 서럽거나 지칠 때가 있다.  하지만 사실 누구에게든 살아가는 일은 그런거잖아.  

그렇게 감쪽같이 아프며, 아니 감쪽같이 아프지 않으며  참 길고 긴 길을 이 나이까지 걸어왔지 않은가?

그런데 아직 내게 남겨진 축복들, 넘치도록 더.욱. 더. 많.은. 감사한 일들도 내 삶과 존재의 일부가 아닌가?  잠시 또 잊었다.  

오늘도 살아서 숨을 쉬고, 계절을 느끼고, 음악을 듣고, 사랑하는 사람들과 대화도 나누고,  생각하고, 식사도 하고, 때로 눈물도 흘리고, 때로 화도 나고,  비명도 지르고, 절망도 하고, 자책도 하고, 후회도 하고, 외로움과 아픔과 통증을 느끼고… 내가 살아있기에 누리는 이 모든 일상이 얼마나 놀라운 기적이며 축복인가!!
내 어깨를 토닥여본다.
감사함이 나를 감싼다.

“아프지? 그게 진심만으로 살고 있다는 증거야”(마종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