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학기 처음으로 개설된 문학치료의 이해.
55명이나 되는 학생들이 수강을 하게되었다. 부랴부랴 수강신청을 막았는데 너무 늦었다.
교양이므로 45명은 기본적으로 수강신청을 받아야 한단다. 
문학치료의 이해가 실습수업이라는 것을 인정해주지 않았다.

당황했지만 최선을 다 한 수업이었다. 중간에 힘들어서 그만 둔 학생도 3명 있었다.
나머지 학생들은 힘든 글쓰기 과정을 정말 참 잘도 해내었다.


대형 수업이었는데도 많은 감사한 일들이 일어났다.
어떻게 일일히 내가 받은 편지들을 다 이야기할 수 있을까.

그 중에 한 학생이 보내온 편지를 올려본다. 방금 받은 편지여서....

이 학생은 처음 보았을 때 정말 어둡고 힘들어보여서 내 가슴이 답답해져왔었다.
어디서부터 도와야 할지.... 그의 아픔과 상처를 이 대형 수업에서 어떻게 도울지.... 참 많이 고민이 되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글쓰기의 힘을 믿었다.

이제는 얼마나 잘 웃는지! 그리고 어둡던 얼굴이 환하게 피어났다. 주변에서 모두 왠일이냐고 한단다.
처음에 들리지도 않는 목소리로 이야기하던 그가 이제는 밝게 또렷하게 높은 톤으로 말한다.
나는 문학과 글쓰기의 힘을 또 다시 확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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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치료의 이해 수업
마지막 글쓰기/문학치료 활동 이후의 후기]  KS

한 학기 동안 내게서 많은 것을 캐낸 것 같다.

내가 내 자신이기에 당연히 잘 알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것은 산산히 부숴지고 나를 다시 알아가고 나를 대하는 방법을 처음으로 배웠다.

왜 내가 나에게 물어야 할까? 라고 생각한 적도 있었지만, 할 때 마다 신기했고, 줄줄이 사탕같이 나의 스토리가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참 다행이다.
내 자신이 너무나 아무것도 아니라고 느껴질 때도,
열등감이 심해서 끝없이 어두운 생각 속으로만 파고들게 될 때에도,
'나는 사랑받을 수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진리로 깨달은 사람처럼 슬펐을 때에도
 이 날이 올 거라곤 생각지 않았다.


자존감이 당장 생긴 것은 아니다.
그러나 나는 사랑할 수 있는 이유와 끈기를 배웠다.

내게 있는 것, 지금의 내 모습과 미래는 더 최고의 모습이 있을 거라는 기대를 멈출 수가 없다.

그러나 칠전팔기도 중요하다.

비판자부모는 내 내면에서 언젠가 또 나를 공격하겠지만, 나는 그 소리가 어디로 부터 온 것인 줄을 이제는 알기에 나를 사랑하는 것을 포기하지 않을 수 있다.

모든 것들이 웃고 있다. 자기연민과 우울함이 이제는 더 이상 달게 느껴지지 않는다.

정말정말정말 다행이다!

교수님
한 학기동안 정말 수고 많으셨습니다. 가끔 고통스러운 때도 있었지만 끝에 와보니 산봉우리에서 내려다보는 기분입니다.

교수님께 정말로 감사드립니다. 몸의 병이나 그런 것이 당장 해결된 것도 아니지만, 그런 현상적인 부분이 아닌 가장 중요한 것들을 배웠습니다.

끝없이 버텨오던 삶에서 이제는 매일이 신나고, 즐거움에 취하는 삶이 되었습니다. 정말 감사드립니다.

항상 건강하시고 더 많은 사람들이 문학 치료를 알 수 있도록 기도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KS드림

이런 기쁜 소식을 전해들을 때 가장 귀한 선물을 받는 기쁨을 누린다. 지난 겨울 어떤 모임에서 만났던 분의 편지를 받았다.
코스모스 같았던 분. 매번 글을 쓸 때마다 놀라운 이야기들이 나와서 자신도 당황하면서 눈물을 흘리시던 분.  그 진솔함과 그 아픔에 모두를 같이 아파하고 감동했었다.  회기가 끝나고 헤어지게 되어서 맘에 걸리고 문득문득 생각났었는데....이렇게 좋은 소식을 전해주시니 가장 큰 스승의날 선물이다.  보고싶다...



교수님, 안녕하세요. 지난해 말에 평생학습관에서 수업을 받은 HSL입니다.

글쓰기치료가 무엇인지 모르고 시작해 첫날부터 눈물바람이어서 무척 당황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 때문에 두번째 시간엔 결석을 했었죠. 그런데 그 결석이 무색하게도 거의 매 시간 눈물을 흘렸습니다.
제가 분위기 망치는 게 아닐까 걱정하면서도 어쩔 수가 없었어요. 제가 어설픈 이타주의로 중도 하차하지
않아 다행입니다.

교수님께서 무척 신경써주신 것에 감사해요! ... 맘 속에 쌓아두어 썩어가는
이야기들을 꺼내어 들여다 볼 수 있게 도와주셔서 얼마나 감사한지요. '업은 애기 3년 찾는다'더니, 제가 무슨
생각, 어떤 느낌을 맘에 품고 있는지 잘 몰랐어요. 감추었던 감정이나 생각들이 떠오르고 제멋대로 튀어 나와서
깜짝 놀라고, 때로는 며칠을 머리가 깨질 듯 아파 앓을 정도로 결코 쉬운 과정은 아니었지만 마칠 때는 오히려,
회기가 너무나도 짧게 느껴지고 무척 아쉬웠습니다.

의지할 곳, 기댈 곳을 찾으면서 정작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 보는 수고는 미처 못해 왔는데. 이제는 때때로 글을
쓰면서 스스로 저를 들여다보고 맘이 해주는 말을 귀기울여 듣겠다는 마음가집으로 지냅니다. 수업을 받고
올해는 그야말로 제 일생을 통털어 가장 많이 자주 일기를 쓴거 같아요. 아직도 후기는 어려운데 그런대로
그냥 썼어요. 간혹 맘이 심하게 출렁러려 힘들 때도 있지만 시간이 갈수록 제가 진짜 저다워진다고 느껴져 기뻐요.

제가 유령처럼 거의 흔적을 남기지 않고 조용히 오갔지만 오늘은 꼭 교수님께서 사랑과 인내로 하시는 이
글쓰기치료나 그 바탕의 따스한 인간애가 얼마나 귀하고 감사한지 전하고 싶어 용기를 내봅니다. 제가 만난
참 좋은 선생님, 늘 건강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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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바빠서 지난 몇 년간 이곳에 모임의 보고서를 쓰지 못했다.
오늘 19차 문학치료 마지막이었다. 이번 학기에 있었던 문학치료모임이나 특강 중에 있었던 수 많은 감사한 사연들 중 하나만 간단히 적어본다.

