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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arriage Proposal by Chekhov

러시아의 위대한 작가 안톤 체홉의 “청혼”은 소극(farce)이다. 소극(笑劇)이란 인물들을 과장되고 엉뚱하며 실제상황에서는 있음직하지 않은 우스꽝스러운 상황 속에 놓이게 하여 사건을 전개시키고 웃음을 자아내는 희극(comedy)으로 주로 일상의 생활풍속의 문제점들을 비꼬고 풍자하는 내용으로 되어있다. 대개의 경우 의도적인 말장난이나 과장된 행동들, 그리고 넌센스, 부조리함,  신분 위장 등이 포함된다.  소극 속에 그려지는 인간들은 주로 허황되고, 비이성적이며, 돈밖에 모르고, 유아스럽고, 그 행동에 목적의식이 없으며 이성적인 생각이나 절제가 없는 자동적 반응을 보인다.


이 극에는 딸을 시집보내려고 애쓰는 홀애비 지주 스테판 스테파노비치, 그의 딸 나딸리아, 그리고 같은 마을의 청년 이반 로모프가 등장한다. 나딸리아는 지나치게 극적이며, 결혼을 하지 못할까봐 두려워하고 있는 노처녀(당시는 25살이 노처녀였다)이고, 로모프는 나탈리아에게 청혼하려 온 35살의 마을 노총각으로 심약하고 건강염려증에 사로 잡혀 있는 히포콘드리아 환자이며 그로 인해 심계항진증(자주 심장이 두근거리고 떨리는 증상)을 앓고 있다. 안톤 체홉은 잘 알려진 대로 의사이면서 작가이다.  그의 의학 지식은 인간의 우스꽝스런 일면을 병적 증세로 파악하여 생생하게 그리는데 도움을 주고 있다. 


"청혼"은 결혼이라는 주제, 그리고 결혼을 위한 청혼의 과정을 부조리하고 우스꽝스럽게 그려보여 줌으로써 그 과정에 나타난 사람들이 본성과 위선, 사회와 전통의 결혼에 대한 문제점을  희극적으로 그러나 날카롭게 풍자하고 있다. 결혼에 필요한 경제적인 문제와 두 사람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 사이의 균형을 맞추기 위한 갈등과 투쟁, 특히 등장인물들이 결혼을 하고자 하는 결사적인 노력이 시종일관 희극적으로 그려진다. 


체홉의 시대에 러시아에서는 결혼은 사랑하는 사람들이 하나의 가정을 이루는 만남이기보다는 경제적인 안정을 위한 하나의 절실한 수단이었다. 사람들은 부와 재산, 그리고 사회적 지위를 얻기 위해서 결혼하였다. 이 극의 두 남녀는 결혼을 간절히 원하면서도 작은 풀밭 (Oxen Meadows)의 소유권이나 가족과 조상들 이야기, 아니면 Guess와 Squeezer라 불리는 개처럼 아무것도 아닌 작은 일에 목숨이라도 건 듯 바보 같은 논쟁을 벌이느라 정작 청혼의 기회는 번번히 놓치고 두 사람이 그렇게 원하는 혼인은 이루어질 길이 보이지 않는다.  체홉은 이런 바보스런 남녀의 행위에 초점을 맞춰 확대하여 보여줌으로써 물질주의적, 그리고 계약적 결혼제도를 날카롭게 풍자하고 있다.


극에 나타난 결혼 풍속도는 오늘날 우리사회의 결혼풍속도와도 크게 다르지 않다. 결혼의 진정한 의미는 무엇일까? 연극 속 인물들을 향해 맘껏 웃어주다가 그 속에 비친 우리의 모습을 생각해 보게 된다.  그 뿐 아니라 상징적으로 결혼 상대처럼 ‘내가 간절히 원하는 무엇’을 얻기 위해 내가 ‘구애하는’ 과정은 어떤 우스꽝스럽고 부조리한 모습을 띄고 있는지 한 번 생각해보라고 이 연극은 말해주고 있다.(©2010 bhlee/ 정확한 출처나 허락없이 일부 혹은 전부를 사용할 수 없음)

작렬하는 태양은 불모의 겨울과 닮아있다.
태양이 아우성치는 여름, 나는 불모의 겨울, 그 차가운 침묵을 앓는다.

photo by bhlee


Memory

You have the key.

