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동하 -친구야 너는 아니

https://youtu.be/Lr-243EKUf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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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이 필 때
꽃이 질 때
사실은
참 아픈거래

나무가 꽃을 피우고
열매를 달아 줄 때도
사실은
참 아픈거래

사람들끼리
사랑을 하고
이별을 하는 것도
참 아픈거래

우리 눈에
다 보이진 않지만
우리 귀에
다 들리진 않지만

이 세상엔 아픈 것들이 참 많다고
아름답기 위해서는 눈물이 필요하다고
엄마가 혼잣말처럼 하시던 이야기가
자꾸 생각나는 날

친구야
봄비처럼 고요하게
아파도 웃으면서
너에게 가고 싶은 내 마음
너는 아니?
향기 속에 숨긴 나의 눈물이
한 송이 꽃이 되는 것
너는 아니?

              -이해인 시 

 

 

어둠에 가려 나는 더 이상 나뭇가지를 흔들지 못한다. 단 하나의 영혼을 준비하고 발소리를 죽이며 나는 그대 창문으로 다가간다. 가축들의 순한 눈빛이 만들어내는 희미한 길 위에는 가지를 막 떠나는 긴장한 이파리들이 공중 빈곳을 찾고 있다. 외롭다. 그대, 내 낮은 기침 소리가 그대 단편의 잠속에서 끼여들 때면 창틀에 조그만 램프를 켜다오. 내 그리움의 거리는 너무 멀고 침묵은 언제나 이리저리 나를 끌고 다닌다. 그대는 아주 늦게 창문을 열어야한다. 불빛은 너무 약해 벌판을 잡을 수 없고, 갸우뚱 고개 젓는 그대 한숨 속으로 언제든 나는 들어가고 싶었다. 아아, 그대는 곧 입김을 불어 한 잎의 불을 끄리라. 나는 소리 없이 가장 작은 나뭇가지를 꺾는다. 그 나뭇가지 뒤에 몸을 숨기고 나는 내가 끝끝내 갈 수 없는 생의 벽지를 조용히 바라본다. 그대, 저 고단한 등피를 다 닦아내는 박명의 시간, 흐려지는 어둠 속에서 몇 개의 움직임이 그치고 지친 바람이 짧은 휴식을 끝마칠 때까지
 
[ 바람은 그대 쪽으로 -기형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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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7일 오늘은 기형도가 돌연 우리 곁을 떠난 날입니다(1989).  참 아까운 사람...

기형도시인이 내 나이만큼 되었다면 그는 어떤 시를 썼을까...
문득 문득 이 사람의 시를 읽을 때면 혼자 물어봅니다.
나이가 들면  저 끝모를 절망과 아픔은 어떤 언어로 변할까...

참, 아까운 사람.

(c)Rene Magritte



2월의 황혼- 사라 티즈데일

새로 눈 쌓여 매끄러운
산 옆에 서 있었습니다.
차가운 저녁 빛 속에서
별 하나가 내다봅니다.
내가 볼 수 있는 것을

보는 이는 나 밖에 아무도 없었지요.
나는 거기 서서 별이 나를 보는 한
내내 그 별을 바라보았습니다.

(bhlee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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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볼 수 있던 그 별을 보는 이는 아무도 없었지요....

지금은 나도 볼 수 없는 그 별은 어디로 간 것일까요?

 

 


 

 

(c)photo by bhlee @Denver


어스름. 더스크. 땅거미... 그리고 꿈결

하늘은 항상 땅보다 천천히 어두워진다. 땅 위에 어둠이 덮인 후에도 아직은 바라볼 무엇이 하늘에는 있다.
흐린 날도, 비오는 날도 나는 밤이면 늘 하늘을 본다.

이런 시간이면 떠오르는 노래...
김광석의 거리에서...........

