멀리서 빈다 - 나태주    

                                      

어딘가 내가 모르는 곳에                                      

보이지 않는 꽃처럼 웃고 있는                                       

너 한 사람으로 하여 세상은                                      

다시 한 번 눈부신 아침이 되고

                                       

어딘가 네가 모르는 곳에                                      

보이지 않는 풀잎처럼 숨 쉬고 있는                                      

나 한 사람으로 하여 세상은                                      

다시 한 번 고요한 저녁이 온다

                                       

가을이다, 부디 아프지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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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리서 빈다... 
가을에 주로 읽던 시인데 

오늘은 귀국에 딱 맞춰 의뢰가 들어온

이혼의 상처를 치유하기 위한 특강/워크숍을 위해 

내가 찍었던 사진이 하나 떠올라서 이 시를 같이 읽어보기로 했다. 

(문학치료자료로 사용하지는 않았다.)

                                       

멀리서 멀리로 떠나는 배를 향해 손을 흔드는...  그저 바라보는 나뭇잎 다 떨군 나무의 심정이,

이리저리 가시처럼 찢긴 그 매마른 손짓이 가슴에 남아있었던 사진이었기 때문일까?  

 

보내는 나무의 모습처럼

 망망대해를 향해 떠나는 배도 그리 행복한 유람선 같지는 않아서... 

 

가을이다.. 를 6월이다/ 초여름이다/ 그 어느 때면 어떠랴... 

우리는 언제나 아픈데... 

아프지 말라고 말해주고 싶은데... 

나에게

그에게

 

길 포말로 남은 저 떠나는 배의 마음은 무엇일까?

미련일까 아쉬움일까 회한일까 미움일까 미안함일까 두려움일까.....  그 모두일까....... 

모래- 이형기

 

모래는 작지만 모두가 고집 센 한 알이다.

그러나 한 알만의 모래는 없다.

한 알 한 알이 무수하게 모여서 모래다.

 

오죽이나 외로워 그랬을까 하고 보면

웬걸 모여서는 서로가

모른 체 등을 돌리고 있는 모래

모래를 서로 손잡게 하려고

신이 모래밭에 하루 종일 봄비를 뿌린다.

 

하지만 뿌리면 뿌리는 그대로

모래 밑으로 모조리 새 나가 버리는 봄비

자비로운 신은 또 민들레 꽃씨를

모래밭에 한 옴큼 날려 보낸다.

싹트는 법이 없다.

 

더 이상은 손을 쓸 도리가 없군

구제 불능이야

신은 드디어 포기를 결정한다.

신의 눈 밖에 난 영원한 갈증!

 

 담쟁이덩굴 -공재동

  비좁은 담벼락을
  촘촘히 메우고도
  줄기끼리 겹치는 법이 없다.

  몸싸움 한 번 없이
  오순도순 세상은
  얼마나 평화로운가.

  진초록 잎사귀로
  눈물을 닦아주고
  서로에게 믿음이 되어주는
  저 초록의 평화를  

  무서운 태풍도
  세찬 바람도
  어쩌지 못한다. 

 비스듬히- 정현종

  생명은 그래요.
  어디 기대지 않으면 살아갈 수 있나요?
  공기에 기대고 서 있는 나무를 좀 보세요.
  
  우리는 기대는 데가 많은데
  기대는 게 맑기도 하고 흐리기도 하니
  우리 또한 맑기도 하고 흐리기도 하지요.

  비스듬히 다른 비스듬히를 받치고 있는 이여.

  

산 위에서- 이해인

그 누구를 용서 할 수 없는 마음이 들 때
그 마음을 묻으려고 산에 오른다.

산의 참 이야기는 산만이 알고
나의 참 이야기는 나만이 아는 것
세상에 사는 동안 다는 말 못할 일들을
사람은 저마다의 가슴 속에 품고 산다.


그 누구도 추측만으로
그 진실을 밝혀낼 수 없다


꼭 침묵해야 할 때 침묵하기 어려워
산에 오르면
산은 침묵으로 튼튼해진
그의  두 팔을 벌려 나를 안아준다.


좀더 참을성을 키우라고
내 어깨를 두드린다.

<허락된 과식 - 나희덕>

  이렇게 먹음직스러운 햇빛이 가득한 건
  근래 보기 드문 일

  오랜 허기를 채우려고
  맨발 몇이
  봄날 오후 산자락에 누워 있다

  먹어도 먹어도 배부르지 않은
  햇빛을
  연초록 잎들이 그렇게 하듯이
  핥아먹고 빨아먹고 꼭꼭 씹어도 먹고
  허천난 듯 먹고 마셔댔지만

  그래도 남아도는 열두 광주리의 햇빛!

세상의 나무들 - 정현종

  세상의 나무들은
  무슨 일을 하지?
  그걸 바라보기 좋아하는 사람,
  허구한 날 봐도 나날이 좋아
  가슴이 고만 푸르게 푸르게 두근거리는

  그런 사람 땅에 뿌리내려 마지않게 하고
  몸에 온몸에 수액 오르게 하고
  하늘로 높은 데로 오르게 하고
  둥글고 둥글어 탄력의 샘!

  하늘에도 땅에도 우리들 가슴에도
  들리지 나무들아 날이면 날마다
  첫사랑 두근두근 팽창하는 기운을!

<당신이 없는 곳에서 당신을 불러도 ㅡ 전동균>

산밭에
살얼음이 와 반짝입니다

첫눈이 내리지도 않았는데
고욤나무의 고욤들은 떨어지고

일을 끝낸 뒤
저마다의 겨울을 품고
흩어졌다 모였다 다시 흩어지는 연기들

빈손이어서 부끄럽지만 어쩔 수 없군요

보이는 것은
보이지 않는 것에서 왔고
저희는
저희 모습이 비치면 금이 가는 살얼음과도 같으니

이렇게 마른 입술로
당신이 없는 곳에서
당신과 함께
당신을 불러도 괜찮겠습니까?


상처가 더 꽃이다 - 유안진

어린 매화가 꽃 피느라 한창이고
사백 년 고목은 꽃 지느라 한창인데
구경꾼들 고목에 더 몰려섰다
등치도 가지도 꺾이고 구부러지고 휘어졌다
갈라지고 뒤틀리고 터지고 또 튀어나왔다
진물은 얼마나 오래 고여 흐르다가 말라붙었는지
주먹만큼 굵다란 혹이며 패인 구멍들이 험상궂다
거무죽죽한 혹도 구멍도 모양 굵기 깊이 빛깔이 다 다르다
새 진물이 번지는가 개미들 바삐 오르내려도
의연하고 의젓하다
사군자 중 으뜸답다
꽃구경이 아니라 상처구경이다
상처 깊은 이들에게는 훈장으로 보이는가
상처 도지는 이들에게는 부적으로 보이는가
백 년 못 된 사람이 매화 사백 년의 상처를 헤아리랴마는
감탄하고 쓸어보고 어루만지기도 한다
만졌던 손에서 향기까지 맡아 본다
진동하겠지 상처의 향기
상처야말로 꽃인 것을

새를 사랑하기 위하여
조롱에 가두지만
새는 하늘을 빼앗긴다

꽃을 사랑하기 위하여
꺾어 화병에 꽂지만
꽃은 이내 시든다

그대를 사랑하기 위하여
그대 마음에 그물 쳤지만
그 그물 안에 내가 걸렸다

사랑은 빼앗기기
시들기
투망 속에 갇히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