-T. S. Eliot

010301080131
불모의 시간

2010. 제 2차 인문치료국제학술대회, Life, Happiness and Humanities Therapy (7/9-10) 강원대학교
S. Reiter-BongheeLee-J. Fox



 

*내 글을 잘 공개하지 않는데 다른 사람들에게 공개된 것이어서 여기에 실어봅니다.


글: 이봉희 (미국공인문학치료전문가 CPT/공인저널치료전문가  CJT/ 상담심리사)

-문체부 문예위원회 웹진 아르코(webzine arko) 기획연재: 예술치유 (문학치유편)

내 안의 간절한 목소리를 찾아주는 문학치료
글 : 이봉희 (현 미국공인문학치료전문가(CPT) /공인저널치료전문가(CJT)/상담심리사
all rights reserved. cannot be reproduced without permission(저작권이 있는 글이므로 인용할 경우 반드시 출처를 정확히 밝혀주십시오.)
 

어떻게 하면 우리는 인간이 존재한 이래 계속되어 온 그 오랜 신화를 잊을 수 있을까요? 마지막에 공주로 변하는 용에 대한 수많은 신화를. 어쩌면 우리 삶 속의 모든 용들은 우리를 만나기 위해 기다리고 있는, 한때는 아름답고 용감했던 공주였는지 모릅니다.
어쩌면 모든 끔찍스런 것들은 우리 존재의 깊은 곳에서 우리의 도움을 간절히 기다리고 있는, 스스로는 어찌할 수 없는 그 어떤 것인지 모릅니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

문학치료는 내 안에서 도움을 청하는 아름답고 용감한 그 무엇의 간절한 목소리를 찾아주는 일이다. 내 안의 나의 모습이 때로는 내가 원치 않는 피투성이의 모습이거나, 용처럼 끔직스런 모습일 수도 있다. 내 스스로 미로 속에 깊이 가둬둔 반인반수 미노타우로스처럼 나의 어둡고 고통스런 과거이거나 내면의 모습일 수도, 아니면 이카로스나 디달로스 같은 창조적 힘과 자유에의 욕망일 수도 있다. 그런 나의 모습이야말로 스스로는 어찌할 수 없어서 나의 도움을 간절히 기다리고 있는 진정한 "나"인지 모른다.
문학치료란 영어로는 포이트리테라피(Poetry Therapy), 비블리오테라피(Bibliotherapy), 저널테라피(Journal Therapy)를 모두 포함한 말로 참여자와 치료사 사이의 치료적 상호작용을 위해 문학과 글쓰기를 사용하는 것을 말한다. 다시 말하면 문학치료는 문학과 참여자(내담자)와 훈련받은 문학치료사/촉진자 간에 이루어지는 상호작용으로, 참여자에게 문제에 접근하는 새로운 방법을 배울 수 있게 하고, 또 다른 관점에서 그 문제를 생각할 수 있는 통찰력을 제공하여 줌으로써, 궁극적으로는 올바른 자아인식에 이르게 하는 “과정”이다. 이 과정에서 치료사(촉진자)는 참여자/그룹의 성격과 치료목표에 따라 선별한 여러 형태의 문학을 촉매로 치료적 대화와 토론을 사용하여 참여자의 통찰과 성장과 문제해결을 돕는다.
문학치료에서 말하는 ‘문학’은 여러 장르의 상상의 문학, 이야기, 신문기사, 노랫말, 연극, 시, 영화, 비디오, TV드라마, 일기 등 생각과 느낌을 이끌어내기 위해 사용될 수 있는 언어를 표현매체로 사용한 광의의 문학을 말한다. 문학은 치료를 위한 촉매의 역할을 하게 되며 치료 경험은 문학치료사, 시인, 또는 시/문학치료의 수련을 거친 전문가의 ‘촉진’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예술로서의 문학의 초점이 문학 자체에 있다면 문학치료에서 사용하는 문학은 예술적/문학적 가치나 위대함이 아니라 깨달음과 자아발견을 위한 도구로서의 가치에 중점을 둔다. 문학 치료를 위해 선택되는 문학은 사람들이 ‘같은 배를 탄’ 다른 사람들과 만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에 ‘보편적인 진실’을 담고 있으면서도 마음속 깊은 곳에 숨어 있는 목소리를 이끌어내기 위해서는 진부해서는 안 된다.
문학 치료 프로그램 중 참여자는 시, 저널(일기), 콜라주나 그림을 그리고 글쓰기 등을 하는데 이때 참여자가 쓴 글이 잘 썼는지 예술성이 있는지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오직 그 과정에서 일어나는 ‘아하!’의 순간, 뜻밖의 깨달음이나 자기 성찰이다.(많은 분들이 ‘나는 글을 못 써요.’ ‘문학은 잘 몰라요.’ ‘시는 어려워서 읽기도 겁나요.’라고 염려하거나 반대로 ‘나는 시인이에요.’ ‘수필가예요.’라고 말하는데 문학 치료와 소위 말하는 ‘글쓰기 재능’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오히려 글쓰기나 문학을 두려워하던 많은 분들이 자신이 쓴 글, 즉 자신 속에 숨어있는 시인을 만나고 놀라게 된다.)
| 문학치료의 역사