012917

 

https://youtu.be/TEKkvPQlO9M

 

photo by bhlee

@Santa Fe

겨울나무- 김혜순

나무잎들 떨어진 자리마다
바람 이파리들 매달렸다

사랑해 사랑해
나무를 나무에 가두는
등 굽은 길밖에 없는
나무들이
떨어진 이파리들이 아직도
매달려 있는 줄 알고
몸을 흔들어보았다

나는 정말로 슬펐다. 내 몸이 다 흩어져버릴 것만 같았다.
나는 이 흩어져버리는 몸을 감당 못 해 몸을 묶고 싶었다.
그래서, 내 몸 속의 갈비뼈들이 날마다 둥글게 둥글게
제자리를 맴돌았다. 어쨌든 나는 너를 사랑해 너는 내 몸
전체에 박혔어. 그리고 이건 너와 상관없는 일일 거야, 아마.

나는 편지를 썼다
바람도 안 부는데
굽은 길들이 툭툭
몸 안에서
몸 밖으로
부러져나갔다

---

나는 편지를 썼다. 바람도 안 부는데. 떨어진 이파리 아직도 매달려 있는 줄 알고 몸을 흔들어 본다.


영어학과와 테스피스가 함께하는 특별 세미나- 2003. 6. 3~4

영어연극으로 배우는 영어와 문화

"Sorry, Wrong Number",
"Red Carnations"

이봉희교수


문화와 언어와 의사소통에 대한 몇 가지 단상들...


- I -

"Dying," Morrie suddenly said, "is only one thing to be sad over. Living unhappily is something else. So many of the people who come to visit me are unhappy."

Why?

"Well, for one thing, the culture we have does not make people feel good about themselves. We're teaching the wrong things. And you have to be strong enough to say if the culture doesn't work, don't buy it. Create your own. Most people can't do it. They're more unhappy than me--even in my current condition.
( from Tuesdays with Morrie)

갑자기 모리 선생님이 말문을 열었다.
"죽어 가는 것은 그저 슬퍼할 거리 중 하나일 뿐이네. 불행하게 살아가는 건 또 다른 문제지. 나를 찾아오는 사람들 중에는 불행한 이가 아주 많아."

"왜 그럴까요?"

"글세, 무엇보다 우리의 문화는 사람들이 스스로 만족을 느끼지 못하게 하고 있어. 우린 거짓된 진리를 가르치고 있지. 그러니 제대로 된 문화라는 생각이 들지 않으면 굳이 따르려 하지 말게. 그것보다는 자신만의 문화를 창조하게. 그러나 대부분 사람들은 그렇게 하지 못하지. 그래서 사람들은 나보다 훨씬 불행해. 이렇게 죽어가고 있는 나보다 말이야...
.....나는 죽어가고 있지만, 날 사랑하고 염려해주는 사람들에 둘려 싸여 있쟎나.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둘려 싸여 산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모리와 함께한 화요일]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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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I-


-나는 세상의 지붕 너머로 나의 야만적인 고함을 지른다-

The spotted hawk swoops by and accuses me, he complains of my gab and my loitering.

I too am not a bit tamed, I too am untranslatable,
I sound my barbaric yaws over the roofs of the world.

(from Song of Myself (52) - Walt Whitman)


점박이 매가 덮칠 듯 날쌔게 지나가며 나를 비난한다, 나의 쓸데없는 지껄임과 빈둥거림을 불평하는 거다.

나 또한 전혀 길들여지지 않았다, 나 또한 언어로 표현될 수 없는 존재.
나는 세상의 지붕 위로 나의 야만적인 고함을 지른다.

([나의 노래] 중에서 - 휘트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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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Dead Poet's Society(죽은 시인의 사회)에서 키팅선생님은 늘 자신은 가치 없는 존재라고 스스로 도망 다니고 있는, 숨어 있는, 토드를 발견합니다. 그리고 그의 가슴속에 잠자고 있던 놀라운 시를, 외침을 해방시키지요. 위의 휘트만의 시를 들려주면서....

외치라고... 소리쳐 보라고.... 토해내라고... 네 속의 그 응어리를. 삼키고 삼키고 삼켰던 너만의 진실들을 당당히 주장하라고.... 침묵의 우물 속에 깊이 빠뜨렸던 소리들을 해방시키라고....

