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별파티
리를 자기 가족으로 입양했다고 늘 말하는 Kay네. 

어머니와 동생 Cindy가 일부러 멀리서 와주었고 언니 Susie는 전화를 걸었다. 오늘 하필 교회사람들 모임이 있어서 오지 못했다고. 선물을 보내주겠다고 주소를 묻는다.  특히 Mrs. Adams는 아이를 너무나 예뻐해주신다. 꼭 다시 돌아오라고 한다.  Kay의 언니 Susie의 딸 Jessica가 8월 27일 날 Jeremie와 결혼한다고.  두 사람 너무 잘 어울렸는데. 그리고 아들 Jake는 이번에 Univ. of Colorado를 졸업했다.  모두 두고두고 그리울 거다. 우리가 덴버에서 가장 행복해 했던 시간들은 이 가족과  함께 보낸 시간들이다.





Bringing Gifts

(a poem for Bonghee by Jane Pace)


You bring special meaning to the words

of the English language.


You bring life and awareness to

words I take for granted

and merely shrug away.


You bring carefully drafted thoughts

that take me below the written surface.


You bring heightened understanding

to the nuances of definitions

and stretch me to think and see anew.


You bring your intricate knowledge

of literature, poetry and poets

so I may know too.


You bring poems

from your vast emotional landscape.


You bring yourself fully

to the moment of self discovery

and reveal the dept of you heart.


I hope I have listened well

to the gifts you have brought me

dropping them like rose petals on my spirit.


I will miss you and your sweet daughter Erin.

And hope that we may meet again!

With deep affection for a wondrous and safe journey home.


Jane

June 18,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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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ne이 이 시를 나를 위해서 지어왔다. 그리고  읽어주면서 목이 메였다. 

Pat도 BongHee 라는 시를 지어왔다. 그리고 나에게 한번 안아보자고 하면서 자기는 울고 싶은데 울음을 시작하면 제어가 안돼서 참아야 한다고 했다.


모두들 정성다한 선물과 나를 위한 시를 하나씩 가져와 읽어주었다. 

오늘 파티에서 나는 너무 감동을 받았다. 너무나 진심어린 마음들이 모인 곳이었다.

이곳은 나를 그저 "나"로 받아주고 사랑해준 유일한 곳이다.  사랑스럽고 감사한 사람들이다. 너무나 아름다운 인간들의 모습을 본 것이 문학치료를  배운 것보다 더 잊지 못할 감사한 일이었다.

WH-II, 그리고 3번째 term에 들은 JTTS 수업.

Vivianne과 Laura( Laura Fonda,말고 새로운 로라), Cara가 합류.

Donna Dible은 WH1에서, Lynn Calloway는 CPT에서 함께 했고 하고 있는 친구들, 그리고 Jane Pace가 새로 시작 CPT와 DU 수업에 합류했었다.


비비안은 몸이 너무 안 좋아서 수업중 메트리스에 내려앉아야 한다. trs.g. 수술을 받았다는 사실을 나중에 Caroline에게서 전해들었다. 그래서 그랬구나. 너무나 맘이 아프다. 그녀도 말끝마다 웃는다...  말끝마다 웃는다...  

새로온 로라는 중학교 선생이다. 얼마전 이혼한 아픔을 안고 있다. 그리고 희귀병에 걸린 가족이 있다. Cara는 초등학교 교사. 카라와 로라 폰다는 모두 부모님이 그리스 사람이다.  어려서부터 이방인이라는 열등감에 사로잡혀 살았단다.  미국에서 태어났어도...  내가 "once a foreigner, forever a foreigner"라고 하자 너무나 공감하면서 자신들은 내가 너무나 용감해 보인다고 한다.  글쎄.. 용기는 막다른 골목에선 누구에게나 생기는 것인데


내게 그렇게 잘해주던 시원시원한 데비(호스피스)가 이 수업후 더 이상 수업을 듣지 못하고 있다. 수업중에도 늘 걱정했었는데.. 원인 모를 편두통.  빛과 소리 등 모든 감각에 과민반응을 보이, 원인도 모르고 치료약도 없는 편두통으로 시달린다. 결국 지난달 시카고까지 두주일 걸려서 밤에만 차로 이동하는 여행을 하여 검사를 받고 돌아왔다. 얼마전 메일을 주고 받았는데(조금 차도가 있다고 해서) 무척 힘든가보다.  학회에 참석못하게 된것을 무척 아쉬워했다,  화목한 가정에 직장, 대학원 학위 2개. 남부러울 것 없는 사람인데. 세상은 그 누구도 고통에서 예외가  없다. 어느 장소 어느 마을엘 가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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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urnal to the Self(JTTS)는 강좌의 이름이기도 하지만 Kathleen Adams 가 개발한 저널치료기법으로 그의 저널치료센터에서 받은 지도사 자격증을 가진 사람만이 그의 기법을 가르칠 수 있도록 되어있다.  [한국글쓰기문학치료연구소]만이 합법적인 그녀의 저널치료기법을 "교육" 할 수 있는 교육기관인 연구소이며 애덤스의 [저널치료센터]의 한국지소이다.




writing and healing I-du graduate class

Writing and Healing-I


내가 O'Keefe를 좋아한다고 하자 Santa Fe의 잡지와 안내서를 가져다 주었던 친구, 약혼자가 갑자기 사고로 죽음을 당하자 저널테라피 하나만 바라보고 맨하탄에서 덴버로 날아 온, 내가 가장 좋아했던 친구 Hope(그녀는 한학기 듣고 그만 두었다. 안타깝게도)는 내게 멋진 달력을 선물했다.  Caroline, Jane, 그리고 Debbie, Bruce, Pat 외에는 이 수업 후 헤어져서 이름을 잊었다...  직업도 시인, 작가지망생, 컴퓨터 프로그래머, 선생, 간호사, 호스피스, 수도국엔지니어 등 다양하다.

 























예전에는 문인들, 예술가들이 모여 담소를 나누었다는 Soho거리의 카페 피가로. 유난히 카푸치노 커피가 맛있었다는 곳. 이 날은 미지근한 카푸치노 만큼, 입술에 느껴지는 미끈한 크림의 감촉처럼, 그리고  눅눅한 열기의 7월 초 밤공기처럼 쓸쓸하기만 했다.

벽에 붙어있는 사진속 방문객들 -그들은 지금 쯤 저 먼 나라에서 무얼할까. 이 세상에서 찾아보고자 열심히 토론하고 표현하던 그 무엇을, 평화와, 해답을 찾았을까?  아니면 그 모든 게 그저 한갖 꿈속의 꿈처럼 작은 일들이어서 다 잊고 있을까? 어린시절 장난감 하나에 울고 웃고 다투던 기억이 우리에게 그저 입가에 맴도는 미소거리 밖에 되지 않듯이?   아니면 아직도 이곳에서 이루지 못했던 무엇이 그리워 그 미련 버리지 못해  저 사진속에서 처럼 이곳에 그림자로 남아 맴돌고 있을까?

멀리서는 독립기념일 불꽃축제의 폭축 터지는 소리가 환상처럼 들려오고 나는 언제나처럼 이방인이었다.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는 어디에도 뿌리내리지 못하는 나그네.  늘 축제에서 조금쯤 비켜서 있거나, 영광이 다 사라진 뒷골목 추억의 카페에 죽은 자들의 환영과 함께 앉아있는. 나도 그저 또하나의 그림자, 환영에 지나지 않는 ..

7월 4일
 
검은 벽에 기대선 채로
해가 스무 번 바뀌었는데
내 기린(麒麟)은 영영 울지를 못한다.

그 가슴을 퉁 흔들고 간 노인(老人)의 손
지금 어느 끝없는 향연에 높이 앉았으려니
땅 우의 외롱 기린이야 하마 잊어졌을라.

바깥은 거친 들 이리 떼만 몰려다니고
사람인 양 꾸민 잔나비떼들 쏘다니어
내 기린은 맘둘 곳 몸둘 곳 없어지다.

문 아주 굳이 닫고 벽에 기대선 채
해가 또 한 번 바뀌거늘
이 밤도 내 기린은 맘 놓고 울들 못한다.

[거문고 - 김영랑 ]

Copyright ⓒ2002 BongheeLee


과거를 낚는 외로운 낚시꾼: "내 속을 흐르는 강"
<흐르는 강물처럼>

우리는 경험을 했으되 그 의미를 몰랐다,
그리고 의미에 다가감은 그 경험을 되살려내는 일이다
우리가 행복에 부여하는 의미와는 다른 의미로,
전혀 다른 형태로. 내가 전에 말했었다
의미 속에서 되살아난 경험은
다만 한 인생의 경험이 아니라
여러 세대의 경험이라고―  (T. S. 엘리엇: 『네 개의 사중주』)
We had the experience but missed the meaning,
And approach to the meaning restores the experience
In a different form, beyond any meaning
We can assign to happiness. I have said before
That the past experience revived in the meaning
Is not the experience of one life only
But of many generations―   (T. S. Eliot, Four Quartets)


영화 <흐르는 강물처럼>은 흐르는 강물과 함께 시작된다. 그리고 한 노인이 떨리는 손으로 강에서 낚싯줄을 꿰면서 그 위로 들리는 보이스 오버 나래이션으로 시작된다.