고대 테베의 도서관 정문에는 "영혼을 치유하는 곳"이라는 글이 걸려 있었고 스위스의 한 중세 대수도원 도서관에도 "영혼을 위한 약상자"라는 의미의 글이 새겨져있었다. 이것은 고대로부터 문학이 가지는 치유의 기능을 보여주고 있다. 치료와 성장을 위해 시와 노래가 쓰인 예는 이미 원시인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종교적 제의에서 무당이나 제사장들은 개인이나 부족의 건강과 안위를 위해서 시나 노래를 읊었다. 고대 이집트에서는 최대한 즉각적인 효과를 위해 파피루스에 글을 써서 그것을 물(액체)에 녹여서 환자가 마시게 하기도 하였다. 기원전 1030년경에는 다윗이라는 소년의 시와 음악이 사울 왕 속의 “야수”를 잠재우기도 하였다. 의술과 예술이 서로 밀접한 관련이 있음은 신화 속 아폴로 신이 의신(醫神)이면서 동시에 시/예술의 신인 것을 봐도 알 수 있으며 테살리 지역의 의사로서 명성이 높았다는 아스클레피우스는 아폴론의 아들이라는 신화가 만들어지기도 했다. 또한 신화에 보면 오세아누스는 프로메테우스에게 ‘말은 병든 마음을 치료해주는 의사’라고 말한다.
프로이드는 “무의식의 세계를 발견한 사람은 내가 아니라 시인”이라고 했고 심리극(싸이코 드라마)이라는 용어에 이어 심리시(싸이코 포이트리)라는 용어도 생기게 되었으며 1960년대에 오면 집단 심리치료의 발달과 더불어 심리치료사들이 시치료를 함께 사용하기 시작하면서 점차 문학치료는 재활, 교육, 예술창작, 상담, 심리치료 등의 분야에서 전문가들에 의해 부흥하기 시작하였다.
최근 들어 정신의학전문가들은 첫째, 문학(시)의 환기작용과 둘째, 글쓰기의 힘이라는 문학의 치료적 힘을 확인하여주었다. 문학, 특히 시는 그것을 읽는 사람의 내면에서 연상 작용을 일으키고 의식적 무의식적 기억과 생각을 환기시켜 이끌어 내는 강렬한 힘이 있다는 것이다.  또한 내담자가 다른 사람이 쓴 문학(시)에 대한 개인적 반응을 글로 쓰든 아니면 자신만의 경험과 감정을 글로 쓰든 글쓰기가 놀라운 치료의 힘이 있음을 인정한 것이다.