글쓰기문학치료모임에 참여하신 분들의 변화에 늘 놀라지만 어떤 강의에서 만났던 한 분이 18차부터 함께 하셨다.  그 분은 평생 처음으로 '행복'이라는 단어를 알게 되었다고 하신다. 그 분의 변화는 정말 놀랍다.  그 많은 말들을 어떻게 오랜세월 가슴에 묻어둔 채 사셨을까?  그래서 그렇게 늘 아프셨을까? 늘 이름모를 분노에 자신을 내어줄 수 밖에 없으셨을까?   요즘은 키보드에서 손이 발레들 하듯, 살아 춤을 추듯 글을 쓰신다고 한다. 하루 종일 너무나 하고픈 말이 많아서 글 쓸 곳을 찾아 다니신다고 하신다.  지난 회기때만해도 글을 못쓰겠다고 불편하고 부담스러워하셨었다.  왜 이 모임에 와야하는지 때로 모르겠다면서 화도 내시고 회의도 느끼시던 분인데 그래도 19차에도 계속 참여하시기를 권했었다. 그리고 거짓말처럼 어느날 부터 변화를 보이시더니 이제는 너무 행복하다고 하신다.  오늘은 또 말씀하시기를 이제는 그동안 피해자처럼 당하기만 하던 직장에서도 전에는 보이지 않던 타인의 숨은 의도가 보이고 상황을 판단하는 지혜의 눈이 생긴 것이, 그래서 자신을 방어할 수 있고 전과 달리 대처할 수 있는 것이 신기하고 놀랍다고 하신다.  문학과 글쓰기의 힘을 다시 한번 확인하고 있다.

이번학기에 개설하게 된 문학치료의 이해 시간에는 55명이 넘는 학생들이 선택을 하였다. 더 많은 신청자가 있었지만 더 이상은 받을 수가 없었다.  첫시간 수업목표와 내용을 설명하고 정말 듣고 싶은 사람, 들어야 하는 사람만 선택해서 대기 중인 다른 학생에게 양보하라고 부탁했는데 전원 그냥 남아서 고민을 참 많이 했다. (그렇게 많은 아이들이 스스로 자신을 알고 싶고, 상처나 문제를 해결받고 싶다는 것이다!!!) 
대형 수업이라 일일히 한 사람 한 사람 facilitate해주지 못하는게 안타깝다. 그런데도 좋은 결과들이 나오는 것을 보면서 또 다시 글쓰기의 힘을 느낀다.  한 학생은 정말 염려가 되었다. 어린시절부터 트라우마가 너무 심해서였다. 그런데 지난 주 나와의 대화중에 말했다. 선생님 정말 신기해요. 그 사건이 더 이상 절 고통스럽게 하지 않을 뿐 아니라 제가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졌어요. 무척 긍정적으로 변했어요. 예전에 이런 건 상상도 못했어요라고 한다.   가장 많은 수(약 70%)의 학생들이 고통스런 사건으로부터  더이상 영향을  받지 않는다고 했고,  그외의 가장 많은 변화는 대인관계가 좋아졌다, (공부에) 집중이 잘된다, 전보다 자주 웃는다.. 등이었다.  몸의 통증이 사라졌다는 보고도 소수 있었다.

그 학생들을 다 보살필 수 없어서 과외처럼 주중에 2시간씩 따로 동아리를 만들어 소수 그룹모임을 가지고 있다. 내 몸이 감당하기가 사실 참 벅차다. 하지만 안타까우니까.... 눈에 보이는데.... 도와주지 않을 수가 없다.

수업 중의  또 한 학생은 오늘 문학치료 모임에 왔다.  그 학생은 첫시간 내가 대화를 해주었을 때부터 참 많이 울었었는데 2주전 수업시간에 내면아이를 대면하고 내가 개별적으로 f/c를 채주면서 이 모임에 오기를 청했다...(여기서 다 말할 수 없는게 안타깝다.).... 그런데 수업 중 그 프로그램을 통한 글쓰기/문학상담만으로도 눈에 띄게 달라졌다.  그 다음 주 '제 글이 밝아지고 기쁨과 행복을 느끼는 게 신기해요' 라고 말했다.  오늘도 모임에서 가장 어린 그가 '나도 절망이 뭔지 알아요.  그리고 희망이라는 단어도 얼마나 무서운 말인지... 절대 쉬운 말이 아니라는 걸 알아요..... 절망을 많이 디뎌보면 행복도 더 가까이 느낄 수 있어요."라면서 다른 어른 참여자들을 깜짝 놀라게 하기도 했다.   다른 참여자들은 학생일 때 이런 모임에 오게 된 그를 너무나 축하(?)해주면서 샘이난다고 해서 한바탕 웃었다.

19차가 끝나는 오늘은  오전시간엔 가슴 아픈 이야기도 있어서 눈물도 흘리시고 또 서로 아파했지만 오후세션에서는 내 안의 목소리를 맘껏 자유롭게 터뜨리는 프로그램으로 모두들 맘껏 웃으면서 마쳤다. 시간이 끝났는데도 모두들 아쉬워하셔서 오늘도 또 시간을 연장해서 함께 시를 하나 더  나누고 글을 쓰고 헤어졌다.  모두들 행복했다는 말씀에 나도 참 행복했다. 
(c)photo by bhlee



아침에는
운명 같은 건 없다
있는 건 오로지
새날
풋기운!
(정현종)


photo by bhlee



지난 겨울 8월에 선물로 받은 난의 꽃이 다 지고 말라버렸다.
그리고 봄이 오도록 그 난의 말라버린 꽃들이 실낱 같이 가는 꽃줄기에 매달려 아직도 떠나지 않고 있다.
바스러질 것 같은 저 꽃은 무슨 힘으로 아직도 견디고 있는가
시든 채 겨울이 다가도록 몇달이고 매달려 있는 저 꽃을 꽃이라고 부를 수 있는가
아니면 꽃이 아니라 불러야하는가?
일부러 손으로 떼어버려주어야 하는가?
매달려 있는 것이 힘겨워 누군가 --인간의 손이--차라리 떼어주기를 기다릴까?
아니면 줄기마저 다 말라버리기까지 아직도 그 공급하는 수액에서
작은 생명을 나눠마시며
저렇게 동반자로 매달려있는 것일까?
떠나기 싫다고 같이 있고 싶다고?
대체 생명이란 어디까지인가?
마른 생명...
나는 왜 저 이미 시들어 버린 위태로운 꽃들을
겨울이 다가고 봄이 오도록 볕 잘드는 창 앞에 열심히 놓아두는가

그래, 부디 마지막까지 살아있으라.
그 손을 놓지 말아라
시들어도 꽃은 여전히 꽃이다
시들어서도 너는 여전히 아름다운 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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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을 쉬는 한
다 알고 있다
다 들을 수 있다
다만 눈감고 있다.