오래 전 내가 청년이었을 때 부친께서 말씀하셨다. "노먼, 넌 글쓰기를 좋아하지?" 내가 그렇다고 대답하자 부친은 "언젠가 네가 준비가 되거든 우리 가족의 이야기를 쓸 수 있을 거다. 그러면 그때서야 너는 무슨 일이 있었으며 왜 그런 일이 있었는지 알게 될 거다."
Long ago, when I was a young man, my father said to me, "Norman, you like to write stories," and I said, "yes, I do," then he said, "someday when you're ready you might tell our family story.Onlythen will you understand what happened and why."


그래서 노먼은 그 가족의 이야기를 쓰기 시작한다. 그 글쓰기를 영상화한 것이 이 영화이다. 왜 이야기를 쓰는 것이 의미를 알아 가는 과정이 될까?

<흐르는 강물처럼>은 회상 속에 진행되는 영화이다. 회상영화의 특징은 이미 일어난 사건들을 단순히 재연해 주는 것이 아니라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다시 살아본다는 것이다. 즉 위에 인용한 엘리엇의 시가 말하듯이 경험하던 당시는 의미를 몰랐던 사건들을 그 의미를 알게 된 후에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보고 되살려 경험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우리는 시간 속에 있을 때 나의 시각으로밖에는 상대편과 사건을 바라볼 수 없다. 그러나 시간이 저만치 과거로 물러난 뒤 회상 속에서 다시 과거가 재연될 때는 과거의 나도 다른 이들도 그 삶의 배우가 되어 회상이라는 스크린에 비쳐지게 된다. 그리고 회상의 주체인 현재의 나는 관객이 되어 타인들의 행동 뿐 아니라 나도 몰랐던 나의 행동의 의미를, 나의 기쁨과 슬픔, 불안과 실수와 분노의 의미를 바라볼 수 있는 것이다. 마치 영화가 "영화 같은 우리 삶"을 아니면, "우리의 삶 같은 영화"를 스크린에 투영할 때 관객들이 그 속에서 자신의 삶의 파편들을 발견하고 의미를 발견하듯이 말이다.

즉 이 영화는 과거에 있었던 일을 그대로 영상으로 보여주는 것이기보다는 그 사건들 속에서 의미를 찾아가는 작가의 기억 속으로의 여정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 때 회상의 시각은 카메라의 눈이 되며 보이스 오버 나래이션(이 영화에서는 감독 레드포드의 목소리)은 회상하는 현재주인공의 의식과 깨달음 또는 과거에 대한 회상 내지 해석이 된다.

I. "우리 가족에게는 종교와 플라이 낚시 사이에 명확한 구분이 없었다."


소설의 첫 부분은 "우리 가족에게는 종교와 플라이 낚시 사이에 명확한 구분이 없었다(In our family there was no clear line between religion and fly-fishing.)"라는 말로 시작된다. 영화에서도 과거로 거슬러 올라간 회상의 시작이 같은 나래이션으로 시작된다. 즉 노먼의 가족사는 종교와 낚시와 맞물려있음을 알 수 있다.

애버트는 이 영화에서 플라이 낚시는 삶(life)자체를 의미한다고 말한다:

낚시하는 법을 바르게 배운다면, 강과 고기와 그리고 자기자신을 읽는 법을 배운다면, 또한 한치의 낭비 없이 정확하고 절도 있게 필요한 동작을 수행할 수 있다면 훌륭한 삶을 살 수 있는 우아함과 질서, 절제의 경지에 이르는 것이다. 강과 전 세계가 하나님이 지혜롭게 사용하라고 주신 선물임을 이해한다면 인생을 살아가는 법을 배운 것이다."


이것은 바로 목사가 예술의 경지라고 말하는 것인지 모른다. 맥클레인 목사가 메트로놈을 놓고 어린 아들들에게 정확한 박자와 리듬에 맞춰 낚시하는 법을 가르치는 인상적인 장면은 낚시하는 법은 리듬과 규칙과 질서를 훈련을 통해 익히는데서 출발함을 말해주고 있다:


스코틀랜드 사람이며 장로교도인 아버지는 인간이란 본질상 죄인이며 원래 창조 받은 기품 있는 인격에서 떨어졌다고 믿으셨다. 난 어릴 때 나무에서 떨어져서 그렇게 된 거라고 생각했다. 아버지가 하나님을 수학자라고 생각하시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분명 아버지는 하나님이 수를 셀 수 있으신 걸 믿으셨다. 그래서 그 하나님의 리듬을 익혀야만 우리 인간이 원래의 힘과 아름다움을 회복할 수 있다고 믿으셨다.(소설 "흐르는 강물처럼" 중에서)
As a Scot and Presbyterian, my father believed that man by nature was a mess and had fallen from an original state of grace. Somehow, I developed an early notion that he had done this by fallen from a tree. As for my father, I never knew whether he believed God was a mathematician but he certainly believed God could count and that only by picking up God's rhythms were we able to regain power and beauty.(Qtd from the story)



그리고 "모든 선한 것은―인간의 구원뿐 아니라 아주 작은 미물인 물고기 같은 것도―신의 은총을 통해 얻어지는 것이며 은총은 예술을 통해 얻어지고 예술은 그리 쉽게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To him, all good things - trout as well as eternal salvation - come by grace and grace comes by art and art does not come easy)는 부친의 믿음에 대한 회상은 곧 메트로놈으로 낚시 캐스팅하는 법을 가르치는 장면으로 연결이 된다. 다음 장면, 노먼은 집에서 부친으로부터 교육을 받으면서 글쓰는 법을 배우는 데 그때에도 목사가 강조하는 것은 절제되고 간결한 문장이다. 이 모두가 선함과 고귀함과 힘을 회복하기 위해 절제의 훈련이 얼마나 중요한 훈련 중 하나인지를 말해주고 있다. 왜냐하면 "인간은 본성적으로 자비로움과 고귀함을 회복하려 하지는 않고 다만 힘만을 추구하기 때문이다"(it is natural for man to try to attain power without recovering grace).

그러나 맥클레인 목사는 또 한편으로는 아이들에게 간섭 없이 맘놓고 자연의 품속에서 사슴처럼 뛰어 다니고 송어처럼 헤엄쳐 다니게 함으로써 자연에 나타난 하나님의 질서를 배우게 하고 있다. 이러한 자연의 힘과 이성적 절제의 힘은 이 영화에서 두 형제가 각각 대표하는 힘이기도 하다.

영화는 이러한 그들의 삶과 낚시의 관계를 첫 장면에서 아름다운 영상으로 보여준다. 노인이 된 노먼이 그들의 삶이 낚시와 종교와 하나였다고 회상하면서 낚싯줄을 엮는 첫 장면은 이제 그가 그의 넋을 사로잡고 그의 존재 속을 흐르는 강물 속에서, 영겁의 시간의 흐름 속에서, 기억의 강물 속에서 과거를 낚아 올리는 행위를 뜻한다. 그리고 그것은 영화의 끝 장면에서 강에서 혼자 낚시를 하는 외로운 노인의 마지막 나레이션― "강은 내 넋을 사로잡고 나를 떠나지 않고 흐른다"(I am haunted by waters)―으로 연결된다. 그가 기억의 강에서 과거를 낚아 올리는 행위는 자기 자신과 가족을 다시 읽는 행위이며 무엇보다도 과거의 노먼이 이해하지 못했던 동생 폴을 이해하고자하는 현재의 노먼의 시도이다.


II. "나는 정어리가 싫다니까!"


노먼에게 있어서 강을 이해하고 고기를 이해하는 것은 바로 폴을 이해하는 행위와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아니 반대로 폴을 이해하는 것은 강을, 자연을, 엄격함과 질서와 형식이라는 세계의 힘(부친이 메트로놈으로 교육했던) 이면에 흐르는 그것들을 초월한 예술의 원리인 열정과 역동성, 즉 디오니소스적 힘을 이해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영화의 가장 중요한 주인공은 바로 자연이며 특히 힘차고도 위엄 있는 빅 블랙풋 강이라 볼 수 있다.