| 문학치료의 목적

문학치료의 궁극적인 목적은 그것이 자기개발을 위한 문학치료이든 임상적 문학치료이든 환자/참여자의 자아 존중감의 회복과 향상, 그리고 사기진작에 있다. 참여자의 전인적 성장을 도와서 자신을 너그럽게 수용하고 보다 아름답게 자신을 개발하며  변화될 수 없는 현실과 실존적 상황에 보다 창의적으로 대처하게 함으로써 내재된 갈등을 해소할 수 있는 내적 능력과 적응기능을 증진시키는 것이다. 에리히 프롬이 주장하듯이 자신에 대한 사랑은 자신에 대한 존경과 관심과 책임, 그리고 올바른 이해를 바탕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또한 자신을 진정 먼저 사랑하지 않고는 결코 타인에 대한 사랑은 불가능하다.
문학치료는 인간관계에 대한 이해와 깨달음을 증진시킨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 시인 존 던의 말대로 “그 누구도 섬이 아니다.” 그 누구도 타인들과의 관계 속에서의 자신을 이해하지 않고는 자신을 바로 이해할 수 없다. 이것은 마틴 부버의 말을 빌리면, “만남을 통한 치유”를 이루는 것으로 특히 그룹/집단 문학치료 모임의 토론을 통해 더 잘 이루어질 수 있다.
문학치료는 더 나아가 현실을 직면하며 그에 근거한 사고를 하도록 돕는다. 문학치료는 참여자들에게 ‘실존적 문제’를 직면하도록 돕는다. 실존적 문제란 예를 들어 “삶은 때로 불공평하고 불공정하다, 고통과 죽음으로부터의 탈출구는 없다. 아무리 타인과 친밀할지라도 나의 삶은 여전히 내 홀로 직면해야한다. 나는 나의 삶과 죽음의 문제를 직면해야한다. 따라서 보다 정직하게 살아야하며 사소한 일에 얽매여선 안 된다. 타인들의 도움과 인도와 무관히 내 삶의 방식에 대한 궁극적인 책임은 내가 져야한다”와 같이 우리가 보다 성숙하게 직면하고 포용해야하는 실존적 한계상황을 말한다.
이러한 궁극적 목표를 이루는 과정에서 문학치료는 의사소통 능력을 강화하여 관계의 문제를 해결하고, 창의적 자아를 개발하며, 격렬한 감정들을 털어놓고 스트레스를 해소함으로써 긴장을 완화시키고, 새로운 생각, 통찰, 또는 정보들을 통하여 새로운 의미를 발견하며, 자유롭고 풍성하고 유익한 미의 가치를 체험하도록 하여 삶의 질을 향상시킨다.

| 나를 찾기 위해서는 낯선 자를 찾아가라

“나를 찾기 위해서는 낯선 사람을 찾아가라”는 말이 있다. 우리들 속에 있는 보물을 뜻밖에 “낯선 사람들”을 통해서 찾는 경우가 종종 있다.

어떤 마을에 사는 현자가 3번의 꿈을 꾸었다. 꿈에서 천사가 나타나 이웃마을로 가라고 지시하면서 그곳에 가면 성문 앞, 다리 근처에 보물이 있다고 말해주었다. 그 현자는 이웃 마을에 도착해서 성의 파수병에게 그 이야기를 해주었다. 그런데 그 파수병은 자신도 꿈을 꾸었다는 것이다. 그의 꿈에서도 천사가 나타났는데 그에게는 바로 현자의 집으로 가면 그 집안 벽난로 앞에 보물이 숨겨져 있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그 말을 듣고 현자는 급히 집으로 돌아가서 벽난로 앞을 파보았더니 그 곳에 보물이 있었다.

