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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한 갈대라도 하늘 아래선
한 계절 넉넉히 흔들리거니
뿌리 깊으면야
밑둥 잘리어도 새순은 돋거니
충분히 흔들리자 상한 영혼이여
충분히 흔들리며 고통에게로 가자

뿌리없이 흔들리는 부평초 잎이라도
물 고이면 꽃은 피거니
이 세상 어디서나 개울은 흐르고
이 세상 어디서나 등불은 켜지듯
가자 고통이여 살 맞대고 가자
외롭기로 작정하면 어딘들 못 가랴
가기로 목숨 걸면 지는 해가 문제랴

고통과 설움의 땅 훨훨 지나서
뿌리 깊은 벌판에 서자
두 팔로 막아도 바람은 불듯
영원한 눈물이란 없느니라
영원한 비탄이란 없느니라
캄캄한 밤이라도 하늘 아래선
마주잡을 손 하나 오고 있거니

바람없이 눈이 내린다

이만큼 낮은 데로 가면 이만큼 행복하리

 

살며시 눈감고

그대 빈 마음 가장자리에

가만히 앉는 눈

 

곧 녹을 

 

행복 3- 김용택                                   


바람 타고 눈이 내린다
이 세상 따순 데를 아슬아슬히
피해 어딘가로 가다가
내 깊은 데 감추어 둔
손 내밀면
얼른 달려와서
물이 되어 고이는
이 아깐 사랑

겨울 골짜기- 조향미

가슴 수북이 가랑잎 사이고
며칠 내 뿌리는 찬비
나 이제 봄날의 그리움도
가을날의 쓰라림도 잊고
묵묵히 썩어가리
묻어둔 씨앗 몇 개의 화두(話頭)
폭폭 썩어서 거름이나 되리
별빛 또록한 밤하늘의 배경처럼
깊이깊이 어두워지리.

photo by bhlee

 

간신히 낙엽 - 복효근

  벌레에게 반쯤은 갉히고
  나머지 반쯤도 바스러져

  간신히 나뭇잎이었음을 기억하고 있는,
  죄 버려서 미래에 속한 것을 더 많이 기억하고 있는

  먼 길 돌아온 그래서 가야 할 길을 알고 있는 듯
  언제든 확 타오를 자세로

  마른 나뭇잎.

<꽃씨 - 문병란>

  빈손에 받아 든 작은 꽃씨 한 알!

​  그 숱한 잎이며 꽃이며
  찬란한 빛깔이 사라진 다음
  오직 한 알의 작은 꽃씨 속에 모여든 가을

  빛나는 여름의 오후
  핏빛 꽃들의 몸부림이며
  뜨거운 노을의 입김이 여물어
  하나의 무게로 만져지는 것일까

  비애의 껍질을 모아 불태워 버리면
  갑자기 뜰이 넓어지는 가을날
  내 마음 어느 깊이에서도
  고이 여물어 가는 빛나는 외로움!

  오늘은 한 알의 꽃씨를 골라
  기인 기다림의 창변에
  화려한 어젯날의 대화를 묻는다

<쓰러진 나무 - 나희덕>

  저 아카시아 나무는
  쓰러진 채로 십 년을 견뎠다

  몇 번은 쓰러지면서
  잡목 숲에 돌아온 나는 이제
  쓰러진 나무의 향기와
  살아 있는 나무의 향기를 함께 맡는다

  쓰러진 아카시아를
  제 몸으로 받아 낸 떡갈나무,
  사람이 사람을
  그처럼 오래 껴안을 수 있으랴

  잡목 숲이 아름다운 건
  두 나무가 기대어 선 각도 때문이다
  아카시아에게로 굽어져 간 곡선 때문이다

  아카시아의 죽음과
  떡갈나무의 삶이 함께 피워 낸
  저 연초록빛 소름,
  십 년 전처럼 내 팔에도 소름이 돋는다.