폴이야 말로 강물처럼, 고기처럼 노먼에게는 예측할 수 없으며, 때로는 위협적이기까지 한, 이해하기 힘든 존재였다. 그는 자연에 나타난 신의 법칙이었으며, 아폴론적인 힘인 노먼의 반대편에 있는 디오니소스적인 힘이었다. 때론 흐르는 물처럼 한없이 부드러우며 편견 없이 모든 것을 감싸안고 수용하는 마음을 가졌고, 모든 것을 덮은 대지처럼 엄청난 인내심과 절제력을 가진 폴, 그러면서도 그 누구도 도전할 수 없는 강인함과 거친 행동을 대지 속에 잠재우다가 화산처럼 뿜어내기도 하는 폴에게 누구나 매료되는 이유는 그가 가진 열정과 자유분방한 생명력이 자연의 그것과 닮았기 때문이다. 노먼은 어려서부터 동생의 강함이 그의 내면 깊숙한 비밀스런 곳에서 흘러나오는 것이며 피를 흘리며 싸워 증명해 보이지 않아도 저절로 알게되는 너무나 자연스런 그의 일부임을 알고 있다:

나는 피를 흘리도록 싸워보았기 때문에 내가 강하다는 것을 알았다. 폴은 달랐다. 그의 강인함은 그의 내부의 비밀스런 곳에서 나오는 힘이었다. 그는 자기가 그 누구보다도 강하다는 것을 자연스레 알고 있었다.
I knew I was tough because I had been bloodied in battle. Paul was different. His toughness came from some secret place inside of him. He simply knew he was tougher than anyone alive.

폴의 "내면의 강인함"에 대한 이런 노먼의 나래이션(회상)과 함께 영화의 장면은 길에서 코피를 흘리며 싸우던 거칠고 강한 노먼의 모습에서 클로즈업되는 오트밀 죽 그릇으로 바뀐다. 아버지의 엄한 명령과 설교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온 가족이 숨죽이며 식사도 못하고 정오가 넘도록 기다려도 폴은 먹기 싫은 오트밀 죽을 거부한다. 그렇다고 그가 반항적이거나 예의 바르지 못하다거나 한 것도 아니다. 아버지가 폴이 먹기 싫은 오트밀을 먹으라고 한 이유는 "사람들은 천년간이나 하나님이 주신 귀리를 먹고 살아왔다. 그 전통을 어기는 것은 여덟 살 난 아이가 할 일이 아니다"라는 것이며 그것으로는 어린 폴을 설득할 수 없다. 폴의 강인함은 바로 그 어린 나이에도 묵종을 거부한 내면의 강함이다. 아버지가 마침내 포기하고 식사기도를 해 줄 때 폴은 안도하지도, 내가 이겼다는 듯이 득의 만만하지도 않다. 노먼의 말대로 자신의 강함을 스스로 알고 있는 것인지 그저 평소처럼 기도할 뿐이다.

영화에서는 오히려 동생의 그런 강인함을 감지하는 노먼의 심리적 위축과 두려움을 테이블 밑으로 순하게 기도하는 폴을 훔쳐보는 노먼의 은밀한 엿보기 시선으로 절묘하게 표현해 주고 있다. 그리고 폴은 이미 어른이 되기도 전 어느 순간, 형과 함께 받은 교육인 아버지의 질서와 절제, 엄격한 네 박자에 맞춘 리듬을 초월(파괴)하고 그는 자신만의 리듬을 가지기 시작한다: "그 때 나는 놀라운 일을 보았다. 처음으로 폴이 아버지의 가르침에서 벗어나 자기만의 독창적인 리듬을 타기 시작한 것이다."(I then saw something remarkable. For the first time Paul broke free of our father's instructions into a rhythm all his own)

이러한 폴의 성장은 그 직전 형제가 보트로 폭포를 타는 모험을 한 후에 생기는 변화임을 알 수 있다. 마치 새가 알을 깨뜨리고 나온 듯 자신만의 리듬을 터득한 것이다. 이처럼 비상은 자신의 세계를 부수는 모험이 있어야 한다. 이때 세계란 바로 자기 자신의 한계를 말하는 것이지 사람들이 살고있는 세계가 아니다. 사실 폴 만큼 사람들(세상)을 공정히 수용한 인물은 이 영화에서 없는 듯 하다. 모두들 멸시하고 혐오하는 원주민 여자 메이블, 형이 그렇게 한심하고 못마땅하게 여기는 닐 등 그 누구라도 그는 편견 없이, 자신의 가치관을 강요하는 법 없이 있는 그대로 수용하고 있다.

소설 속에서 노먼은 왜 동생이 어려서부터 그렇게 내기(betting)를 좋아했는지 모른다고 했다:

우리가 십대일 때는―어쩌면 일생동안―서너 살 아래인 동생이 종종 아이처럼 보이기 마련이다. 그러나 난 일찍이 그가 낚시의 대가가 될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는 훌륭한 교육 외에도 타고난 천재성, 행운, 그리고 넘치는 자신감을 가지고 있었다. 십대 아이 적부터 그는 누구하고 낚시를 하든지 그 사람과 (심지어는 형인 나까지도) 대적해서 자기자신에게 내기를 걸기 좋아했다.... 나는 동생보다 3살 어른이었지만 그래도 아직은 돈내기를 할 나이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내 생각에 도박 같은 것은 밀짚모자를 뒤로 재껴 쓴 어른 남자들이나 하는 일 같았다. 그래서 동생이 두어 번 내게 "그냥 더 재미있게 하려고 얼마를 걸자고" 제의했을 때 난 무척 혼란스럽고 당황했다. 세 번째 그가 또 내기를 하자고 했을 때는 아마 내가 화를 냈던가 보다. 그후로 그는 다시는 돈 얘기를 내 앞에서 한 적이 없다. 정말 돈이 꼭 필요한 때조차 그는 내게 단 몇 푼조차도 빌려달라고 하지 않았다. ...그는 내게 "어린 동생"이었던 적이 없었다. 그는 예술가로서 대가였다. 그는 자기에게 충고를 하거나 도와주거나 하는 형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 그리고 결국 나는 그를 도울 수 없었다.(1장)
When you are in your teens―maybe throughout your life―being three years older than your brother often makes you feel he is a boy. However, I knew already that he was going to be a master with a rod. He had those extra things besides fine training―genius, luck, and plenty of self-confidence. Even at this age he liked to bet on himself against anybody who would fish with him, including me, his older brother..... Although I was three years older, I did not yet feel old enough to bet. Betting, I assumed, was for men who wore straw hats on the backs of their heads. So I was confused and embarrassed the first couple of times he asked me if I didn't want "a small bet on the side just to make things interesting." The third time he asked me must have made me angry because he never again spoke to me about money, not even about borrowing a few dollars when he was having real money problems.
...He was never "my kid brother." He was a master of an art. He did not want any big brother advice or money or help, and, in the end, I could not help him. (Ch. 1)


폴에게 폭포를 타는 모험은 도박처럼 완벽을 향해 자신에게 승부를 거는 도전의 한 형태다. 모험이란 '위험 속으로 내 던짐,' 즉 도박이다. 폭포를 타는 모험은 폭포에 대한 도전이 아니라 자신의 한계에 대한 도전이며 모험인 것이다. 릴케의 말대로 우리는 "식물과 동물 이상으로... 모험과 함께 가고 이를 의욕"하는 존재이기 때문일까? 모험과 함께 감을 "의욕"한다는 것을 릴케는 "자기수행"이라는 의미로 쓰고있다. 폴은 아름다움과 힘을 회복하기 위해 인간이란 끝없이 극복되어져야 하는 존재라고 생각한 것인지 모른다. 그것이 부친 맥클레인 목사가 말하는 대로 타락한 인간이 예술의 경지에 이르는 길이니까.

폭포를 타고 내려가는 모험의 장면에서도 노먼과 폴의 대조는 뚜렷이 나타난다. 어린 시절과 마찬가지로 16살 소년 노먼은 거칠고 힘센 벌목꾼들과 함께 일을 하면서 겉으로 보기에는 동생보다 더 남자다운 일을 하고 있다. 반면 폴은 수영장에서 안전요원으로 "여자들을 감상하며" 보낸다. 그러나 밤중에 친구들과 함께 모험을 위해 부모 몰래 집을 빠져 나올 때에도 노먼은 홈통을 타고 안전히 내려오고 폴은 지붕에서 뛰어내려 구른다. 폭포를 타고 난 후 친구들이 뒤집힌 배를 보고 놀랄 때 폴은 숨어 있다가 갑자기 물에 뛰어들어 친구 쳐브를 더욱 놀라게 해준다. 그리고 카메라는 "노먼은?" 이라고 묻는 처브의 시선을 따라 강둑에 올라 앉아있는 노먼을 비춰준다. 친구들의 "괜찮아?"라는 질문에 노먼은 여유 있게 "물론"이라고 말하지만 카메라가 어둠 속에서 잡아 낸, 아니 어쩌면 노먼이 어둠 뒤로 감춘 그의 얼굴은 의기양양한 폴과 달리 아직도 겁에 질려 넋이 나간 표정이다.