이 이야기는 여러 의미에서 문학치료의 진수를 요약하고 있다. “낯선 사람”은 일차적으로 문학치료가 사용하는 도구인 문학을 의미하며, 또한 문학치료사/촉진자이다. 치료사는 또 다른 “타인들” 즉 치료그룹의 참여자들과 함께 보물을 찾는 일이 용이하도록 도와준다.  이 예화에는 중요한 사실이 하나 더 드러나 있는데 바로 자신의 집에 보물이 있었다는 점이다. 이 때 ‘보물’은 진정한 자아인식을 말하는 것으로 즉 치료란 바로 나 자신에게서 이루어지는 것으로 그 초점이 외부의 상황의 변화가 아니라 나의 인식의 변화와 자아의 발견과 성장, 확대에서 이루어지는 것임을 말해주고 있다.
사진:두려움앞에서 한없이 작아지는 나를 표현한 그림일기(11세 남자아이)   시인 로버트 프로스트도 “시는 즐거움으로 시작해서 지혜로움으로 끝난다. 시의 일차적 기쁨은 내가 이미 알고 있다는 사실을 미처 알지 못했음을 기억하는 놀라움에 있다.”고 말한다. 즐거움으로 시작해서 지혜로움으로 이끌며, 그 과정은 외부에서 주어지는 것이라기보다는 참여자 스스로가 찾아가도록 돕는 것이 문학/시라는 이 말 속에 문학 치료의 과정과 효과가 단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다른 측면에서 보면 위에 인용한 설화에서 "낯선 사람"을 찾아간다는 것은 문학/예술이 제시하는 "새로운 시각"의 세계로 들어간다는 것을 의미하는 상징이다. 우리의 눈은 영국 시인 코울리지의 말대로 "낯익음과 이기적 근심걱정의 막"에 가리어져 있어서 세계의 경이로움과 아름다움 앞에 "눈이 있으되 보지 못하고 귀가 있으되 듣지 못하고 마음이 있으되 느끼지도 이해하지도 못한다." 이 막은 우리의 눈, 즉 판단력을 흐리게 할 뿐 아니라 구태의연한 습관성 때문에 통찰력이 무디어지고 자동화되어서 자동기계나 도식성으로 살아가게 만드는 것이다. 따라서 문학과 예술은 그 막을 거두어 새로운 시각을 보여주어야 하며 이것이 문학의 “낯설게 하기" 효과로 문학치료 참여자에게 자신의 문제를 새롭게 바라보게 해준다.◀ 두려움앞에서 한없이 작아지는 나를 표현한 그림일기(11세 남자아이)

요슈타인 가아더는『소피의 세계』에서 철학하는 유일한 능력은 “놀라워할 줄 아는 능력”이라고 했다.  문학은 우리의 삶의 사소하고 작은 일상에서 경이로움과 즐거움에 놀라워 할 줄 아는 능력을 다시 회복시켜주고 개발해준다. 이러한 능력의 회복은 자아성찰로 이끌 뿐 아니라 더 나아가 더 심오한 정신과 영적인 경이로움인 믿음, 신뢰, 우정, 사랑, 아름다움, 등을 깨달을 수 있도록 우리의 통찰력을 깨우쳐주게 된다. 아름다움이 인식되는 곳에서는 자아의 완성이 이루어진다는 말이 있다. 이 때 개개인은 산타야나가 말하듯 “자아의 속박”에서 잠시라도 해방되는 자유를 누리는 것이다.문학의 신선한 시각은 고착되고 습관화된 사고에 새로운 눈을 부여하게 되며, 우리의 건강하고 창조적인 상상력을 유발시켜준다. 상상력이 없다면 우리는 시공간의 감옥에 갇혀 살 수 밖에 없는 수인(囚人)과 같다. “지금 이 순간”과 “지금 이 장소”로부터 자유로이 해방되기 위해서는 상상력이 필요하다. 우리는 상상 속에서 “언어를 통해” 자유롭게 무한한 세계로 탐험하고 새로운 진실들을 발견하며 결국 현실 속 우리자신과 세계의 의미를 재발견할 수 있다.