조금씩 지쳐서
결국 안녕,
들리지도 않을 말
바스락 입술만 떨고

말라가는 정에 매달렸던
뼈마른 가지

놓으며
떠나는 거다.

[예전 공개된 홈페이지에서 가져온 공개된 글]- 제자와의 대화

*이 글은 한 제자가 공개글로 쓴 것이며 동의에 의해 실었음.

난 회사에 묻어 있다. 오물처럼

내가 일하고 있는 부서는 총무부 라는 곳이다. 영어로는 General Administraion Dept. 총무부는 회사 살림을 하는 곳이다. 집살림과 마찬가지로 눈에 띄는 일은 아니지만, 분명히 사람의 손길이 필요한 일이다. 눈에 띄지 않는 작은 일들이 모여 회사를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가는 과정은 큰 즐거움이다.

회사는 단지 사장과 Executive member들이 운영하는 것이 아니다. 너무나 당연한 일이지만, 아침에 우편물이 발송 또는 배달되고, 신문이 배달되고, 서류들이 도착하고, 전화가, 컴퓨터 네트웍 프로그램이 정상적으로 돌아가야 하고, 전기가 들어와야 한다.

우편물이 배달되는 건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전화가 되는 건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런 것들이 정상적으로 되기 위해선 365일 휴가 한 번 제대로 못가고,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적은 월급과 훨씬 안 좋은 근무 환경에서 성실히 일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월요일날 직원들이 회사에 출근했을 때 전화가 정상적으로 가동되게 하기 위하여, 담당 직원과 업체 사람들은 새벽까지, 주말도 반납하며, 성실하게 기계처럼 일을 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될까?

정상적으로 돌아가야 하는 것이 당연하기 때문에 총무부 일은 잘하면 본전, 못하면 욕 한바가지라고 한다.

회사가 실적 위주와 성과 위주로 그 직원의 능력을 평가하는 인사고과 프로그램을 진행할 때 난 정말 난감하다. 내 일은 내세울 것이 없기 때문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작은 일들의 연속이기 때문이다. 실적으로 혁혁한 뭔가를 이루어 낼 수 있는 성격의 일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날 힘들게 하는 건 상사와 소통이 안 된다는 거다. 내 부서에 대한 나의 태도와 내 생각을 말을 하지만, 전혀 알아듣지를 못하신다. 내 말을 알아 듣는 능력이 아예 결여되어 있는 분 같다. 내가 그렇게 어렵게 말을 했나? 내 친구들은 내 얘기들을 잘 알아 듣는데… 정말 신기한 경험들이다. 같은 공간에서 대화를 나누는데, 나 혼자 아득한 딴 세상에 있는 것 같은 외로움과 창피함, 수치심, 부끄러움이 뒤섞여 이상한 나라에 온 것 같은 경험이다.

요즘 회사 생활을 하면서 그런 현상을 자주 겪는다. 나의 일하는 스타일이 고집스럽게 미련해 보이지만, 그렇게 밖에는 할 수가 없고, 그렇게 해야 직성이 풀리는 나 때문에 절망스럽다.

자기가 필요할 때만 선량한 웃음을 지으며, 이용만 하려는 야박한 사람들. 알고보면 다 도둑들. 더 큰 도둑이 될려고 출세하려는 사람들. 무례하고, 이기적인 사람들.

이용 당해줄려고 마음 먹었는데, 결국 내 실력은 뽀록이 난다. 난 실은 그걸 감당할 실력이 없기 때문이다.

난 오늘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채, 어정쩡하게 하루를 보내고 있다. 그냥 회사에 묻어 있다. 오물처럼.

내가 절망하고 있을 때 누군가가 위로를 해준다고 한 말.“그래도 암선고 받고 한 달밖에 못사는 사람들도 있어. 네 처지가 그 사람들 보다는 낫잖아?” 정말 어이가 없다. 그래도 목숨 부지하고 살아 있는게 나은 거라니… 그게 나를 위로한다고 하는 말이라니… 웃음밖에는 나오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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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아, 얼마나 사무치게 고독한 일인데... 그 무리들 속에서 혼자 표정 관리하고 있는게. 심장이 멎는 일이지. 그 무리들이 그런 나의 연약함을 짐승 같은 본능으로 냄새맡고 덤비면 안되니까 들키지 않으려고 숨을 죽여 울어야 하지.

살면서 너무 자주 그런 걸 느껴. 사람들은 너무나 당당하게 뻔뻔스럽게 이기적이라는 걸. 눈에 불을 켜고 자신에게 유익한 일을 위해 덤벼든다는 걸. 오직 자신이 누구인지 그걸 드러내기 위해 24시간 호흡하는 것 같다는 생각. 그걸 어린 학생들에게서도 종종 본단다. .

모두가 비겁한 벙어리가 되어야만 가장 평화롭다는 생각이 서글프다.

세상은 갈 수록 사막이 되어가고 있다는 생각이다. 그 곳에서 모두는 그저 눈에 불을 켠 맹수들로 변하고 있어. 너무 서글픈일이야. 기가 죽어서 살고싶지조차 않단다.
고독이 사무칠 지경이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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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RE:

선생님, 세상이 점점 낯설어요. 전 마치 트루먼쇼에 나오는 주인공 같아요. 저만 철없이 아무것도 모르고 있는 것 같아요.

근데요, 정말 놀라운 것은 그 사람들이 정말 똑똑한 사람들이라는 거예요. 학교도 저보다 더 좋은 곳을 나왔구요, 학위도 높고, 외국에서도 공부했고, 저보다 좋은 경험들을 많이 한 사람들이예요,

정말 미치겠는 것은 이런 사람들이 최소한 상식적이지도 못하다는 거예요. 인격적인건 바라지도 않아요. 그 좋은 머리와 많은 공부, 경험이 대체 뭐였나 싶어요.

최소한의 상식과 예의조차 갖추지 않은 이기적이고 무례한 그리고, 도둑의 대가들. 그들의 욕심은 정말 끝이 없어요. 무슨 끝없이 먹어 치우는 괴물같아요. 전혀 소통을 할 수 없는 똑똑하고 잘난 괴물들이예요.

그 괴물들이 돈과 지위 앞에서 얼마나 추하게, 얼마나 쉽게 자신의 인격과 인간됨을 가차없이 버려버리는지... 실은 그 모습을 보지 말았어야 했어요.