집으로 돌아오는 형제를 기다리고 있던 부모님께도 노먼은 "경어(Sir)"를 붙이며 대답하고 동생은 "다 내가 생각해 낸 거예요, 아버지"라고 하면서 오히려 형을 두둔한다. 그리고 다음 장면에서 두 형제는 샌드위치에 정어리를 넣는 사소한 일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형제간에 격렬히 주먹을 날리며 싸움을 한다. 동생이 싫다고 하는 데도 무시하고 정어리를 넣어주기 때문에 노먼이 분통을 터뜨리는 것이다--"난 빌어먹을 정어리가 싫다니까!(I don't want any goddamn sardines!)"

그러나 이 싸움은 정어리 때문이 아니다. 자신은 죽을 뻔했던 공포의 경험과 충격에서 아직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데, 어쩌면 목사의 말대로 죄책감마저 느끼고 후회하고 있는데, 동생은 의기양양하게 이 사건이 학교신문에 날거라는 둥 신바람이 나있다. 게다가 형이 먹는 샌드위치마저 자기 방식대로 정어리를 넣어야 한다고 자신을 리드하듯이 만들어 주고 있는 것이다. 몇 번이나 정어리가 싫다고 했는데도 무시한 채. 사소한 정어리가 발단이지만 그건 정어리가 싫다는 자신의 말을 무시한 폴에 대한 단순한 분노 이전에 지금껏 동생에게 느껴온 열등감과 위축감이 목숨을 건 폭포 타기 모험에서 극대화되었기 때문이다.

어머니의 개입으로 싸움은 끝나고, 그들 사이의 유일한 싸움이었던 그 사건을 회상하면서 나래이터는 아마 그 후에 서로 말은 하지 않았어도 "둘 중 누가 더 강한가 궁금했을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지만 카메라가 보여주는 형제, 노려보는 두 사람 중 코피를 흘리고 선 쪽은 노먼이다.


III. 내가 떠나있는 동안 동생은 예술가가 되어있었다.

폭포 타기가 폴에게는 성인으로 가는 입문식이었을까, 다음 장면에서 노먼은 폴이 아버지의 가르침에서 벗어나 자기만의 리듬을 타고 낚시를 하는 것을 목격한다. 한편 노먼도 아버지의 엄격한 가르침과 규범에서 벗어나 3000마일 떨어진 동부 다트머스 대학으로 떠나게 된다. 두 형제의 어린 시절은 이렇게 아버지의 가르침과 네 박자 규칙의 울타리를 벗어나는 사건과 함께 끝나게 된다.

그리고 노먼이 6년 후 청년이 되어 대학에서 돌아올 때 폴은 여전히 몬타나주를 떠나지 않은 채 헬레나에서 신문기자로 일하고 있다. 그러나 다트머스도 노먼을 변화시킨 것 같지 않다. 제시에게 뉴욕 그리니치 빌리지에서 본 닐 암스트롱과 재즈 이야기를 하면서 현학적인 냄새를 풍기는 거라든가, 제시의 오빠 닐의 괴팍스럽고 허세로 가득 찬 속물근성을 미워하고 경멸하는 것 등은 겉으로는 자유와 진보를 갈구하는 듯하지만 여전히 보수적임을 알 수 있다. 그가 부친과 함께 워즈워드의 송시(Ode)를 한 구절씩 낭송하는 "이중주"는 노먼이 비록 목사직을 이어받지는 않아도 부친의 아폴론형 예술적 기질과 가치관을 전수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노먼은 또한 동생에게 지고 싶지 않은 자존심과 경쟁심에서도 여전하다. 이것은 신문사에 찾아간 노먼에게 폴이 축하주를 권하자 처음엔 거절하다가 동부가 형을 유약하게 만들었다는 말에 (모자로 남이 보지 못하게 가리고는) 술을 먹는 장면이나, 특히 둘이서 빅 블랙풋 강에서 낚시를 할 때 잘 드러난다. 동생 폴은 형에게 좋은 자리를 양보해주고 캐스팅에 자꾸 실패하는 형에게 그 동안 솜씨가 약간 녹이 슨 것뿐이라면서 이런 저런 조언을 해준다. 이때 카메라가 바라본 노먼의 얼굴은 심기가 불편하다. 나중에는 폴을 쳐다 보지조차 않는다. 어느 새 훌쩍 커버려 남자가 되어버린 동생, 예전에도 어렴풋이 느꼈지만 그 앞에서 어딘가 모르게 압도당하는 게 불편하기만 하다.

폴은 이런 형의 맘을 읽고는 슬그머니 노먼이 보이지 않는 곳으로 자리를 옮겨간다. 동생이 사라지자 노먼은 그제야 맘놓고 캐스팅을 시도해보고 마침내 옛 실력이 발휘가 되어서 큰 고기를 낚는다. 좀 전 굳어졌던 표정과 달리 성공 앞에 환하게 웃는 노먼의 의기양양한 모습이 왠지 좀 초라해 보이는 것은 아마 타인 앞에 나의 약점과 실패를 견디지 못하는 사람, '자유인'이 되지 못한 노먼의 모습을 보았기 때문인지 모른다.

만족스런 표정으로 동생을 찾아가던 노먼은 멀리서 폴이 "셰도우 캐스팅"을 하는 모습을 보게 된다. 그리고 그가 떠나있는 동안 폴이 "예술가"가 되어있는 것을 깨닫는다.(I realized that in the time I was away my brother had become an artist.)


IV. 제시―노먼의 "몬타나"

그러나 사실 노먼도 나름대로 또 다른 "예술가"가 되어있다.

제시와 노먼의 첫 데이트에 폴과 메이블이 동행한다. 이 때 노먼은 폴의 친구인 원주민 여인(인디안) 메이블을 모나시타라고 소개한다. 소설을 보면 모나시타라는 이름은 노먼이 붙여준 것으로 보인다:

나는 그녀를 '모-나-시-타' 라고 불렀다. 체옌느 추장, '작은 바위'의 아름다운 딸의 이름이었다. 처음에 그녀는 '봄에 싹트는 어린 풀'이란 뜻의 그 이름에 별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내가 모-나-시-타가 죠지 암스트롱 커스터 장군의 사생아를 낳게 된다고 설명하자 마치 오리가 물을 만난 듯 자연스레 그 이름을 좋아하기 시작했다. (소설에서 인용)

I called her Mo-nah-se-tah, the name of the beautiful daughter of the Cheyenne chief, Little Rock. At first, she didn't particularly care for the name, which means, "the young grass that shoots in the spring," but after I explained to her that Mo-nah-se-tah was supposed to have had an illegitimate son by General George Armstrong Custer she took to the name like a duck to water.(qtd from the story)


노먼은 또한 건배를 하면서 에드나 센트 빈센트 멀레이(Edna St. Vincent Millay)의 "내 촛불은..."이라는 모험적이고 희생적인 삶의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시를 낭송한다:

My candle burns at both its ends;
It will not last the night;
But ah, my foes, and oh, my friends,
It gives a lovely light!
내 초는 양쪽에서 타고 있습니다;
밤이 가기 전 다 타버리겠지만;
아 내 적들과, 오 내 친구들이여,
내 초는 아름다운 빛을 냅니다!

폴이 낚시에서 예술가의 경지에 이르고 있다면 노먼은 문학에서 예술가가 되어가고 있다. 노먼이 제시에게 보낸 아름다운 편지를 보면 노먼의 제시에게 대한 사랑의 감정은 에덴동산 같은 태초의 자연, 어린 시절 첫 대면한 몬타나의 때묻지 않은 자연의 품에서 느낀 원초적인 감정과 연결되어있다.

...내 마음은 노래로 가득 차있습니다. 어느새 나는 부드럽게 콧노래를 부르고 있습니다. 음악에 맞춰서가 아니라 다른 것, 다른 장소, 기억에 떠오르는 장소, 사슴 외에는 아무도 밟아 본적이 없는 초원에 맞춰서 말입니다. 그리고 그 기억은 서툴렀던 내 팔에 안겨 춤추던 당신의 체온으로 인해 더욱 강렬히 살아나고 있습니다.
...my mind is filled with song. I find I am humming softly, not to the music, but something else, someplace else, a place remembered, a field of grass where no one seemed to have been except the deer. And the memory is strengthened by the feeling of you dancing in my awkward arms.


소설에서는 그녀를 품에 안고 있을 때 마치 자기를 이 세상에서 떼어내어 데려가는 느낌이었다고 기술하고 있다:


누군가 나를 이 지상에서 이탈시키려는 사람을 품에 안고 있을 때 그리고 내가 그녀를 따라갈 자격이 없는 것 같은 느낌을 받을 때 얼마나 기분이 묘하고도 놀랍고 또 어리둥절한지 모른다.
It is a strange and wonderful and embarrassing feeling to hold someone in your arms who is trying to detach you from the earth and you aren't good enough to follow her.