| 시적(詩的) 요소들의 치료적 원리

문학이 내면의 진실을 환기시키고 감정의 공감과 해방을 통한 정화를 가져올 수 있도록 하는 데는 문학이 지닌 시적 요소들이 우리 정서에 미치는 영향력 때문이며 따라서 문학의 시적 요소들이 문학치료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문학, 특히 시의 힘은 주로 이미지(심상)를 통해서 마음의 눈으로 보는 데서 온다. 심상은 꿈과 무의식의 언어이며 그렇기에 무의식적 자료들을 의식세계로 불러오는 촉매역할을 한다. 우리의 심리는 내적인 심상의 자극과 표현에 의해서 발달, 성숙해져간다. 자아인식은 문학, 연극, 움직임(춤), 소리(음악), 글쓰기, 말하기, 그림그리기, 조형물 만들기 등을 통해 나타나는 여러 이미지를 탐구하면서 이루어진다. 이미지는 가능함과 불가능함, 실현가능한 꿈과 욕망하는 것 사이의 모순을 끌어안는다.
은유와 상징이 가장 풍성한 것은 시라고 볼 수 있다. 심상은 사람들에게 어떻게 그들의 창조적 상상력을 발휘할 수 있는지 가르쳐주며 우리 속의 숨은 원동력을 일깨워서 역기능요소들을 해소하고 변화를 촉구한다. 프로이드는 시인을 “전문적으로 백일몽을 꾸는 사람”라고 말하면서 꿈과 시의 유사함에 주목하였다. 그는 “무의식의 세계를 발견하는 사람은 내가 아니라 시인이다. 마음은 시를 짓은 기관이다”라고도 말하여서 무의식의 세계를 드러내는 시의 역할을 강조하고 있다. 꿈과 시는 심상, 전이(치환), 압축 등과 같은 동일한 심리학기제를 사용한다.  
시의 섬세하고 미묘함은 참여자에게 거부감 없이 다가갈 수 있다. 참여자나 그룹의 성격에 맞는 신중하게 선택된 시를 소개함으로써 문학치료사는 그 치료세션의 토론주제를 소개하게 된다. 만일 그 집단이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지 않다면 그것을 회피할 것이다. 그러나 시의 섬세함 때문에 그 저항도 부드럽게 이루어지게 된다. 따라서 문학을 “매개”로 사용하지 않는 다른 치료와 달리 위협적이거나 거부감이 덜하여서 일반 전통적인 상담이나 치료를 거부하는 사람도 문학치료에는 기꺼이 참여하는 경우가 있다.
페리 롱고는 시를 읽고 쓰는 것은 “나”를 정의하도록 도와줄 뿐 아니라“나”를 강화시켜준다고 말한다.  나를 강화시키는 것은 세상의 일원으로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한 것이다. 고통 받는 사람들에게 가장 큰 위로중 하나는 나만 혼자 그런 일을 겪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다. 우리가 이 광대한 세계에 단절된 혼자가 아니며 이 세계의 모든 존재들에 연결되어있고 융화되어 있음을 느끼는 것은 자아 존중심을 키워주게 된다.
   
  ▲ (c) BongheeLee
두팔로 햇빛을 막아줄게 울어보렴 목놓아
울어나 보렴 (이용악)

아리스토텔레스의 정화(카타르시스)이론은 그 과정에 정서의 통제와 분출을 모두 포함한다. 문학치료는 정서적공감과 분출을 통해 워즈워즈가 “내게 찾아온 건 오직 슬픈 생각 뿐/ 때맞춰 그 슬픔을 말하니 그 생각 사라지고/ 나는 다시 건강해졌네”라고 노래한 것처럼 치료적 체험으로 이끄는 것이다. 시인 하이네도 “병은 모든 창조적 욕구의 궁극적 근거/ 창조하면서 나는 회복될 수 있었고/ 창조하면서 나는 건강해졌네.”라고 말하여서 문학치료의 카타르시스적 의미를 확인해준다.
또한 시는 은유를 사용하기 때문에 사람들이 다른 방법으로는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할 수 있게 해준다. 참여자(내담자)는 시 쓰기를 통해 산문 쓰기에서 표현할 수 없는 자신의 문제들을 표출하게 됨으로써 문학치료 세션은 참여자/내담자가 수치스럽거나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는 첫 발걸음이 될 수 있다. 문학치료사는 죽음, 상실, 이별, 외로움, 고독, 등과 같은 개인의 “실존적” 관심사들에 말을 건넬 수 있는 광범위한 문학을 찾아내어 사용한다. 이러한 주제들은 일반적으로는 금기시 되어있지만 문학치료세션에서는 가까이 다다가 살펴볼 수 있다. 시는 다양한 층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드러내면서도 감추는 이런 시의 능력은 바로 참여자가 자신을 비난받지 않고 감추어 드러낼 수 있는 자유를 누리게 해준다.
사진:(c) bonghee-Lee 차라리 침묵하라(c) BongheeLee 차라리 침묵하라   분노나 슬픔 같은 감정들이 표현되지 않거나 억압되어 있으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대신 육체적, 정신적인 부정적 증상으로 우리 안에 남게 된다. 감정은 라틴어의 ‘흐르다’는 말에서 나왔다. 캐슬린 애덤스를 비롯한 여러 저널치료(글쓰기치료) 전문가들은 감정(이모션 emotion)은 좋고 나쁜 윤리적인 것이 아니라 “움직이는 에너지(에너지 인 모션Energy in Motion),” 즉 E(이)-모션 일 뿐이므로 억압할 것이 아니라 표현해서 해소시켜야 한다고 말한다. 심리학자인 페니베이커 교수도 우리가 경험한 심리적 외상(트라우마)의 심각성 자체보다는 그것을 억압하고 털어놓지 못하는 데서 정신적 육체적 건강상의 질병이 초래된다고 말한다. 영국시인 바이런의 말처럼 시는 감정 뿐 아니라“상상력의 용암이기에 지진을 막기 위해서는 분출되어야”한다. 시를 읽고 쓰는 과정은 용암처럼 폭발 잠재력을 가진 심리적인 에너지가 분출될 수 있는 안전한 출구를 제공하는 것이며 그럼으로써 심리적인 균형과 건강을 회복시켜준다. 또한 시는 미묘하고 다양한 층의 의미를 포함하고 있기는 하지만 동시에 감정을 솔직히 드러내기도 하는데 이 솔직성이 사람들로 하여금 어려운 문제를 탐색하도록 도와준다. 참여자가 시인, 또는 같은 동료 참여자가 진솔한 이야기를 털어놓는 것을 듣게 되면 그들도 부담 없이 자신의 문제를 털어놓게 되는 것이다.