그들 편에 서볼려고 한때는 분발한 적도 있었어요. 하지만, 바로 뽀록이 났어요. 너무 어설퍼서. 결정적으로 제가 그들 앞에서 너무 기가 죽어서 연습한대로 하나도 못했어요. 쩔쩔매다가 나왔어요. 그들한테는 사람을 그 앞에서 꼼짝 못하게 하는 기술까지 갖고 있더라구요.

선생님, 그들과 소통도 안돼지만, 전 아직 견딜 실력도 없어요. 가끔은 그들한테 붙어서 부스러기라도 두둑히 챙기는 사람들을 부러워하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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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RE:RE:
아, 그렇게 말하는 그 맘 알아. 나도 그런 생각 수도 없이 오간단다. 옳고 그름의 기준이 사라진 세상에 나만 표류하고 있다는 생각에 너무 외로워서.

네가 당하는 일들이 버거워서라기 보다는 외로워서 더 견디기 힘든 거야. 아무도 너와 같은 생각을 가진 동료가 없으니까. 사람들은 혼자이지 않기 위해, 외톨이가 되는 두려움에 가장 비참해지거나 비굴해지지.

힘내. 넌 혼자가 아니야. 그리고 그 사람들을 멀리서 떨어져서 바라 봐. 그들도 속에는 모두 두려움을 숨기고 있단다. 어쩌면 정말 바보들이야. 눈을 감고 사는... 그런 줄도 모르고 내일이면 사라질 안개를 움켜쥐려 일생 자신을 파는 사람들. 그것을 행복이라고 속고 사는 사람들. 그냥 한 발 멀리서 바라 봐. 네가 속한 곳은 여기가 아니야. 힘내. 네 곁에 있는 수많은 보이지 않는 친구들을 봐..


[ 우리의 특권, 우리의 긍지 ]

졸면서졸면서 한참을 썼는데 컴이 갑자기 움직이질 않아서 다 날렸네.

어제 밤 네 글에 답을 쓰고부터 갑자기 인터넷이 안되어서 이제야 고쳤어. 참 말성이야.-말썽 ( 난 새끼 손가락이 힘이 없어서 늘 쉬프트 누르는 글자는 두번 쳐야해. )

Y아, 네 말 한마디 한마디 너무나 공감해. 네가 처한 상황이 유리창밖에서 보듯 환히 보여... 너무 맘이 아프다... 너무 아파.. 너희들은 세상에서 잘 적응하고 살 줄 알았는데. 너희들은 나처럼 되지 않기를 그렇게 원했는데.

네 글 읽고 난 후 요즘 또 다시 읽는 [나의 라임오렌지 나무]에서 뽀르뚜가의 죽음 부분을 읽다가 엉엉 소리내어 한참을 울었단다.

Y아 넌 혼자가 아니야. 많은 말을 썼었는데 다 지워져서 그대로 다시 쓸수가 없네.

그들의 그런 행동은 지극 당연한 거야. 그게 인간의 적나라한 모습이야. 슬픈 일이지만...

그리고 우리는 절대 그들의 방법으로 그들을 이길 수 없어.

그런데 그게 우리의 긍지요 특권이라면 이해할 수 있겠니?
조용히 패배하는 것. 이 세상의 법칙과 이 세상의 가치,  이 세상의 잣대로는 우리의 정당성과 우리의 옳음과 우리의 억울함을 인정받을 곳이 없어. 우리의 정당함을 판결해줄 법정은 이세상엔 없어. 그래서 늘 그 싸움에서 지고 고통의 형을 사는 거야. 추방되고 낙인찍히고. 무고히 무고히. 그저 혼자 조용히 존재할 자유조차도 보장받을 수도 없지. 그게 순교야. 그게 바울이 말한 "날마다 죽노라"라는 의미야.

날마다 날마다 내가 세상에서 없는 자처럼, 수치를 당하고 부당하게 비정상적인 사람으로 취급당하고 소리나지 않는 총을 등 뒤에서 맞고 피투성이가 되어 사는 거. 그게 날마다 죽는 거야. 우리를 "미말에 둔 자 같이 하셨다"고 하잖아. 미말이란 사형장에 끝려가는 걸 말해. (투기장에서 맨 마지막..) 자기들은 소리나지 않는 총과 칼로 나를 난도질하고도 내가 한번 정당방위로 총을 쏘면 당장 체포당하지. 감히 소리내면서 총질이냐고... 그리고 유배당하는 거야.

그래도 난 믿는단다. 그래도 난 믿어...
그래도 내가 통곡하고 울어도 끝까지 다시 일어서는 이유는, 당당한 이유는,  내가 비록 육신은 세상에 속해 있어 두려움을 느낄지라도 (바울처럼, 다윗처럼) 결론은 "내가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날지라도 해를 두려워 않음은 -- I fear not evil--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심이라..."고 굳게 믿기 때문이야.

주님은 우리 곁에 계서. 잊지마. 넌 혼자가 아니야. 그리고 그들 앞에 나아갈때 늘 기도로 무장을 해.
다윗의 말을 봐. 그가 사망의 골짜기에서 두려워하는 것은 "해받는" 거야. 우리가 생각하는 남들이 해꼬지하는 해- 가 아니라 EVIL, 즉 내 영혼을 타락시키는 악을 두려워한다는 거지. (우리 수업 중에 오셀로 공부하면서 했던 말 기억나? 진정 비극은 무엇인지.)

얼마나 차원이 다른 기도요 고백이니. 세상에는 우리가 진정 바라봐야 할 멋진 사람들이, 멋진 믿음의 선배들이 여기 저기 숨어 있어. 내가 바알에게 무릎꿇지 아니한 70명을(400명인가??) 두었노라 고 하시잖아. 우리 시시한 사람들 바라보지 말고 저 높은 곳을 보자. 저 넓은 곳을 보자. 아무리 못 견딘다 해도 생은 꿈같이 지나간단다.

아직 다 안썼어. 또 쓸게.

우선 시 하나 보낸다. 오래전에 누구에게 보낸 시인데 그걸 전도사님이 방에 붙여 놓고 있더라구 해서 용기내서 올려본다.

다시 또 쓸게... 힘내. 네 곁에 주님이 부리시는 천군천사가 있어. 그리고 이기고 지고 그런 거 하지마. 우린 그들이 모르는 양식이 있자나. 세상을 두려워하지마...

야고보서와 로마서 앞부분을 읽어봐. 하늘로서 온 지혜와 땅에서 난 지혜의 차이가 무엇인지. 사람들의 행동이 어쩌면 그렇게 자세히 정확히 적혀있는지. 시기, 질투, 당파지어 남을 거부하기, 자기 사랑, 거짓말, 뒤에서 수근거림.... 너무나 구체적으로 나와있지? 그게 인간의 모습이야. 우리도 옛사람은 그런 사람이었어. 그러니 놀라지 마. 두려워 마. 알았지?