제시는 노먼에게 순수한 어린 시절과 때묻지 않은 "자연(본성:nature)"―사슴 외에는 밟아본 적이 없는 "그 곳"을 영혼 속에 회복시켜주고 이 세상에 뿌리내려 세속화되는 것을 막아주는 여성적인 힘, 또 다른 "몬타나"이다. 노먼은 고향 몬타나만큼 하나님의 질서를 배우기 좋은 곳은 없다고 회상하고 있다: "그곳(몬타나)은 아직도 이슬을 머금고 있는 세계이며 내가 지금까지 본 어떤 곳보다 경이로움과 가능성으로 가득 찬 곳이었다."(It was a world with dew still on it more touched by wonder and possibility than any I have since known.)

이것은 제시를 만나기 전 6년만에 고향 몬타나에 돌아와 옛친구들과 재회했을 때, 세상에는 못된 사람들로 가득 찼다고 하는 노먼에게 "몬타나에서 멀어질수록" 못된 사람의 수가 늘어난다고 말하는 장면을 연상시킨다. 그리고 노먼이 정말 고향의 품에 안긴 것을 실감하는 때는 부친의 교회에서 설교를 들을 때이다. 부친은 그 때 노먼이 제시에게 보낸 편지에 쓴 것과 같은 기억, 어린 시절의 순수함에 대한 기억에 대해 설교한다:


...마음속 깊은 곳의 느낌이 살아나 기억을 되살리면 우리는 이렇게 노래한 시인이 생각납니다. "과거로, 과거로 시간이여 거슬러 날아가 다오. 다시 어린 시절로 돌이켜다오, 오늘밤 한 번 만이라도."
...and in the glow of awakened memories when the deepest feelings of the heart are all astir, we are reminded of the poet who sings "Backward, turn backward, Time, in your flight, make me a child again, just for tonight."


맥클레인 목사가 낭송한 시 구절은 19세기 영국시인 엘리자베스 알렌(Elizabeth Allen)의 "날 흔들어 잠재워주세요(Rock me to Sleep)"라는 시의 첫 부분이다. 이 시는 삶의 무게와 거짓과, 사랑의 부재에 지친 여인이 참 사랑의 실체인 어머니를 그리워하며 부르는 시이다. 어머니가 흔들어주던 요람 같은 어린 시절로 돌아가 그 사랑 속에서 잠들고 싶어하는 열망은 지친 주인공의 심정이 절실히 나타난 것으로, 시의 후반부에 이르면 시인이 노래하는 잠은 단순한 잠이 아니라 영원한 안식인 죽음을 말함을 알 수 있다. 즉 시인이 갈망하는 참 평화는 결국 이 세상엔 없다는 절망이 숨겨진 시이다.

후에 노먼과 맥클레인 목사가 함께 낭송하는 워즈워드의 송시, 『영혼불멸송: 어렸을 때를 추억하여』(Ode on Intimations of Immortality: From Recollections of Early Childhood)도 어렸을 때는 순수한 영혼을 지닌 인간이 어른이 되면서 신과 자연으로부터 멀어져 간다는 인간관을 암시하고 있다. 워즈워드는 우리가 세계의 경이로움을 바라보지 못하는 것은 우리의 눈이 어른이 되면서 "낯익음과 이기적인 근심걱정의 막(film of familiarity and selfish solicitude)"으로 가려져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자연과 인생의 경이로움을 볼 수 있는 순수한 눈의 회복은 문학이라는 예술이 담당하는 몫이다. 폴이 그 순수한 세계의 표상인 그의 "몬타나"를 떠나지 않고 인간이 하나님에게서 지음 받은 아름다운 인격을 회복하기 위해 자연과의 합일을 이루는 제의적 행위인 낚시에서 예술가의 경지에 이르고 있다면, 노먼은 자신의 "몬타나"인 문학을 통해 예술가의 경지에 다가가고 있는 것이다.

니체는 『비극의 탄생』에서 그리스 비극 속에 결합된 두 가지 예술적 충동을 구별하여 도취로 특징지을 수 있는 음악의 충동을 디오니소스적이라 칭하고 미술과 서사시의 조형예술적 충동을 아폴론적이라 했다. 아폴론형의 예술은 몽상적, 정관적이며, 단정, 엄격, 질서, 조화를 추구한다. 디오니소스형 예술은 도취적, 격정적이며 역동, 열정, 파괴를 지향한다. 또 이 두 종류의 힘은 예술의 영역을 넘어서 세계의 원리이기도 한데 아폴론적 원리가 세계의 형식과 질서를 부여하는 것이라면 디오니소스적 원리는 형식이나 질서에 구애를 받지 않는 삶을 뜻한다. 이 영화에서 노먼과 폴, 두 형제는 앞에서 말 한데로 그 두 가지 힘을 대표하는 인물로 보인다.

제시에게도 폴과 같은 기질이 있다. 그래서일까, 제시는 노먼보다 오히려 폴에게 매력을 느끼는 듯하다. 메이블이 낚시 미끼를 판다고 하자 표정이 잠시 굳어지는 노먼과 달리 그녀는 메이블의 길고 검은머리를 칭찬해준다. 그녀는 주위의 비난 어린 시선을 아랑곳하지 않고 메이블과 함께 열정적으로 춤을 추는 폴을 감탄하며 바라본다. 폴의 격정적인 춤은 마치 두꺼운 위선의 갑옷을 두르고 그 속에 편견과 우월감을 교묘히 숨기고 있는 세상의 불의한 이성과 거짓 도덕, 지성주의에 반항하는 고독한 투쟁으로 보인다. 인종차별, 아나콘다 광산의 비리, 신문이 세상과 타협하는 현실, 인간들이 멋대로 규정짓고 울타리 치고 파괴한 자연의 법, 흐르는 강물의 섭리를 역행하는 행위, 이런 것들에 맞서서 폴은 보란 듯이 디오니소스적인 몸짓으로 외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폴의 이런 거친 행동과 절제된 낚시예술 사이에는 아무런 모순이 없는 것이다.

그러나 노먼은 그런 폴을 이해하지 못한다. 폴이 만취해서 싸움을 하고 메이블과 경찰서에 있을 때 노먼은 폴이 도박을 하는 것을 알고 도와주려 하지만 폴은 도움을 원치 않는다. 다음날 야유회에서 폴이 나타나는 것을 보고 미리 자리를 피하는 노먼, 그러면서도 멀리서 폴의 행동을 지켜보는 노먼의 싸늘하고 무표정한 시선은 그가 동생을 이해하지도, 용납하지도 않고 있음을 보여준다. 어젯밤 경찰서의 사건은 없었던 일인 듯, 아무것도 아닌 듯, 일상으로 돌아와 모든 이들에게 상냥하고 친절하며 분위기를 밝게 해주는 폴, 자기에게 밝게 웃으며 손을 흔드는 모습, 어머니를 번쩍 안아 빙글빙글 돌 때 어머니의 행복한 비명소리, 그리고 어느새 아버지에게 다가가 말굽던지기 게임을 함께 하는 상냥한 폴의 모습은 노먼에게 당혹스런 이중적 성격으로 느껴지는지 모른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폴과 달리 제시의 오빠 닐도 용납할 수 없다. 그리고 그래서 그는 폴처럼 "아름다운" 낚시꾼의 경지에 이르지 못하는 지 모른다. 고기와 같이 생각할 수 없으니까. 선함과 추함과 모든 것을 함께 수용하고 있는 모순과 조화의 공존체인 자연을 읽을 수 없으니까.


V. 닐: "낚시를 모르는 사람이 낚시를 하는 것은 고기를 모독하는 행위이다."

영화에는 폴의 건너편에 또 다른 '가족이 이해하기 힘든', 그리고 '도와 주려하지만 도움을 받지 않는' 인물로 닐이 등장한다. 닐은 "낚시"라는 예술을 훈련받지 못한, 하나님의 리듬을 익히지 못한, 그 훈련의 과정을 겪지 못한 "폴"로 등장한다.

닐의 거친 성격과 어디로 튈지 모르는 탁구공 같은 불안정한 성격은 세상에 뿌리내리지 못하고 있다는 점에서 일견 폴과 같은 지 모르지만 아무도 그에게서 디오니소스적인 예술 혼을 발견할 수 없다. 파도타기에 대한 자랑과 거짓으로 지어낸 사냥 모험담은 폴이 폭포를 탄 후에 의기양양하던 모습과는 전혀 다른 속물적 허세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 제시의 가족은 그런 닐을 있는 그대로 받아주고 사랑해준다. 그녀도 맥클레인 목사처럼 "왜 가장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 그걸 받지 않으려는 걸까요?(Why is it that people who need the most help won't take it?)"라며 오빠를 염려하는 것이다.