특히 참여자가 내적 느낌을 시나 저널(일기)처럼 글로 쓰는 것은 그 이전에 형태가 없었던 느낌과 생각들을 흰 종이 위에 흑색글씨로 외면화하는 것이다. 이 구체화작업은 참여자로 하여금 자신이 문제를 통제하고 있다는 느낌을 갖게 해줄 뿐 아니라 글쓴이가 자신의 생각을 새로운 관점에서 바라보게 해준다. 문학치료의 정의 속에 저널치료(journal therapy)를 적극적으로 포함시켜 글쓰기치료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글쓰기치료는 다음 소개될 예정임)

| 나는 어떤 시가 될 것인가?

프로이드는 우리의 정신이 시를 짓은 기관이라고 말하면서 또한 우리 각자 속에는 시인이 살고 있어서 이 세상에서 인류가 멸망하는 날 마지막 시인도 사라질 것이라고 말했다. 도종환 시인은 프로이드를 인용하면서 “내 안의 시인”이라는 시에서 “모든 사람의 가슴속에는 시인이 살고 있었다는데/ 그 시인 언제 나를 떠난 것일까"라고 묻고 있다. 문학치료에서 말하는 참자아의 발견이란 또 다른 의미로 우리 속의 놀라운 아이(Wonderful Child)로 대변되는 창조적 자아의 발견이다. 이 참 자아는 프로이드가 말하는 내 안에 존재하는 “시인”이라 볼 수 있다. “치료사가 맨 먼저 해야 할 일은 사람들 속의 시와 작업하는 것이다. 그들과 함께 일할 때 그들 내면의 시가 우리를 인도하도록 하면 치료사의 일을 바르게 해낼 수 있을 것이다” 는 파프의 말도 프로이드의 말을 상기시킨다.   사진: "이 연필 안에 말들이 웅크리고 숨어있다." 시읽고 시쓰기(30대 직장여성)
  "이 연필 안에 말들이 웅크리고 숨어있다." 시읽고 시쓰기(30대 직장여성)