얼마나 인간의 속성이 악하면 10계명에서 거짓 증거하지 말라고 하셨겠니. 거짓을 '밥먹듯' 먹으며 양식으로 삼고 사는 사람들... 그게 인간의 타고난 모습이야.

네 생각만 하면 왜 이리 가슴에 마구 분노와 안타까움과 설움이 몰려오는지. 그렇게 똑똑하고 시원시원한 네가. 깔끔하고 깨끗한 성격의 네가 힘든 거 맘이 너무 아프다. 겉만 강하고 "아무치도 않아요 괜찮아요" 하면서 속으론 위경련이 나도록 두려워하고 위축되고 외로워하는 널 알고 있어. 내가 알 때 주님이 모르실 리 없잖아.

왜 우리에게 고난이 닥치는지 나도 모른단다.

얼마전에 E와 백화점 갔다가 갑자기 "잠간 어디가서 쉬자... "하더라구. 내가 금방 알았지. "너 울고 싶구나.." 했더니 끄덕이며 눈물이 그렁그렁하는 거야. 화장실에서 한참 울면서 그애가 말했어.
"고난은 그냥 고난일 뿐이야. 무슨 의미가 있어. 이렇게 망가진걸. 그 고통 때문에 이렇게 불쑥 불쑥 병을 앓고 있는 걸... "

나도 말했어. 그럼. 고난은 그냥 고통일 뿐이야. 뜻이고 뭐고 몰라... 그냥 운명처럼 운이 없어서 걸리는 거야. 그리고 운명을 받아들이듯이 그냥 그걸 받아들이는 수 밖에 없어.

그애의 그 천사같이 예쁘던 옛날 얼굴이 점점 어두운 그늘로 덮여가는 것을 보면서 얼마나 가슴이 미어지게 아프든지..

나도 모른단다. 세상은 왜 이리 엉망진창 진흙탕같은지. 왜 그속에서도 어떤 사람들은 여전히 꽃을 피우려고 이렇게 아파해야하는지. 다만  세상은 어둠이기에 주님께서우리에게 빛이 되라 하셨지.  세상이 얼마나 악하면 예수님을 못박겠니? 

역사상 가장 억울하신 분은, 가장 고독하신 분, 그분을 생각하면서 그분의 약속을 믿고 그 비밀을 배우며 살자.
"네가 세상에서는 환란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힘내. 힘내. 넌 혼자가 아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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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정원의 그림이] 현실과는 다르게 보일수도 있겠지. 하지만 내게는 이 그림이 내가 느끼는 시적인 정원의 모습과 스타일을 전달해주고 있다.  네가 이걸 이해할 지 모르지만,  색깔을 잘 배열하기만 해도 시를 말할 수 있다. 마치 음악으로 위로의 말을 하듯이.........그림 속에서 이 정원의 풍경과 인물들을 마치 꿈속에서 보듯이, 현실보다 더 신기하게 나타내주는 거지. "-고흐의 편지 11/12/1888 아를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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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mory of the Garden at Etten (Ladies of Arles)
 (State Hermitage Museum/here only for therapeutic and/or educational purposes)

이 그림은 1888년 11월 반 고흐가  아를르에서 그린 그림이다. 그가 고갱과 함게 살고 있었던 때 그린 그림으로  다른 화가들과 친구가 되고 싶었던 열망들이 좌절되고 고갱과의 관계에서도 상처를 입던 시기이다. 그런 그의 좌절과 고통이 이 그림속의 색갈로 나타나고 있다.  프로방스는 홀랜드 고향을 생각나게 했고 그는 불안한 노란색, 녹색, 푸른색에 붉은 색을 여기저기 섞어 그의 그리움과 좌절과 고통을 "시"로 표현했다. 캔버스 표면, 그림의 질감은 두껍고 직접 물감을 짜 넣음으로써 고흐의 긴장과 절박한 심정을 드러내준다.
Chagall- Me & the Village/ The Dance (used here for therapeutic/educational purpose on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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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물은 우리들의 시선을 대하여 저의 시선으로 응답한다.
사물은 우리가 그것을 무심한 눈으로 보기 때문에 무심하게 보인다.  
그러나 맑은 눈에는 모든 것이 거울이다.
솔직하고 진지한 눈길에는 모든것이 깊이를 가지고 있다.
(바슐라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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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gall:

"석판화를 찍는 놀이나 동판을 손에 들고 있으면 나는 마치 부적을 만지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이 돌이나 동판에다 나는 나의 슬픔이나 기쁨의 모든 것을 내 맡길 수 있다고 생각했다. 기나긴 세월동안 나의 인생을 스치고 지나간 모든 것--탄생, 죽음, 결혼, 꽃, 동물, 새, 가난한 노동자, 부모, 밤의 연인들, 성서 속의 예언자들, 길 가, 집안, 성당, 하늘, 그리고 세월의 흐름 속에서 우리들의 인생의 내부와 주위에서 일어난 슬픈 사연을....[석판화] 1권 중


"나는 자주 이런 말을 들었다. '샤갈 자네는 실체적이 아냐'. 그리고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실체가 어떤 것인가를 이해하기 위해서 자네도 비실체적으로 되어버리는 것이 좋을 걸세'.

"아무 말도 없다. 나의 몸 속에 숨어 있는 모든 것이 움직여 날뛰며, 너에 대한 기억과 같이 방황한다. 너의 창백하고 가느란 손, 말라빠진 너의 뼈가 나의 목을 힘껏 조인다. 누구에게 기도드려야 할까?"    Chagall, Monumental Week에서

현대는 감동이 솔직하게 눈물이 되지 않고 단지 아무 개성도 없는 미소가 우리들  눈앞에 커튼같이 드리우고 있는 그러한 슬픈 시대입니다. 바로 그런 이유로 나는 ............예술에 대한 나의 꿈, 이 세상의 인생과 이 세상 아닌 곳의 인생, 존재했던 것과 존재하지 않았던 것에 대한 나의 꿈을 여러분에게 털어놓고 싶은 것입니다.  (1963년 일본 샤걀전에서 작가의 메시지)

"내 눈에는 예술이란 무엇보다도 먼저 어떤 영혼의 상태라고 여겨진다" (샤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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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낡은 샤갈의 화집 뒤에서 발견한 나의 빛바랜 메모들이다.  까마득한 그 시절... 내가 그리던 이 나이의 나의 모습은 어떤 것이었을까?      -bhle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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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로와진 이미지와 이미지의 원천들이 마음것 펼쳐지는 모습을 그 어느누구보다도 잘 보여줄 수 있는 사람은 아마도 샤갈(Chagall)일 것이다.