낚시를 데리고 가서 노먼과 폴의 닐에 대한 태도는 그들의 성격만큼 차이를 보인다. 노먼은 닐을 무시한 채 버려 두고, 폴은 우리가 그를 도와주어야 하는 게 아니냐고 한다.

노먼: 그 망나니를 어떻게 도와?
폴: 낚시하러 데리고 가는 거로.
노먼: 닐은 낚시를 좋아하지 않아. 몬타나도, 그리고 난 더더욱 좋아하지 않아.
폴: 아마 누군가가 자기를 도와주는 것은 좋아 할거야.
Norman: How do you help that son of a bitch?
Paul: By taking him fishing.
Norman: He doesn't like fishing, doesn't like Montana. Sure as hell doesn't like me.
Paul: Well, maybe what he likes is somebody trying to help him.

폴은 실패자이며 낙오자인 닐도 수용하고 도와주려는 마음을 가졌다. 마치 강물처럼, 자연처럼, 소외된 계층의 메이블과 아나콘다 광산의 광부들을 그 품에 품듯이 닐도 받아들이는 것이다. 노먼과 달리 폴이 거부하는 사람들은 연약한 자들, 불완전한 자들이 아니라 힘이 있으되 "grace(은총/자비/아름다움)"가 없는 자들, 즉 비인간적인 힘(권력, 지력, 기득권, 우월감)을 행사하는 자들인 것이다. 이것은 바로 부친이의 말을 빌면 "낚시하는 법을 모르면서 고기를 잡는" 힘을 행사해서 고기를 모독하는 사람들이다: "누구라도 낚시를 할 줄 모르는 사람이 낚시를 하는 것은 고기를 모독하는 행위이며 그것은 결코 용납될 수 없는 행위다."(Nobody who did not know how to catch a fish would be allowed to disgrace a fish by catching it.)

닐을 보살펴주지 않고 버려 둔 노먼의 태도에 대한 불쾌감의 표시로 제시는 자동차를 기차 길로 모는 모험으로 노먼을 비웃는다. 그 때에도 카메라에 잡힌 노먼의 겁에 질린 표정은 제시의 저돌적이고 당돌하고 냉소적인 표정과 대조를 이룬다.

집에 돌아와 식사를 하면서 노먼은 "형은 재미없대요(He's not funny)"라고 제시의 말을 옮겨주는 동생 앞에서 다시 한번 실패 감을 맛본다. 폴이 대통령과 인터뷰를 했다고 부모님이 자랑스러워하자 돌연 노먼은 폴이 길에서 자동차로 친 동물을 먹는다(He usually eats what he hits on the road)고 비아냥거린다. 폴이 닐이 데리고 온 행실 바르지 못한 여자(로하이드)도 알고 있었고, 롤로의 도박판에도 가고, 메이블과 "친구"이고, 아무하고나 잘 어울리기 때문에 닐같은 한심한 인간을 받아들이는 거라고 비꼬는 것이다. 폴에 대한 이런 공격과 비난은 그가 느낀 실패감에 대한 보상심리인 것 같다. 폴도 "이번엔 형도 꽤 재미있군"이라며 잠시 날카로워지지만 이내 자제하고 밖으로 나간다. 이런 폴을 식구들은 모두 이해하지 못하고 염려하지만, 그리고 그들의 뜻대로 자라주고 있는 노먼을 자랑스러워 하지만 노먼은 맘이 괴로워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싼다. 사실 그는 진심으로 동생을 아끼고 사랑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영화는 이렇게 예술의 영역, 그리고 더 나아가 세계를 이루는 원리인 아폴론-디오니소스적인 정신의 대립과 공존 외에도 두 형제간의 사랑과 미움의 이중적 갈등의 신화를 주제로 하고 있다. 이것은 인류 최초의 형제인 카인과 아벨의 갈등에서부터 에서와 야곱, 탕자의 비유 등에 드러난 인간의 원초적인 갈등인지 모른다.


VI. 마지막 함께 한 낚시: "폴은 이 지상에서 초월해 있었다―예술작품처럼"

시카고 대학에서 강의 자리를 얻은 노먼은 제시에게 청혼했다고 말하면서 같이 시카고로 가자고 폴에게 말한다. 노먼은 폴에게 2천 마일이나 떨어진 대도시 시카고로 가면 그 곳에는 신문사가 수없이 많고 맘껏 뜻을 펼칠 수 있다고 설득한다. 그러나 폴은 한마디로 거절한다. "형, 난 절대 몬타나를 떠나지 않을 거야"라고 하면서. 그 때 웃고만 있는 폴의 표정위로 쓸쓸함이 바람처럼 스쳐지나간다.

폴이 그 모든 열정과 자유분방함에도 불구하고 평생을 이 작은 시골마을인 고향을 떠나지 않고 살겠다는 것은 그의 열정과 관심이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곳에 있기 때문이아. 성공하고, 안정된 자리를 얻고, 질서정연하게 사는 것 말고, 거대한 자연과 하나되는 것, 영원히 그곳에 있지만, 영원히 같은 모습이 아닌 흐름으로(la duree)으로 존재하는 자연, 가변적이며 순간적이면서도 동시에 영원한, 모순의 공존체인 자연에 끝없이 다가가는 것, 이것이 폴이 이룩하고자 하는 삶이며 회복하고자 하는 아름다움을 갖춘 힘이며 부친이 구원이라고 명명한 예술의 경지에 이르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인생이 비극인 것은 어쩌면 인생은 예술이 아니며 그 예술의 경지에 다다른 순간, 완벽을 이룬 순간은 영원히 지속될 수 없기 때문인지 모른다. 어머니는 낚시를 가는 남편과 아들들에게 늘 사진을 찍어오라고 부탁하는데 이것은 그렇게 사라지고 마는 순간을 영원히 붙잡아 두려는 무의식적 바램이다.

동생 폴과 부친과 함께 한 마지막 낚시에서 목사와 노먼은 폴이 완벽의 경지에 이른 것을 목격한다:

나는 그 순간 내가 완벽함을 목격하고 있다는 것을 분명하고도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동생은 우리 앞에 빅 블랙풋 강 둑 위에 서 있는 게 아니라 이 지상의 모든 법칙에서 자유로와 져서 공중에 초월해 서 있는 것 같았다―마치 예술품처럼.
At that moment, I knew surely and clearly that I was witnessing perfection.... My brother stood before us not on a bank of the Big Blackfoot River, but suspended above the earth free from all its laws like a work of art.


그리고 그 순간은 영원히 계속될 수 없기에 폴은 그렇게 그들의 곁을 떠나갔다. 아무도 폴을 완전히 이해할 수 없는 채.

양쪽에서 타 들어가는 촛불처럼 아름다운 빛을 내기에 빨리 꺼져버린 폴의 삶―그의 죽음은 자신들의 안일한 일상의 둑을 허물고 범람해 들어오는 홍수에게, 순풍대신 때론 바다를 뒤섞어 놓는 폭풍우와 파도에게 세상이 가한 응징이다.

폴의 죽음은 모두에게 엄청난 상실감을 가져다준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모두 가슴 구석에서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사실은 노먼의 고백과 같은 고백을 우리도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나는 그만큼 분명하고 그만큼 확실히 인생은 예술품도 아니고, 그 [완벽한 경지의] 순간은 영원히 계속될 수 없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강위로 붉게 퍼지는 일몰)
그래서 경찰이 어느 날 아침 나를 깨웠을 때... 난 아무 말 없이 그를 따라갔다.
And I know just as surely and just as clearly that life is not a work of art and that the moment could not last. (scene of sunset on the river)
And so, when the police sergeant awakened me one morning....I rose and asked no questions.


폴이 예술의 경지에 이른 가장 행복한 순간이 사진 셔터소리와 함께 클로즈업으로 화면에 비치고 그것이 관객의 마음에 찍힌 마지막 폴의 모습이다. 이어지는 일몰의 광경이 사라져갈 완벽의 순간을 예견시켜 주었기 때문일까, 관객들도 노먼처럼 마치 예견이라도 했듯이 폴의 죽음 앞에 "왜?" 라는 질문을 던지지 않는다. 관객들도 폴의 완성을 바라본 순간 그의 존재의 위험성을 직관적으로 감지하게 된다. 자신의 고귀한 영혼으로부터 소외된 인간들은 자연을 파괴함으로 자연과 대적하고 소외되었듯이 세상의 안일한 이기심과 가치관에 도전하는 힘들을 세상은 용납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부친은 노먼에게 계속 폴의 비참한 죽음에 대해 묻고 또 묻는다. 사람들이 어떤 고통스런 상황 앞에 답이 없어도 질문을 계속하는 이유는 납득할 수도 용납할 수 없는 생의 수수께끼에 다가가려는 반복적인 시도이다.