의미가 없어도 의미가 되는 핏덩이 같은 야성의 고함소리를 질러보고 싶지 않나요? 그러면 내 몸을 괴롭히는 구석구석의 통증이 피와 함께 토해져 나올까요?

인간이란 어차피 번역될 수 없는 존재, 언어로 표현될 수 없는 존재, 언어의 감옥에 가둘 수 없는 길들여지지 않은 야성의 매라고 시인은 말하고 있는 것일까요?

여기에서 길들여지지 않았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맘대로 본성대로 감정대로 이기심대로 산다는 의미는 아니겠지요. 세상의 법칙에 길들여짐을 거부하는 자유, 언어의 감옥에 묶여있기를 거부하는 야성, 평생을 써도 다 못 쓸 자서전을 한 줄로 묶어 나를 정의 내리고자 하는 세상을 거부한다는 의미인지도 모릅니다.

어찌 보면 바보가 지껄이는 "소리와 분노(sound and fury-Macbeth)"가 정확한 언어일 수 있다는 생각을 합니다. 정직하기 때문입니다. 바보는 감추려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바보는 온 힘을 다해 자신을 드러내려고 하고 있기 때문에 그 외침이 더 정확한 언어입니다.

인간들의 언어는 항상 의도되어 있고 항상 감추며 드러냅니다. 사회생활 속에서 언어는 세련된 옷을 입고 세상에 나와 악수를 청합니다. 무대에 섭니다. 바보의 울분의 외침을 듣고 행복하다는 뜻일까 곰곰이 해석을 내릴 필요는 없겠지요. 아이의 옹알거림은 못 알아듣는 엄마는 아무도 없지요... 그것도 언어니까요. 하지만 우리들의 언어는 항상 해석을 요구합니다. 거기에 안전함과 위험함이, 그리고 절대 고독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휘트만도 길들여지지 않는 외침하나로도 충분한 자기 표현, 충분한 시라고 말하고 있는 것일까요?

-III-

물질문명, 고도로 성장한 기계문명이 낳는 인간사이의 단절을 단적으로 예견하는 신화가 있습니다. 바로 황금의 손 마이다스(Midas) 이야기입니다. 경제계에서는 '마이다스의 손'은 황금알을 낳는 성공자를 일컫는 말이지만 다른 측면에서 보면 그 만큼 오늘날 인간과 인간사이의 접촉 불가능성을 비극적으로 보여주는 신화의 인물도 없을 것입니다. 손으로 만지는 것마다 금으로 변하는 바람에 사랑하는 딸조차 금으로 변하고 마는. 가장 사랑하는 사람과의 관계, 접촉마저 불가능한 저주로 변한 물질과 성공의 축복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고도로 발달된 기계문화 속에서 인류역사상 어느 때 보다도 그 문명의 혜택을 누리고 삽니다. 이제는 내 책상에서 세계로 가는 창인 컴퓨터로도 모자라 손에 들고 다니는 작은 기계 속에 세상이 들어와 있고 타인과의 의사소통의 통로가 열려있습니다. 내 손안에 들어온 세계...

그러나 잠깐 멈춰 서서 생각해보면 내 손안에 세계가 들어온 것이 아니라 하이테크시대의 거대한 기계문명의 손바닥 속에 가상공간이 만들어 내는 환상의 손바닥 속에 우리가 갇혀있는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살고있는 사회는 바로 시뮬라크르들이 실재를 대체한 곳입니다. 실재보다는 미디어를 비롯한 온갖 기호들이 춤을 추며 실재를 소멸시키고 있습니다. 가상실재의 천국이 된 현대사회는 그 자체로 미혹 속이라 할 수 있습니다. 거기에는 권력화 된 시스템의 횡포와 전략적인 무관심과 냉소 그리고 수치심없는 이기심으로 무장된 대중이 덩어리를 이루어 존재합니다. 근대 이성만능주의가 주입한 주체의 행복이나 희망, 미래 등은 어찌 보면 인간다움을 마비시키는 시스템의 허구적 권력을 공고히 하기 위한 마취제에 불과한 것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잠을 자며 깨어살고 있습니다.