<그 여름의 끝 - 이성복>

    그 여름 나무 백일홍은 무사하였습니다 한차례 폭풍에도 그 다음 폭풍에도 쓰러지지 않아 쏟아지는

우박처럼 붉은 꽃들을 매달았습니다

   그 여름 나는 폭풍의 한가운데 있었습니다  그 여름 나의 절망은  장난처럼  붉은 꽃들을 매달았지만

여러 차례 폭풍에도 쓰러지지 않았습니다

   넘어지면  매달리고 타올라 불을  뿜는 나무 백일홍 억센 꽃들이 두어 평  좁은 마당을  피로 덮을 때,

장난처럼 나의 절망은 끝났습니다

고사목(枯死木)을 보며 - 박두규

자꾸만 변해야 한다고
변해야 살아남는다고 하지만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이 어디 있냐고 하지만
사는 일이 꼭 그런 것 같지는 않다
변하는 것은 나를 살리는 궁리이고
변하지 않는 것은 너를 위한 궁리인 것 같다
무엇보다도 내가 본 세상의 아름다움은
아직도 변치 않는 것들에 있었으므로
사랑은 지난 사랑이라도
변치 않아야 했으므로.

- [숲에 들다](2008:애지)

9월의 시 - 문병란

9월이 오면
해변에선 벌써
이별이 시작된다

나무들은 모두
무성한 여름을 벗고
제자리에 돌아와
호올로 선다

누군가 먼 길 떠나는 준비를 하는
저녁, 가로수들은 일렬로 서서
기도를 마친 여인처럼
고개를 떨군다

울타리에 매달려
전별을 고하던 나팔꽃도
때 묻은 손수건을 흔들고
플라타너스 넓은 잎들은
무성했던 여름 허영의 옷을 벗는다

후회는 이미 늦어버린 시간
먼 항구에선
벌써 이별이 시작되고
준비되지 않은 마음
눈물에 젖는다.

- [새벽이 오기까지는](1994:일월서각)

  숲 - 백무산

  비 개인 숲이 옷을 벗는다
  터진 구름 사이
  바람 몇 점 푸르게 일더니
  새들이 울기 시작한다
  새들 소리에 후드둑 후둑 떨구더니
  초록의 물결이
  철철철 넘쳐난다
  숲이 쏟아놓고 숲이 잠긴다

  여기 와서 침묵하니
  내 침묵에 내가 잠긴다
  숲이 숲 같지 않구나
  내 몸 밖의 것 같지 않구나
  터진 구름 사이 푸른 하늘도
  내 마음 밖의 것 같지 않구나.

    ([인간의 시간] 창작과 비평사 1996)

멀리서 빈다 - 나태주    

                                      

어딘가 내가 모르는 곳에                                      

보이지 않는 꽃처럼 웃고 있는                                       

너 한 사람으로 하여 세상은                                      

다시 한 번 눈부신 아침이 되고

                                       

어딘가 네가 모르는 곳에                                      

보이지 않는 풀잎처럼 숨 쉬고 있는                                      

나 한 사람으로 하여 세상은                                      

다시 한 번 고요한 저녁이 온다

                                       

가을이다, 부디 아프지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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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리서 빈다... 
가을에 주로 읽던 시인데 

오늘은 귀국에 딱 맞춰 의뢰가 들어온

이혼의 상처를 치유하기 위한 특강/워크숍을 위해 

내가 찍었던 사진이 하나 떠올라서 이 시를 같이 읽어보기로 했다. 

(문학치료자료로 사용하지는 않았다.)

                                       

멀리서 멀리로 떠나는 배를 향해 손을 흔드는...  그저 바라보는 나뭇잎 다 떨군 나무의 심정이,

이리저리 가시처럼 찢긴 그 매마른 손짓이 가슴에 남아있었던 사진이었기 때문일까?  

 

보내는 나무의 모습처럼

 망망대해를 향해 떠나는 배도 그리 행복한 유람선 같지는 않아서... 

 

가을이다.. 를 6월이다/ 초여름이다/ 그 어느 때면 어떠랴... 

우리는 언제나 아픈데... 

아프지 말라고 말해주고 싶은데... 

나에게

그에게

 

길 포말로 남은 저 떠나는 배의 마음은 무엇일까?

미련일까 아쉬움일까 회한일까 미움일까 미안함일까 두려움일까.....  그 모두일까....... 

모래- 이형기

 

모래는 작지만 모두가 고집 센 한 알이다.

그러나 한 알만의 모래는 없다.

한 알 한 알이 무수하게 모여서 모래다.

 

오죽이나 외로워 그랬을까 하고 보면

웬걸 모여서는 서로가

모른 체 등을 돌리고 있는 모래

모래를 서로 손잡게 하려고

신이 모래밭에 하루 종일 봄비를 뿌린다.

 

하지만 뿌리면 뿌리는 그대로

모래 밑으로 모조리 새 나가 버리는 봄비

자비로운 신은 또 민들레 꽃씨를

모래밭에 한 옴큼 날려 보낸다.