이것은 이 영화에서 낚시라는 제의적 행위가 상징하는 것이기도 하다. 한번도 똑같은 물결인 적이 없는 "흐름"앞에 나약한 작은 인간으로 서서 한결같은 인내와 희망과 겸손함과 훈련된 절제력으로 그리고 더 나아가서는 예술가적 직관으로 예측불허인 고기와의 해후를 기다리듯이 우리는 흐르는 인생가운데서 그 의미와 수수께끼의 답과 만나기를 기다리는지 모른다. 그 기다림과 끝없는 시도를 통한 자기훈련은 고기를 낚는 행위자체(해답)보다 더욱 중요한 낚시제의의 의미이기 때문이다.

고기를 낚지 못할지라도 낚시라는 제의적 행위를 계속하는 동안 거대한 강의 흐름과 하나되기 때문이다. 인간의 지성이 이해할 수 있는 답이 없을 지라도 계속 인간존재와 우주에 대한 궁극적인 질문과 명상을 계속해야하는 이유는 내가 그 거대한 수수께끼(질문)와 하나되어 확대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참된 앎(knowledge)이란 버트란드 러셀(Bertrand Russell)의 용어를 빌리면 "자아(철학적 사고의 주체)와 비자아(사고의 대상)의 결합(union of Self and not-Self)"이기 때문에 사고의 대상이 광대하면 할수록, 즉 그 질문들이 철학적이고 종교적일 때 결국은 인간이 우주와 하나되는 자아의 확대(an enlargement of the Self)를 이루기 때문이다. 낚시라는 의식(ritual)을 통해 이루려는 자연과의 합일은 곧 예술과 철학이 추구하는 궁극적 가치인 자아의 확대라는 라는 "최고선(highest good)"이며 종교적으로는 인간이 상실한 신과 자연과의 조화를 이루는 전인적 인격회복이라 할 수 있다.



VII. 존재의 근원을 흐르는 강물, 사랑: "I am haunted by waters"

세상은 홍수나 파도의 의미를, 자연의 거대한 의미를 읽을 수 없다. 태초부터 우주의 근원 밑에 존재하는 신의 말씀을 들을 수도 없다. 그리고 사랑하는 가장 가까운 사람조차 이해할 능력이 없다. 그러나 이해할 수 없어도 우리가 자연을 사랑하듯이, 노먼은 이해할 수 없어도 자신이 여전히 가족을 특히 폴을 사랑하고 있음을 알게된다. 부친의 마지막 설교의 의미가 회상 속에서 새롭게 깨달아지는 것이다:

우리는 함께 살고있는 가족들, 가장 잘 이해해 주어야 하는 그들을 이해하지 못하는 채 그렇게 살고 있습니다. 그래도 여전히 우리는 그들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온전히 이해하지 못해도 우리는 온전히 사랑할 수 있습니다.
And so it is those we live with and should know, who elude us but we can still love them. We can love completely without complete understanding.


어린 노먼과 폴 형제의 모습들을 플래시백(flashback)으로 보여준 후, 영화는 이제 다시 첫 장면으로 돌아와 낚시를 시작하던 노인 노먼을 클로즈업해준다. 젊었을 때 이해하지는 못했으나 그래도 여전히 사랑했던 고인이 된 사람들을 생각하면서 그는 자신이 아직도 그들과 교감하고 있음을 고백한다. 그 교감의 행위로 그는 낚싯줄을 꿰고 그리고는 고백한다: 몰론 자신은 "이제 훌륭한 낚시꾼이 되기에는 너무 늙었다고"(now I'm too old to be much of a fisherman). 그러나 모험과 도전이 더 이상 그의 몫이 아닐지라도 이제 그는 지혜로와 져있다. 자신과 강물이 하나로 녹아드는 의미를 체험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슴푸레한 계곡에 홀로 있을 때면, 모든 존재가 내 영혼과 여러 기억들과 빅 플랙풋 강의 소리들과 네 박자 리듬과 그리고 고기가 물리길 바라는 희망 속으로 사그라지는 것을 느낀다. 결국 그 모두가 하나로 녹아들고, 그 속으로 강이 흐른다. 강은 대홍수로부터 생겨나서 태초의 시간에서부터 바위위로 흘러간다. 어떤 바위 위에는 시초도 시말도 없는 빗방울이 머물고 바위들 밑에는 말씀이 있고 말씀의 일부는 그들의 것이다. 강은 나를 사로잡고 내 속에서 흐르고 있다.
But when I am alone in the half-light of the canyon, all existence seems to fade to being with my soul and memories and the sounds of the Big Blackfoot River and a four-count rhythm and the hope that a fish will rise. Eventually, all things merge into one and a river runs through it. The river was cut by the world's great flood and runs over rocks from the basement of time. On some of the rocks are timeless raindrops. Under the rocks are the words and some of the words are theirs. I am haunted by waters.

이제 그는 대지의 근원에 흐르는 강물과 일체가 되고, 몇 억 년 전부터 존재한 바위를 읽으며, 그 속에 숨어있는 하나님의 언어를 듣는 지혜가 생긴 것이다:

맥클레인 목사: 아주 옛날 오 억 년 전에 비가 진흙에 내려 바위가 되었다. 그러나 그 보다 더 이전에 바위 밑에 주님의 말씀이 계셨지 들어봐라.
노먼: (보이스오버) 나와 동생 폴이 평생 주의 깊게 귀 기울였다면 아마 우리는 그 말 씀을 들었을 것이다.
Rev. Maclean: Long ago, rain fell on mud and became rock half a billion years ago. But even before that, beneath the rocks are the Words of God. Listen.
Norman: (voice over) And if Paul and I listened very carefully all our lives, we might hear those Words.


그리고 외로운 낚시꾼, 노먼이 듣는 태초부터 있던 그 말(Logos), 노먼의 속에서 "떠나지 않고 흐르고 있는 강"(I am haunted by waters)은 곧 모든 존재, 생명의 근원인 "사랑"이 아니었을까?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그 말씀은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하나님은 사랑이라.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느니라. (요한복음, 요한 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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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흐르는 강물처럼> - 영화 뒤의 숨은 이야기"
[flyfishing@naver.com] updated 2001/03/10
http://theroyalcast.com/bbs/bbs.cgi?db=2&mode=read&num=28&page=1&ftype=6&fval=&backdepth=1
Berardinelli, James. review Date Released: 10/23/1992
http://movie-reviews.colossus.net/movies/r/river_runs.html
Ebert, Roger. review Date of publication: 10/09/1992
http://www.suntimes.com/ebert/ebert_reviews/1992/10/782296.html
ⓒ Chicago Sun-Times Inc. 2001
Jason Q. "Quotes fr A River Runs Through It"
http://www.generationterrorists.com/quotes/river.html
Last updated 4/7/2002 EDT
Lunsford, Julia. "Biography" of Norman Maclean.
http://www.baylor.edu/~Julia_Lunsford/maclean.html
Western Writers Series No. 107.
Boise, Idaho: Boise State University Printing and Graphic Services, 1993.
Last revised: 10/17/1996 CDT
Maclean, Norman. A River Runs Through It, and Other Stories.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76
Russell, Bertrand. "The Value of Philosophy", Problems of Philosophy, Hackett Classics, 1990

Copyright ⓒ2002 BongheeLee
Copyright ⓒ2002 BongheeLee

[Abstract]  


Windows, Rooms and Peeping Toms in Cinemato-graphicum Mundi:
Hitchcock's Rear Window

by Bonghee Lee


The title of Alfred Hitchcock's film is Rear Window which is based on the short story, "It Had to be Murder". Windows are frequently used in films and arts as an image and an expression of the frustration of and the resulting desire for communication. More often than not windows represent a desire to escape from the present situation to the unknown, free world. However, Hitchcock's "window" is at the rear which is opened to the rear windows of the private lives of New York apartments, to the prison like frames of the residents. The first part of the essay surveys the various roles the 'window' plays in RW.


A window is meant for looking out of, not the reverse. In RW, Jeff's rear window is a voyeuristic instrument which is meant for looking through other windows into the rooms from outside. The view of the inside from the outside became a popular motif in the 20th century paintings among which Hitchcock's contemporary and an enthusiastic theater-goer Edward Hopper's paintings give most insight to understand RW as is pointed out by  Pallasmaa. Many of Hopper's paintings use the compositional device of an interior with a nude or half-dressed woman glimpsed through a window by an unseen viewer who looks in from outside. The impression conveyed from both Hopper and RW, however, is not one of prurient voyeurism but rather of loneliness and isolation. This sense of isolation comes partly from the inevitable distance and the psychological gulf between the eye(cinema spectators) and the object(cinema): visual activity is by nature a touch without a touch, a contact without a contact. Hitchcock both reverses the roles of and shifts the power of the surveillant and the surveilled once more when the object of Jeff's observation breaks out of the frame and attacks him. The study of the relation between the art(eye) and the object again is a popular motif in the paintings such as Velasquez's Cupido and Venus. The spectator's voyeuristic curiosity is stirred by the nude Venus sitting askance with her back, with Cupid holding up the mirror for her in front of her. However, it is instantly and unexpectedly attacked when the spectator meets Venus' eyes looking directly at him from the mirror. The fantasy about the safety of the observer is shattered as if a dinosaur virtually attacks spectators from out of the screen frame.