인간들은 갈수록 소외되고 의사소통은 무의미한 언어들로 단절되고 있습니다. 난무하는 말장난들, 기호들, 부호들. 은어들, 거짓말들...이미 400년 전 햄릿이 고통받던 언어의 폭력이 우리의 귀를 오염시켜버렸습니다.

하이데거의 말대로 진정 존재를 지키는 파수꾼인 시인들은 없는 것일까요? 의사소통의 가장 중요한 수단인 언어는 너무나 허망한 그리고 때로는 위험한 암호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 말을 하는 사람의 진심을 알 수 없다면. 추측은 고통이고 추측하도록 버려 두는 것은 무례한 행동을 상대에게 부추기는 잔인한 행동일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햄릿처럼 때로 말이 무섭습니다. 제 맘대로 오해를 불러오는 괴물 같기도 합니다. 아니면 사람들이 제 생각의 숨결을 불어넣어 단지 암호이며 부호(sign. cipher)인 어쩌면 수수께끼인 언어를 원하는 대로 자의적으로 살려내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프랑켄슈타인을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결국 의미라는 것은 때로는 인간에게서, 인식 주체에게서 만들어지는 괴물이 될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프랑켄슈타인과 같은 "자의적인 해석에 따른 의미"를 살아있는 사람보다 더 중요시해서 자신이 만든 괴물이 살아있는 생명을 잡아먹게 하고 있습니다.

모두가 인간대 인간의 진실 된 의사소통의 수단인 언어가 하이테크시대의 기기들을 매개로, 그리고 그 문화와 문명이 부추기는 가짜 욕망을 매개로 왜곡되고 소외되었기 때문입니다. 인간들을 소외시키기 때문입니다.

이번에 영미문화 영어학과와 영어연극부 <테스피스>가 공동으로 개최하는 특별 학술행사인 "하이테크시대의 인간소외"에서는 두 편의 연극을 통해 위와 같은 21세기의 인간소외, 기계적 수단에 의존하는 익명 속의 폭력과 그에 희생되는 한 비극적 인간상을 그리는 "Sorry, Wrong Number" 와 그러한 수단이 빚어내는 소외를 희극적 측면에서 가볍게 다루면서 꼬집어 주고있는 "Red Carnations"를 공연합니다.

항상 솔선수범 애를 쓰는 연출 충길이와, 희생하는 정신과 섬기는 맘으로 모든 후배들의 모본이 되어주는 조연출 선미, 그리고 이번에도 또 남장을 하고 출연해주는 고마운 병선이에게 사랑을 보냅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뒤에서 수고하는 기획, 의상, 조명, 음악, 무대미술을 담당하는 우리 소중한 학생들은 이름 없이 빛나는 별들이며 테스피스의 자랑입니다. 품에 넣어도 좋을 만큼 사랑하는 나의 제자들입니다. 특히 귀여운 새내기들의 헌신과 협조에 감사하며 이 공연을 위해 도움주신 Prof. Gail Patch, Prof. Linda Bondy, Hannah, 그리고 Prof. Bryan Lint에게 감사를 드립니다. 또한 개별 발음지도를 해주신 Mrs. Williams에게도 감사를 드립니다.

밤이 가장 아름다운 계절, 우리도 별처럼 어둠을 빛내는 잊지 못할 또 하나의 귀한 추억을 새기게 협조해주신 모든 분들께 고개 숙여 감사를 드립니다.


KNU 영어연극회 <테스피스> 지도교수 이봉희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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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Lottery

 

테스피스(Thespis)제 3회 정기공연 (2001. 5. 28-29)

The Lottery: adapted by B. Duffield from a Story by Shirley Jackson


지도교수의 글


영어학과 이봉희 교수


해마다 부활하는
사랑의 진한 빛깔 진달래여
네 가느단 꽃술이 바람에 떠는 날
상처 입은 나비의 눈매를 본적이 있니
견딜 길 없는 그리움의 끝을 너는 보았니
............