그는 후일 자신의 언어로 사용될 수 있는 이미지들을, 어린 시절동안 자신의 존재 속에 분간할 수 없을 만큼 깊이 뿌리내린 이미지들을 외부세계 속에서 취하여 간직한다. 그 이미지들은 아직 두꺼운 껍질이 생겨나지도 않은 채, 그토록 유연한 어린시절의 영혼으로서는 결코 잊을 수 없는 저 감미로운 상처들과 만났을 때 그의 내부로부터 들어온 것이다.  아주 일찍 그는 자기가 기구하는 소원들이 그 이미지들은 통하여 이루어 지리라는 것을 예감했었다. 그러나 그 때는 그 기도가 예술가의 기도라는 것 조차 알지 못하고 있었다.

"나는 거리를 헤매고 돌아다니면서 찾고 기도했다. 하나님, 구름들 속에, 신기료 장수의 집 뒤에 숨어있는 하나님, 내 영혼이 나타나게 해주세요. 아직 말을 더듬는 어린아이의 고통스런 영혼아, 나에게 길을 가르쳐다오. 나는 다른 사람들 처럼 되고 싶지 않다. 나는 새로운 세계를 보고 싶다."

도시는 그 기도에 대한 대답처럼 낯선 얼굴로 나타나는 것 같았다. 모든 주민들이 그들의 평소의 자리를 떠나서 땅위로 떠서 걷기 시작한다. 낯익은 인물들이 지붕위로 올라가 자리를 잡고 그곳에서 휴식한다...

초년기 궁금중 많은 눈이 포착한 그 일상의 이미지들, 시각적, 감정적 언어들을 샤갈을 그 본래의 환경에서 꺼내 새로운 환경, 즉 그의 영혼 속에 집어 넣는다. ... 즉 중력의 소멸이다. 새로운 별 속으로 자리를 옮긴 이미지들은 더 이상 중력을 느낄수 없게 된다. 그들의 존재이유처럼 여겨졌던 물질성으로 부터 마침내 해방되고 주관적이고 비밀스러운 그들의 의미에로 환원된 와관들은 오직 감각적인 자력에만 복종할 뿐이다.  그것들은 소옹돌이치고, 서로 잡아 당기고, 헤어지고, 공중에 뜨고, 혼연일체가 되고, 뒤집힌다. .....

거꾸로 서기 일쑤인 그의 인물들 처럼 가시적인 세계도 샤갈의 내부에서 뒤집혀 넘어지고 심연속으로 미끌어져 들어간다. ...
(르네 위그/ 예술과 영혼 중에서)

왜 고래를 춤추게 해야하나 -칭찬에 대한 불만

항상 새로운 아이디어와 작품을 만들어 내야 하는 부담감에 시달리는 아이.
몇 년 전 포트폴리오를 준비하던 때, 아이가 말했다.
"엄마, 가끔 사람들의 기대와 칭찬이 나를 불편하게 해.
내가 정말 얼마나 힘들게 그 일을 이루어냈는지 사람들은 모르는 거 같아.
그리고 언제나 당연히 그렇게 되리라고 기대하는 게 나를 너무 힘들게 해.
나를 믿는다고 나를 인정해주는 거겠지만 내게는 그 고통스런 과정을 또 겪어야 한다는 것도 
그러다가 실패하면 그 사람들이 실망하면 어쩌나 하는 것도 너무 힘들어."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고?
나는 이 말이 처음부터 맘에 들지 않았다. 지금은 실종된 일기장에 썼던 기억이 난다.
고래가 춤추기 위해 얼마나 고통스런 훈련을 거쳐야하는가...
고래는 춤추기 위해 태어난 존재가 아니지 않은가?
고래가 춤을 출 정도로 칭찬은 못할일 없게 만든다는건 아주 묘한 잔인한 뉘앙스를 품고 있다고 여겨졌다.
아마 나도 우리 아이와 같은 기분을 느꼈기 때문일까?
넌 강해, 넌 뭐든 잘해, 대단해...  한 없이 위축되는 나에게 친구들은 늘 말했다.
넌 혼자서도 잘 하잖아. 누가 뭐래도 흔들림 없이..
심지어 선배들도 말했다.
천하의 이봉희가...
그 말때문에 나는 힘들어도 힘든다고 말 할 수도 없었고
누군가에게 도움을 청하고 의지하는 법을 언젠가부터 접고 살았는지도 모른다.

 
나는 동물의 쇼를 별로 안 좋아한다.
여행지마다 새, 강아지들의 애교 뿐 아니라
고래, 심지어 코끼리가 까치발로 선다든가, 사자를 길들이고 곰들이 쇼를 하는 것을 보는 게 나는 한번도 유쾌한 적이 없었다.
길들인다는 자체가 나를 불편하게 하기 때문이다.
특히 일본 후쿠오카 여행에서 높은 돌 산에 갇혀서 길들여지고 있는 곰들을 바라보면서 위장이 거북했다. 
할머니들처럼 까마득한 산 위, 바위 우리에 갇혀 관광객이 던져주는 음식을 받기 위해 재롱부리는 그들...
동물을 길들이기 위해 조련사가 하는 일은 물론 사랑도 있겠지만
첫째, 배가 부르게 주어서는 안되고 늘 조금씩 갈증나게 허기를 채워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배부른 동물은 길들일 수가 없다.
손가락만한 한마리 물고기를 선물로 받기 위해 재주부리는 돌고래의 춤이 칭찬 때문이라고?
대체 인간들은 왜 그런 것을 보고 즐거울까?
나의 아이들도 그렇게 길들이고 싶은 것일까? 설마....

이야기가 이상한 대로 흘렀다.
고래를 춤추게 한다는 것을 칭찬의 기적에 비유한 자체가 거부감을 주어서이다.

그런데 칭찬의 역효과에 대한 문제제기가 나왔다. 너무 반갑다.

칭찬은 상대에게 엄청난 부담이 된다. 그 기대에 못미치면 상대가 아, 이제보니 너 별것 아니구나. 내가 잘못 봤구나. 그런 생각을 하면 어쩌나 심리적으로 엄청난 부담을 가지고 어떤 수를 써서라도 (심지어 부정행위를 통해서라도) 그 사람을 실망시키지 않으려고 하게 된다.

어려운 문제 상자와 쉬운 문제상자를 넣어두고 선택하는 시험이 있었다.
1. 어려운 문제가 있었는데도 끝까지 침착하게 잘하네.
이런 말을 들은 사람은 어려운 문제를택하고
2. 넌 참 머리가 좋구나. 참 똑똑하구나 하는 칭찬을 들은 아이들은
쉬운 문제를 택하였다.  똑똑하다는 걸 증명해야하니까.