If each window is a screen and Jeff is a cinema spectator, then the lives in the rear window frames are the wish-fulfillment of Jeff and other voyeur, Lisa. 'Desire' is from the Latin, de-sidus(from the star), referring that it is essentially a longing for the unattainable. Another term for desire or longing is anxiety. The double nature of Jeff's desire for Lisa, i.e. craving and rejection(anxiety), can help understanding Jeff's projection of his wish-fulfillment on the screen(windows he is watching) through the dream-works of condensation and displacement: Lisa/Torso/Mrs. Thorwald. It is natural that only when Lisa 'enters' into Jeff's fantasy world, when all other enticements to get his heart fail, can she win and get the upper hand.


The second part of this essay examines the roles of the rooms in RW, and relates one of its roles, that of Peeping Tom, to other "race of Peeping Toms" in the movie including the dog that is killed because "it knew too much". Hitchcock proceeds to include the movie spectators in the race of Peeping Toms, which leads to the third and concluding part of the essay.


The third part surveys the idea of "the world is a stage and the life is a cinema and we are actors and actresses" in RW. Whether or not Hitchcock endorses the voyeurism of the race of Peeping Toms(both cinema and audience), one thing for sure is that life is "a group of little stories," a potential cinematic art. If cinema itself is represented desires of both scopophilia and exhibitionism, then life, too, is like a texture woven with the desires to be an audience and to be an actor. Both desires in essence are the expression of the need to escape from loneliness: the need to be cared for and encouraged, to be "a neighbor" to each other. This is the answer of Hitchcock to the question of "rear window ethics" which Jeff poses in the movie. After all, without a neighbor, all the great works of Hitchcock would nothing but a lonely pantomime of Miss Lonelyhearts who invites an invisible guest to her feast but to despair.


Copyright ⓒ2002 BongheeL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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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인 세상'에서의 창과 방 그리고 엿보기: 히치콕의 <이창>

Windows, Rooms and Peeping Toms in Cinemato-graphicum Mundi: Rear Window  by Hitchcock


I. 창


울뤼치(Cornell Woolrich)의 소설 『살인이 틀림없어』(It Had to be Murder)를 기초한 히치콕의 영화는 제목이 <뒷 창문 (Rear Window)>이다. 창을 인간의 의사소통, 혹은 그 단절, 그로 인한 절망이나 그리움을 나타내는 언어로 사용한 영화의 장면은 무수히 많다. 위에 인용한 파스테르나크의 시는 그의 소설을 영화화한 <닥터 지바고>에서 비극적인 두 사람의 관계를 이해하는데 도움을 준다. 흔히 <창>이라고 하면 닫힌 공간에서 열린 세계로 연결되는 통로라는 일차적 의미를 떠올리게 된다. 그러기에 창을 소재로 한 그림이나 시는 많은 경우 현재에서의 일탈과 변화, 새로운 세계에 대한 그리움과 연결되어있다. 반면 닫힌 공간이 그의 세계의 전부인 상상력이 결여되어 있거나, 의식이 죽어있는 사람들에게는 그 열린 세계가 오히려 죽음을 뜻할 수도 있다. 이런 창 안 밖에 대한 인식의 대조적 차이는 영화 <순수의 시대(The Age of Innocence)>에서 뉴랜드와 메이의 인식의 차이를 보여주는데서 아주 명확히 드러나기도 한다. 숨막힐 듯한 안일과 위선과 규범의 감옥에서 창을 열고 넓은 세계를 바라보고 싶어하는 뉴랜드에게 메이는 말한다. "창문 좀 닫으세요. 그러다가 죽을 병(독감)에 걸리겠어요."그리고 뉴랜드는 문득 자기가 이미 죽음이라는 병에 걸려있는 것을 알게 된다:



"죽음에 걸린다고!" 그는 아내의 말을 되 뇌이다가 이렇게 말하고 싶어지는 것이었다: "하지만 난 이미 그 병에 걸렸는걸. 나는 죽은 몸이지--난 몇 달째 몇 달째 죽은 채로 살고 있어.

"Catch my death!" he echoed; and he felt like adding: "But I've caught it already. I AM dead--I've been dead for months and months."



반면 히치콕의 창은 열린 세계로 향한 창이 아니라 집 뒤에 낸 창문이다. 남에게 들키고 싶지 않은 사적이고 은밀한 욕망이나 삶, 심리적 내면의 세계, 또는 자성의 세계로 들어가는 문이라는 의미이다. 이 영화의 주된 시점인 사진기사 제프(L. B. Jesfferies: James Stewart)의 뒤 창문을 통해 보여지는 것은 마당을 둘러싼 뉴욕 그리니치 빌리지에 있는 아파트들의 뒷모습이며 숨막힐 듯한 닫힌 공간이다. 더구나 화면에는 그 각각의 아파트에서 밖으로 나가는 빌딩의 입구는 보여지지 않는다. 아파트 사이의 좁은 골목만이 유일한 통로이며 이곳을 통해 거리의 한 부분과 건너편 레스토랑을 보여줄 뿐이다. 제프의 창문을 통해 보여지는 아파트들 뒤의 창문들은 그 속에 사는 사람들의 사적 공간을 자신도 모르는 관찰자에게 노출시키는 역할을 한다.


감옥 중에 가장 가혹한 곳은 창이 없는 닫힌 공간일 것이다. 그러나 히치콕은 아이러닉하게도 마당을 중간에 두고 제프의 창에서 바라다 보이는 아주 넓게 열려있는 창이 난 7개의 아파트 방들을 푸코(Foucault)가 말하는 원형감옥의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 푸코는 『기율과 형벌』(Discipline and Punish: The Birth of the Prison)에서 "우리 사회는 관찰의 사회가 아니라 감시의 사회다... 우리가 사는 곳은 '원형극장'도 '무대 위'도 아니라 모든 것이 한 눈에 보이는 파노라마 기계 속에 살고 있다"고 말한다.(200) 푸코는 인간이 어떻게 제도적 통제와 과학적 탐구 그리고 행동실험의 대상으로 전락해 가는가를 설명하기 위한 이론적 수단으로 벤담(Jeremy Bentham)의 원형감옥(망원렌즈로 죄수들이 모르게 모든 감옥 안을 감시하고 있는)을 이용하고 있다. 커다란 창문이 달린 감옥 아닌 감옥을 세트로 사용한 이 영화에서 히치콕은 감시와 감찰이라는 엿보기 행위의 이중성을 제프의 행위를 통해 탐구한다. 제프는 석고붕대를 하고 아파트에서 꼼짝없이 갇혀 지내다가 단순한 호기심에서 뒷 창문을 통해 건너편 아파트의 사람들의 창 너머 삶을 관찰하기 시작한다. 그러다가 차차 살인사건의 단서를 찾고 해결하기 위해 토월드(Lars Thorwald: Raymond Burr)를 감시하는 감시자로 변하게 된다. 이처럼 원래는 건물이나 집안에서 밖을 보기 위한 장치인 창은 히치콕에 의해서 밖에서 안을 들여다보고 관찰 또는 감시하는 장치로 그 의미가 전복된다. 그리고 이때 그 관찰되고 있는 대상은 자신의 행동 하나 하나가 밖에서부터 유심히 관찰/감시되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창 밖을 내다보고 있는 인물은 르네상스시대 이래 친숙한 그림의 소재(관찰의 대상/모델)가 되어왔으며 관찰자(미술가)는 항상 그 대상인 모델과 같은 공간 안에 (그 모델의 동의하에) 존재한다. 반면 밖에서 창을 통해 방안을 들여다보는 것은 우리 시대의 유행이다. 히치콕과 동시대 미국의 화가 에드워드 호퍼(Edward Hopper)의 그림에 나타난 뉴욕풍경은 창 밖에서 들여다본 창안의 모습들이 대부분이다. 1920-30년대 호퍼는 영화광이었다고 한다. 「야창(Night Windows)」(1928)을 비롯한 일련의 그림들에서 우리는 영화화면이나 극장의 이미지를 발견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야창(Night Windows)」의 전경에 있는 외부로 난 유리창턱은 무대의 가장자리를 연상시키며 그 위로 마치 조명등 아래의 무대 장면처럼 방안의 광경이 보인다.(이하 생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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