봄마다 앓아 눕는
우리들의 持病(지병)은 사랑

(이해인: 진달래 중에서)


봄마다 앓는 병이 있습니다. 겨우내 잊고 있던 그리움이 다시 피어나는 병입니다. 엘리엇(T. S. Eliot)의 말대로 추억과 갈망을 뒤섞어놓는(mixing memory and desire) 봄의 생명의 움직임 때문입니다. 영어로 갈망(desire)라는 말은 라틴어로 de-sidus, '별에서 부터'라는 뜻입니다. 별에서부터 떨어져 별을 그린다는 의미인가 봅니다. 그러나 한편 생각하면 별처럼 손에 넣을 수 없는 것을 소망한다는 그 절망이 결국 갈망의 본질이라는 것을 말해주는 게 아닐까요. 그렇다면 욕구의 충족이나 하나의 완성은 결국 만족이 아니라 또 다른 욕구로의 전이이며 또 다른 완성으로의 그리움을 낳는다는 말인가 봅니다. 우리의 갈망은 탄탈로스의 그것처럼 채워질 수 없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탄탈로스의 절망적인 갈증은 어쩌면 그가 살아있다는 증거이며 그를 살아있게 만드는 힘인지도 모릅니다.

밤이 가장 아름다운 5월이 되면 해마다 영어연극회 [테스피스]는 병을 앓습니다. 때로는 나비처럼 상처도 입습니다만 별을 그리워하는 마음으로 우리의 살아있음을 확인합니다. 추억(과거)이 후회나 상처가 아니라 전진의 징검다리가 되며 갈망(미래)이 염려가 아니라 전진의 목표가 되는 그런 그리움의 의미를 알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엘리엇의 말대로 과거(memory)에 대한 회한이나 미래(desire)에 대한 염려로부터 자유로운 오늘(here and now <hic et nunc>)에 충실하고 싶었습니다. 왜, 무엇 때문에, 라고 묻는다면 단지 그리움의 병을 앓는다고 밖에는 말할 수 없습니다. 그리움을 아는 분들은 우리의 이런 열정을 사랑해주실 것을 믿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최선 다하고 결과를 겸허하게 관객여러분의 손에 맡깁니다. 우리의 이런 지병 때문에 웃음이, 때로는 절망이, 그리고 그 뒤에 남겨지는 귀중한 의미와 메시지가 여러분에게 전염된다면 우리의 병은 우리를 살아 있게 하고 성숙하게 하는 사랑의 병이라고 확신합니다.

올해도 변함없이 기쁨으로 성원해주신 교수님들과 직원 선생님들, 교목실에 깊이 머리 숙여 감사함을 전합니다. 동아리 방을 준비해주신 학교에도 감사를 드립니다. 발음지도를 위해 녹음의 수고를 아끼지 않은 Jolie, Bob and Jeniffer, Karen에게 감사를 드립니다. 그리고 만나 뵌 적은 없지만 이 연극에 정말 큰 도움을 주신 영어학과 김은정의 아버님(현진 프로세스)께 정말 뜨거운 감사를 드리고 싶습니다.

희생적이고 적극적인 리더쉽을 발휘해준 연출자 현주와 바람처럼 소리도 없이 종횡무진 움직이며 도와준 조연출 현수에게 존경 어린 애정을 보냅니다. 영어학회장으로 분주한 가운데서도 치밀하게 기획을 맡아 헌신적으로 수고한 인복이의 열정이 아름답습니다. 이 모양 저 모양 어려운 현실적 여건 속에서 그래도 가능한 최선의 것을 만들어 내기 위해 발로 뛰며 애쓴 무대미술팀, 의상, 소품, 분장, 조명, 음악담당자들, 홍보팀, 또한 포스터제작을 해 준 진희...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름 없이 빛도 없이 몸으로, 마음으로, 기도로 봉사한 우리 일학년 후배들에게 일일이 이름을 불러주지 못해도 뜨거운 박수와 칭찬을 보냅니다. 여러분 한사람 한사람 모두가 자랑스럽습니다.