싹트는 법이 없다.

 

더 이상은 손을 쓸 도리가 없군

구제 불능이야

신은 드디어 포기를 결정한다.

신의 눈 밖에 난 영원한 갈증!

 

 담쟁이덩굴 -공재동

  비좁은 담벼락을
  촘촘히 메우고도
  줄기끼리 겹치는 법이 없다.

  몸싸움 한 번 없이
  오순도순 세상은
  얼마나 평화로운가.

  진초록 잎사귀로
  눈물을 닦아주고
  서로에게 믿음이 되어주는
  저 초록의 평화를  

  무서운 태풍도
  세찬 바람도
  어쩌지 못한다. 

 비스듬히- 정현종

  생명은 그래요.
  어디 기대지 않으면 살아갈 수 있나요?
  공기에 기대고 서 있는 나무를 좀 보세요.
  
  우리는 기대는 데가 많은데
  기대는 게 맑기도 하고 흐리기도 하니
  우리 또한 맑기도 하고 흐리기도 하지요.

  비스듬히 다른 비스듬히를 받치고 있는 이여.

  

<허락된 과식 - 나희덕>

  이렇게 먹음직스러운 햇빛이 가득한 건
  근래 보기 드문 일

  오랜 허기를 채우려고
  맨발 몇이
  봄날 오후 산자락에 누워 있다

  먹어도 먹어도 배부르지 않은
  햇빛을
  연초록 잎들이 그렇게 하듯이
  핥아먹고 빨아먹고 꼭꼭 씹어도 먹고
  허천난 듯 먹고 마셔댔지만

  그래도 남아도는 열두 광주리의 햇빛!

세상의 나무들 - 정현종

  세상의 나무들은
  무슨 일을 하지?
  그걸 바라보기 좋아하는 사람,
  허구한 날 봐도 나날이 좋아
  가슴이 고만 푸르게 푸르게 두근거리는

  그런 사람 땅에 뿌리내려 마지않게 하고
  몸에 온몸에 수액 오르게 하고
  하늘로 높은 데로 오르게 하고
  둥글고 둥글어 탄력의 샘!

  하늘에도 땅에도 우리들 가슴에도
  들리지 나무들아 날이면 날마다
  첫사랑 두근두근 팽창하는 기운을!

<당신이 없는 곳에서 당신을 불러도 ㅡ 전동균>

산밭에
살얼음이 와 반짝입니다

첫눈이 내리지도 않았는데
고욤나무의 고욤들은 떨어지고

일을 끝낸 뒤
저마다의 겨울을 품고
흩어졌다 모였다 다시 흩어지는 연기들

빈손이어서 부끄럽지만 어쩔 수 없군요

보이는 것은
보이지 않는 것에서 왔고
저희는
저희 모습이 비치면 금이 가는 살얼음과도 같으니

이렇게 마른 입술로
당신이 없는 곳에서
당신과 함께
당신을 불러도 괜찮겠습니까?


상처가 더 꽃이다 - 유안진

어린 매화가 꽃 피느라 한창이고
사백 년 고목은 꽃 지느라 한창인데
구경꾼들 고목에 더 몰려섰다
등치도 가지도 꺾이고 구부러지고 휘어졌다
갈라지고 뒤틀리고 터지고 또 튀어나왔다
진물은 얼마나 오래 고여 흐르다가 말라붙었는지
주먹만큼 굵다란 혹이며 패인 구멍들이 험상궂다
거무죽죽한 혹도 구멍도 모양 굵기 깊이 빛깔이 다 다르다
새 진물이 번지는가 개미들 바삐 오르내려도
의연하고 의젓하다
사군자 중 으뜸답다
꽃구경이 아니라 상처구경이다
상처 깊은 이들에게는 훈장으로 보이는가
상처 도지는 이들에게는 부적으로 보이는가
백 년 못 된 사람이 매화 사백 년의 상처를 헤아리랴마는
감탄하고 쓸어보고 어루만지기도 한다
만졌던 손에서 향기까지 맡아 본다
진동하겠지 상처의 향기
상처야말로 꽃인 것을

새를 사랑하기 위하여
조롱에 가두지만
새는 하늘을 빼앗긴다

꽃을 사랑하기 위하여
꺾어 화병에 꽂지만
꽃은 이내 시든다

그대를 사랑하기 위하여
그대 마음에 그물 쳤지만
그 그물 안에 내가 걸렸다

사랑은 빼앗기기
시들기
투망 속에 갇히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