더 큰문제는
두 집단에게  문제푸는 방법이 있는 상자와 아이들의 점수가 있는 상자를 주고 선택하게 했을 때
1군은 문제푸는 방법 상자를 택하였다. 그래야 내가 틀린 문제를 알 수 있기 때문이라고 선택의 이유를 말했고
2군은 다른 아이들의 점수가 궁금하다며 그 상자를 선택함으로써 자신이 독똑한지 늘 증명하고 확인하는것에만 집착을 보였다.

칭찬을 들은 집단은 완벽주의가 되려고 한다.
칭찬을 듣는 아이들의 얼굴에는 기쁨보다는 불안이 숨겨져 있다.
칭찬은 판단이다.
칭찬은 통제이다.  praise is judgement, controlling
칭찬이 자신감을 높여준다는 오래된 믿음은 틀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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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찬은 중요하다. 아이의 자존감을 세워주는데 없어서는 안될 필요한 것이다.
칭찬은 정말 사람을 변화시킨다.
단, 이때의 칭찬은 상대가 어떤 상태이든 그 자체를 받아주는 상대에 대한 믿음을 근거로 하는 것이지 자신의 기대를 강요하는 칭찬은 안된다. 즉 인내심, 끈기, 실패를 했을 때도 그것을 이겨내는 힘, 올바른 판단 등 일을 이루어내는 과정과 노력에 대한 것이어야지 성취에 대한 것, 성취를 이끌어내기 위한 강요과 판단을 바탕에 깐 정치적인 것이어서는 안된다는 생각이다. 

칭찬의 말을 바꾸어야 한다.
이제 어려운 일을 극복하기 위해 한 '노력'을 "인정"해주어야한다.
때로는 아이가 스스로 판단하도록 인내로 기다려 주기도 해야한다. 그 과정에 실패는 당연한 것이다.
그것이 진짜 "칭찬"이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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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말 하면 사람들은 그럼 어떤 칭찬을 해야하느냐고 칭찬 목록을 달라고 할것이다.
어떤 칭찬?
그것은 내가 상대에 대한 마음을 바꿔야 나오는 것이다.
언어 습관을 바꾸기 위한 근본적인 것은 모범답 같은 샘풀이 아니다.
그런 샘풀이 얼마나 많은가. 하지만 왜 번번히 실패하는가?
끝없이 훈련해야한다. 그것은 언어 훈련이 아니라 상대를 수단으로 사용하는 것이 아닌
진정으로 존중하고 사랑하는 법을 배우는 훈련을 말하는 것이다.
배나무가 되어야 배꽃이 피고 배 열매를 맺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가시나무가 단 열매를 맺을 수 없는 것과 같다.

(c)2011이봉희/이 글은 수정되어 [내 마음을 만지다]에 실림.

[2011년 한국인이여 행복하라] [6] 중년 여성과 행복


50代 한국 여성, 10개국 중 '불행 점수 1위' 기록
남성은 50代 들어 행복지수 상승 선진국 여성들은 개인 생활 즐겨
빚과 자녀의 굴레… 피로감 심해 "가족은 필요로 함께 사는 것"

전체 평균의 3배 넘게 답해
"삶의 위안 얻으려 종교 활동" 한국 78% vs 덴마크 11%

http://news.chosun.com

6·25 전쟁 직후인 1950년대 중반에 태어나 팍팍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부모는 남자 형제들에게 대학을 양보하라고 했다. 22세쯤 결혼해 시부모를 모시고 살면서 2명의 아이를 낳아 길렀다. 남편이 가져다주는 월급을 한푼 두푼 모아, 아이만큼은 '못 배운 설움'을 겪지 않도록 매섭게 공부시켰다. 사회는 이들의 열성에 '치맛바람'이란 별명을 붙였다. 남편이 한창 일할 때인 40대 초반, 외환위기에 가정이 휘청댔다. 생계, 그리고 아이들의 등록금을 위해 생전 처음으로 취업 전선에 뛰어들었다. 할 수 있는 일은 일용직, 혹은 임시직뿐이었다. 자녀가 대학을 졸업할 때쯤인 2005년, 20대 젊은이의 7.5%가 실업자인 '청년 실업의 시대'가 시작됐다. '88만원 세대'로 전락한 아이들은 아직도 부모에게 손을 벌린다.

통계청의 '인구주택 총조사' '경제활동인구 조사' 등을 토대로 재구성한 대한민국 55세 여성의 전형적인 삶이다. 전통적 가치관과 급변하는 사회를 치열하게 버텨온 한국의 50대 여성은 조선일보·한국갤럽·글로벌마켓인사이트가 신년기획 '2011년, 한국인이여 행복하라'를 위해 실시한 10개국 5190명의 여론조사에서 가장 불행한 집단으로 조사됐다. 중년 한국 여성의 불행 뒤엔 평생 축적된 경제적 부채의 굴레, 삶을 바쳐 뒷받침해온 가족에 대한 부담감이 자리 잡고 있었다.

◆한국 50대 여성, 10개국 중 가장 불행한 집단

영국 이코노미스트는 지난해 12월, 인생의 행복도가 20대에서 40대까지 꾸준히 떨어지다가 50대에 다시 올라간다는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인생이 내리 하락세가 아니라 40대에 바닥을 치고 반등하는, 이른바 'U자형 행복 곡선'을 그린다는 것이 미 프린스턴대의 연구 결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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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 여론조사' 결과 한국의 남성은 전형적인 'U자형' 행복도를 보였다. 그러나 여성은 아니었다. 한국에서 가장 '행복하지 않다'고 느낀 세대는 50대 여성이었다. 스스로를 '행복하다'고 평한 여성의 비율은 40대 77.2%에서 50대 61.1%로 가파르게 떨어졌다. 한국의 50대 여성은 조사 대상 10개국의 모든 세대를 통틀어 '불행하다'고 답한 비율(37%)이 가장 높았다.

한국 여성의 행복도는 20대·40대 때 높고 30대·50대에 낮은 지그재그형이었다. 남성의 행복도는 20대에서 40대까지 떨어지다가 50대에 다시 상승했다. 50대 여성의 행복도가 세계 최저치를 기록하면서, 한국인 전체의 평균 행복도도 '50대 반등'에 실패했다. 행복한 한국인의 비율은 20대 80.2%로 높게 출발해 30대 69.2%, 40대 67.5%, 50대 64.2%로 꾸준한 내리막을 기록했다.