마지막으로 이 모든 일을 가능하도록 올해도 변함없이 우리 앞에서 불기둥 구름기둥이 되어 인도해주신 귀하신 한 분을 기억합니다. 우리의 영원한 지도자이시며 연출자이시며 또한 우리의 영원한 관객이신, 그리고 어떤 의미로는 이번 연극의 주연이신 사랑하는 주님께 이 작은 노력의 결실을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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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해설

이봉희교수


"The Lottery(추첨)"는 미국의 소설가 Shirley Jackson의 단편을 각색한 것이다. 녹음이 우거진 화창한 초여름 매년 6월 27일이면 마을사람들이 모여 추첨행사를 치른다. 화기애애하고 평온한 분위기 속에서 사람들은 어린아이부터 노인까지, 남녀노소 모두가 추첨을 위해 광장으로 하나 둘 모여든다. 그들은 집안의 자질구레한 이야기, 농사이야기를 나누며 써머즈(여름)씨의 주도아래 추첨절차를 밟는다. 그들의 대화에서 밝혀지는 사실은 이 추첨 행사가 이 마을 뿐 아니라 모든 마을에서 실시되고 있다는 점이며 사람들이 마을을 이루며 모여 살기 시작하면서부터 있어왔던 전통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마을의 최고령자인 워너에 의하면 그 옛날엔 종이 쪽지 대신 나무 조각으로 추첨을 했으며 그 당시 사용하던 검은 상자는 다 낡아 부셔져서 그 나무를 이용해 다시 추첨상자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젠 옛날의 엄숙하던 의식은 다 사라져버렸다고 노인은 못마땅하게 생각한다.

참석자 명단을 체크하고 추첨에 들어가려 할 때 테시가 앞치마에 급히 손을 닦으며 헐레벌떡 나타난다. 그녀는 오늘이 무슨 날인지 까맣게 잊고 있었다며 추첨행사를 놓치지 않아 천만다행이라 말한다. 이웃인 들라크르와 부인은 그녀를 온화한 미소로 맞아준다.

서머즈(Summers/여름)씨뿐 아니라 이 마을에는 그레이브즈(Graves/무덤)와 아담즈(Adams/사람)이라는 이름의 가족도 있다. 마침내 한 가족이 먼저 당첨이 된다. 바로 뒤늦게 허겁지겁 달려온 테시 허친슨네 가족이다. 그런데 돌연 테시는 공정한 추첨이 아니었다면서("It wasn't fair") 항의하기 시작한다. 테시의 항의에도 불구하고 이번엔 테시네 가족 중에서 한 사람을 뽑는 추첨이 다시 이루어지고 어린 아들들과 딸도 참여한다.

이번엔 누가 당첨되었을까? 모두들 숨을 죽이는 가운데 한사람씩 자신의 종이를 펼쳐 보인다. 꼬마 데이브는 그레이브즈가 대신 펼쳐주어야 했고, 낸시도 빌 주니어도 각자 자신의 쪽지에 마크가 없자 환하게 웃으면서 기뻐한다. 남은 부부 중 누구일까? 남편 허친슨도 빈 쪽지다. 그러자 모두들 "테시야, 테시가 뽑혔어.."라고 외치고....

그리고, 조금 전 가장 친근하게 웃어주던 들라크르와 부인은 무거워서 들기조차 힘든 큰 돌덩어리를 집어드는데...


이 소설을 각색한 더필드는 셜리 잭슨의 가장 중요한 쟁점을 흐리고 너무 전통에만 치중한 점이 조금 아쉽다. 더필드는 원작에는 없는 서머즈의 누이 벨바를 등장시켜 인습을 공격한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단순한 악습에 대한 상징적인 비판도 아니고 특정 지방에서 특정시기에 행해진 희생양 만들기에 대한 우화도 아니다. 셜리 잭슨은 극의 행동과 대사에 지극히 사실적인 분위기를 주고 있다. 작가는 우리에게 묻고 있는지 모른다. 우리를 경악시키는 인습이 사라지지 않고 내려오고 있다면 그 인습은 누가 만든 것인가. 아니 더 나아가 그 인습이 존속하는 배후에는 무엇이 있는가 라고.

셜리 잭슨은 "돌던지기"나 "희생양 만들기"의 인습을 가능케 하는 인간의 본질 속에 감추어진 악을 지적하고자 하는 것이다. 풍성한 수확(여름), 집단의 이익, 다수의 행복을 위한 희생은 정당화 될 수 있다라는 사회적인 환상너머에 도사린 인간의 실존적인 추함을 고발하고 싶은 것이다. 그러기에 이 소설에 나오는 사람들은 허친슨, 들라크르와 들처럼 국적이 다양하게 섞여있다. 또한 이 전통은 인간이 이웃과 모여 살기 시작한 이래 생겼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작가는 전통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도 워너 노인을 통해 그 전통이 많이 퇴색되었음을 아쉬워하게 한다. 그리고 이렇게 설명한다: 아무리 옛날 추첨행사의 전통적인 의식들이 잊혀지고 사라져 갔어도 "사람들은 아직도 돌을 던지는 법은 그대로 기억하고 있다(Although they villagers had forgotten the ritual and lost the original black box, they still remember to use stones)"라고. 바로 이점이 인습이 이어지는 이유인 것이다. 이 설명과 함께 작가는 어린 아들 데이브를 포함한 남, 녀, 노, 소, 모든 이들이 돌을 손에 집어들게 만들고 있다.

어느 날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간음한 여인을 잡아 예수께 데리고 와서는 물었다. 율법은 이 여인을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예수님은 어찌하겠는가 라고. 이때 주님은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고 말씀하셨다. 이 순간 사람들은 돌연 남을 향해 있던 시선을 자신에게로 돌리게 되고 슬그머니 물러가기 시작했다. 이 행사를 놓칠 뻔했다고 놀라 뛰어와서는 그 돌이 내게로 향할 때는 정당치 못하다고 소리지르고 있는 이 극의 테시처럼 타인에게 던지려면 돌은 기실은 자신에게 향한 것임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러자 그 자리에 남아있던 유일한 분, 유일하게 그 여인에게 돌을 던질 자격과 권한이 있는 예수님은 여인에게 말씀하신다. "나도 너를 정죄치 아니 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그리고 그 분은 이 모든 인간본질의 악을 해결하시기 위해 기꺼이 스스로 자신을 추첨하셨다. "It was unfair"라는 한마디 항거도 없이.

우리 주변에서 행해지는 유형 무형의 희생제의를 끝내기 위해 오늘날 재판문학(trial literature)이 던지는 도전은 무엇일까? 르네 지라르(R. Girard)의 말대로 이제 더 이상 누가 유죄이고 누가 무죄인가 라는 질문과 재판을 잠시 그치고 왜 우리는 끊임없이 누군가를 정죄하고 정죄받는가 라고 반문해야 된다는 메시지가 아닐까? (2001년 5월)

네 속을 열면 몇번이나 얼었다 녹으면서 바람이 불 때마다 또 다른 몸짓으로 자리를 바꾸던 은실들이 엉켜 울고 있어. 땅에는 얼음 속에서 썩은 가지들이 실눈을 뜨고 엎드려 있었어. 아무에게도 줄 수 없는 빛을 한 점씩 하늘 낮게 박으면서 너는 무슨 색깔로 또 다른 사랑을 꿈꾸었을까.  아무도 너의 영혼에 옷을 입히지 않던 사납고 고요한 밤, 얼어붙은 대지에는 무엇이 남아 너의 춤을 자꾸만 허공으로 띄우고 있었을까.  하늘에는 온통 네가 지난 자리마다 바람이 불고 있다. 아아, 사시나무 그림자 가득 찬 세상, 그 끝에 첫발을 디디고 죽음도 다가서지 못하는 온도로 또 다른 하늘을 너는 돌고 있어.  네 속을 열면.