◆가족을 사랑한다… 그러나 한편으론 '인생의 큰 부담'

50대 여성은 빚과 관련한 질문에서 큰 부담을 드러냈다. 10명 중 7명이 '빚이 있다'고 답했고, 그중 42.6%는 빚으로 인한 이자 때문에 고민하고 있었다. 다른 나라의 경우 빚에 대한 부담은 주로 새 가정을 시작하는 20대·30대 몫이었다. 호주와 핀란드의 경우 30대 여성(각각 41.6%·29.5%), 미국은 20대 여성(35.9%)의 부채 부담이 가장 컸다. 반면 한국의 20대 중 '빚이 없다'고 답한 비율은 49.5%로, 조사 대상 10개국 중 가장 높았다. 대학에 입학한 후 학자금대출 등을 받으며 자립(自立)의 길에 들어서는 다른 나라 청년들과 달리 한국 젊은이 중 상당수가 20대가 되어서도 부모에 의존해야 하는 상황임을 드러낸다.

전통적인 가치관 아래 평생 가족을 보살피는 데 힘써온 한국의 50대 여성은 가족에 대한 애정과 피로감을 동시에 드러냈다. 그들에게 가족은 대체로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74.1%)이었지만 '필요에 의해 같은 공간에서 생활하는 사람들' '인생의 큰 부담'이라는 답이 한국인 평균을 웃돌았다. 특히 필요 때문에 가족과 같이 산다는 답은 전체 평균(1.4%)의 3배(5.6%)가 넘었다. 같은 세대의 남성 중엔 이 답이 한 명도 나오지 않았다. 이화여대 사회복지전문대학원 김미혜 교수는 "한국의 50대 여성은 전형적인 샌드위치 세대"라며 "보수적인 부모 아래서 자라 여성이라는 이유로 가족을 위해 많은 것을 희생하고서도, 정작 다음 자녀들에게는 자신의 노력에 대한 보상을 기대하기 어렵다는 박탈감에 빠져 있다"고 말했다.

◆"마음 수행 위한 종교 활동" 한국 50대 여성 78% vs 덴마크 11%

한국의 중년 여성은 삶의 위안을 종교에서 찾으려는 성향이 강했다. '마음의 안정을 얻기 위해 종교를 가졌다'는 비율이 77.8%로 평균(61.8%)을 크게 웃돌았다. '50대 한국 여성'은 전 세계에서 이 답이 가장 많이 나온 집단으로, 덴마크·호주·미국에선 같은 질문에 대한 답이 각각 10.6%·22.4%·45.8% 수준이었다. 종교의 본질인 '진정한 믿음'을 좇는 50대 여성은 7.4%에 불과했다. 영국 필로소퍼스 매거진 줄리언 바지니 편집장은 "종교를 종교 자체로 믿는 사람은 높은 행복감을 보이지만, 현실 탈피를 위한 도구로 종교를 활용할 경우 행복감은 거의 상승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한국인이 아이를 낳지 않는 이유에 대해서도 50대 여성은 다른 세대와 동떨어진 답을 냈다. 한국인이 가장 큰 이유로 꼽았던 '경제적 부담'에 대한 답은 평균(52.6%)보다 낮게(48.1%) 나왔다. 대신 '살기 어렵고 고통스러운 세상에 아이를 태어나게 하고 싶지 않다'는 염세적 의견(20.4%)이 압도적으로 높았다.

고려대 사회학과 김윤태 교수는 "선진국의 50대 여성들은 자녀가 성인이 되는 순간 '가뿐하다'는 기분으로 그동안 누리지 못했던 개인의 취미 생활을 즐기는 것이 보통"이라며 "반면 한국의 중년 여성 중 대다수는 남편의 고용 불안, 자녀 결혼 자금 마련 등 가족이라는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상태"라고 말했다.

출처 http://news.chosun.com/

A River Runs Through It (based on the novel by Norman Maclean)
역저 2002(c)BongheeLee

출판사 사장님을 설득해서 처음으로 영화교재에 영화해설(<관람석에서>라는 부록을 뒤에 첨가하자고 설득해서)을 실은 책이다.

그 이후 그 출판사의 교재에는 해설이 함께 나오게 되었다.
우연히 다른 책을 검색하다가 내가 편집하고 번역해서 낸 이책에
역자가 낸 다른 책이란 소개에 내 책은 하나도 없고 엉뚱한 동명이인의 다른 사람의 책이 올라와 있어서 경악했던 기억이 난다.  참, 무책임한 인터넷이고 알라딘이다....

흰수염고래라는 분이 interpark에 쓴 리뷰다. ^^
영화평을 행복하게 읽으셨다니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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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번도 똑같은 물결인 적이 없는 "흐름"앞에 나약한 작은 인간으로 서서 한결같은 인내와 희망과 겸손함과 훈련된 절제력으로 
그리고 더 나아가서는 예술가적 직관으로 예측불허인 고기와의 해후를 기다리듯이 우리는 흐르는 인생가운데서 그 의미와 수수께끼의 답과 만나기를 기다리는지 모른다.
부록 : 이봉희교수의 <관람석에서> 중에서 

보는 순간 ’혁명적’으로 다가오는 영화가 있는 반면, 어떤 영화는 의식하지 못한 가슴 한구석에 몰래 씨앗을 뿌린다. 그리고 순식간에 바오밥나무 급으로 자라며 몸과 영혼을 송두리째 먹어버리고 만다. 대학 신입생 시절 교수님 추천으로 만난 영화 <흐르는 강물처럼>이 그런 감정을 경험하게 해준 첫 영화였는데. 그 후 영화 보는 시각이 달라졌음은 두 말할 것 없다. 
....................
결국, 대학 시절에 결코 쓰지 않을 낚시 용어만 마구 외우다가 끝났던 풋풋한 추억이지만. 영화도 역시 타이밍이 중요한가보다. 어느 잠이 오지 않던 밤. 새벽에 이 책을 지분거리다가 부록이자 번역을 하신 이봉희 교수의 글을 보며  서늘하고도 뜨거운 바람을 맛봤다. 정전하고 누운 고요한 방에서 내 심장소리가 들렸던듯 하다.

몇 년 동안 스크린 영어사도 발전을 하며, 테이프 대신 MP3 CD를 제공하고, 종이 질도 빳빳해지고, 흑백인쇄에서 컬러인쇄로 업그레이드 되고. 몇 년의 물가 상승을 반영하듯 3000원 정도 가격이 인상되었는데. 그 전보다 영화 분석 면에서 ’촌철감동’을 느끼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여전히 이 영화와 대본을 보면 울컥하는 감정, 부록을 읽던 새벽이 고스란히 기억에 남는다. 아마도, 파란 봄의 한 자락이 기록되었기 때문이리라. (coolcat** 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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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이 영화수업 후 형제간의 문제 해결을 받은 상담전공 대학원선생님도 있다.^^
문학은 정말 예측할 수 없는 치료적 힘이 있다.
2002년 번역하고 편집한 역저서였는데 재판을 찍으면서 어느새 편집부 저, 이봉희 역이라고 맘대로 바꾸었네.
편집부에서 무얼 저술했단 말이지?  참 답답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