[밤 눈 - 기형도]

판화: (c)이철수

 

산경- 도종환

하루 종일 아무 말도 안 했다
산도 똑같이 아무 말을 안 했다
말없이 산 옆에 있는 게 싫지 않았다
산도 내가 있는 걸 싫어하지 않았다
하늘은 하루 종일 티 없이 맑았다
가끔 구름이 떠오고 새 날아왔지만
잠시 머물다 곧 지나가버렸다
내게 온 꽃잎과 바람도 잠시 머물다 갔다
골짜기 물에 호미를 씻는 동안
손에 묻은 흙은 저절로 씻겨내려갔다
앞산 뒷산에 큰 도움은 못 되었지만
하늘 아래 허물없이 하루가 갔다

https://www.journaltherapy.org/3732

 

"어디에서 문학치료(poetry/biblio-therapy) 와 저널치료(journaltherapy)/글쓰기치료를

 제대로 배울 수 있나요?"

 

"문학치료 대학원 어디가 좋은가요?"

 

늘 듣는 질문입니다.

 

자신있게 나사렛대학교 대학원 문학치료 학과를 권합니다.

알차고 실속있는 커리큘럼만 보셔도 알게 되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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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사렛대학교 재활복지대학원 문학치료학과 석사과정

 

당신 자신과 미래를 위한 가장 현명한 선택입니다!

 

 

나사렛대학교 문학치료학과는  미국IFBPT국제문학치료협회와 협약서에 의해 교과과정 및 프로그램이 운영되는 국내 유일의 <협동과정이 아닌> 독립된 문학치료전공 입니다.

 

또한 국내에서 유일하게 미국 공인 문학치료사 자격증과 저널치료사 자격증을 가진 교수<수퍼바이저 캐슬린 애덤스>에 의해 정통 문학치료와 저널치료를 공부할 수 있는 유일한 대학원입니다. 

 

최고의 전문가를 배양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나사렛대학교 대학원 문학치료학과는

문학치료와 저널치료에 대한 명확한 이론과 기초가 되는 심리학/상담학 이론들, 그리고 그에 근거한 실습과 수퍼비전을 통해 살아있는 문학치료와 저널치료의 이론과 실습를 공부하실 수 있습니다. 또한 실습을 통해 자신의 문제가 치유되는 체험도 하시게 됩니다.

 

 

지원자격: 정규대학교 학사학위 이상 취득자(2017년 2월 학위취득예정자) 및

                법령에 의해 동등한 학력이 인정되는자

전형방법: 서류심사(50%) 및 면접고사(50%)

제출서류: 입학원서

                자기소개서(문학치료학과는 학업계획서를 자기소개서로 대치함).         

                학위증명서, 학사(및 최종학위)과정 성적증명서,

                학사(이상)졸업(예정)증명서

장학금혜택: 성적우수자, 

                재활/복지관련 기관 근무자,

                현직교원 및 일반교육기관 종사자 (관련자는 재직증명서 필요)

                기독교교역자(목사, 전도사 등)

기타혜택: 미국 Center for Journal Thearpy, Inc.의 프로그램에 지도교수와 함께 연수

               미국 뉴욕에서 열리는  Expressive Therapies Summit에 지도교수 인솔하에 참여

               NAPT(전미문학치료학회)준회원 가입 및 학회 참여

                  
입시일정:

   원서교부 및 접수 : 2016. 11. 14-2016. 12. 12 (평일 09:00-17:30) 대학원 교학팀 및 홈페이지

   원서접수: 2016. 11. 14-2016. 12. 12. 마감:  평일 09:00-17:30  본대학원 교학팀(우편접수가능)

   면접고사: 2016. 12. 17(토)  시간 및 장소 개별공지

   합격자 발표: 2016. 12. 22(목) 본 대학원 홈페이지

 

문의: 대학원 교학처 041-570-7940

 http://grad.kornu.ac.kr/

 

 

 

http://journaltherapy.org/3087

 

http://journaltherapy.org/277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