하지만 필자는 우리 각자가 하나의 시(詩)라고 생각한다. 우리 각자는 해석, 또는 번역되어야 할 고유의 언어이며, 시이며, 상징이며 암호이다.  오해라는 말이 해석의 오류를 뜻하듯이 사람사이의 소통은 타인의 언어, 즉 시(詩)로서의 타인을 이해하고 의미를 부여하고 번역하는 일이기도 하다. 우리는 누구나 각자의 안경과 시선을 가지고 있다고 흔히 말한다. 그 뿐 아니라 우리는 각자 자신의 사전을 가지고 있어서 그것으로 상대의 말을 해석/번역한다. 영어표현에 “나는 당신과 다른 언어를 쓰고 있습니다(I don't speak your language.)"라는 말은 많은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가끔은 세상에 ”나를 함부로 번역하지 말라, 당신의 언어로 나를 정의내리지 말라”(이봉희 시,"나를 함부로 번역하지 말라" 중에서)고 외치고 싶을 때가 있다. 이탈리아 극작가 피란델로의 말대로 누군가를 정의내림은 살인행위이며, 노자의 말대로 무엇인가 명명될 수 있다면 그 이름은 더 이상 그것의 영원한 이름이 아닌지도 모른다(名可名非常名).  그렇기에 문학은 우리에게 시(정의 내릴 수 없는, 물질화 될 수 없는 모든 인간과 세상의 정신적, 영적 존재가치를 상징하는)의 가치에 대한 끝없는 도전을 던지는 것이다.

“오, 나여, 삶이여, 수없이 던지는 이 의문/ 믿음 없는 자들로 이어지는 도시/ 바보들로 넘쳐흐르는 도시 /어디서 아름다움을 찾을까? /오 나여, 오 생명이여!" (휘트먼)
대답은 오직 하나ㅡ네가 거기 존재한다는 것. 생명과 너의 존재가 여기 있다는 것. 인생이라는 놀라운 연극이 계속되고 있고 너 또한 그 연극에 한 편의 시가 된다는 것. 놀라운 연극은 계속되고 너 또한 그 연극에 한편의 시가 된다는 것…자, 너의 시는 어떤 것이 될까?” (톰 슐만, <죽은 시인의 사회>)

나는 과연 어떤 시일까?  끊임없이 계속되는 강렬하고 놀라운 인생이라는 연극에서 나의 시는 어떤 것이 되어야할까?

| 모두가 병들었는데 아무도 아프지 않았다

릴케가『말테의 수기』에서 말하듯 세상은 거대한 병원인지 모른다. 실존적으로 불완전한 인간들은 모두 이런 저런 의미에서 어떤 질병이든 병에 걸려있거나, 또는 잠재적인 환자이기 때문이다. “모두가 병들었는데 아무도 아프지 않았다”(‘그날’ 중)는 이성복 시인의 말대로 실존적으로 불완전한 존재인 인간들은 다만 병이 들고도 그것을 인식하지 못하거나 스스로 외면하고 살아갈 뿐이다. 어쩌면 사람들은 악하기 이전에 깊이 병든 상태라고 말하는 것이 옳을지 모른다.
신체적 질병과 달리 눈에 보이지 않는 정신적 심리적 상처와 감정적 격변을 겪은 이후의 후유증 등은 거의 전문적인 도움이나 보상을 받지 못하는 것이 우리나라의 실정이다. 심지어 전문가의 도움이 절실한 경우라도 본인 뿐 아니라 가족들이 그 도움을 받는 일 자체를 가족의 수치심으로 생각하는 경우도 빈번하다. 이렇게 상담문화가 보편화 되어있지 않은 우리나라의 현실에서, 그리고 정신적 스트레스나 트라우마(심리적 외상)가 진지한 관심과 상담, 그리고 치료를 받아야 할 질병의 하나라는 사회적 인식이 확산되지 못한 환경에서 문학/예술이 본래의 기능과 가치인 치료적 힘을 회복하는 일은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시대적 요청이다. 문장끝


※ 다음 호에는 문학치료 중 글쓰기치료(저널치료)에 대한 글이 연재됩니다.
http://www.arko.or.kr/home2005/bodo/sub/forest.jsp?idx=1689&pidx=1655
http://www.arko.or.kr/home2005/bodo/sub/forest.jsp?idx=1689&pidx=1667



the broken column(1944) by Frida Kahlo
(used here only for therapeutic and/or educational purposes)
프리다 칼로가 자신의 척추의 고통을 부셔지고 깨어진 기둥으로 표현한 그림으로 그녀가 평생 겪는 육체적 고통을 표현한 여러 자화상 중 하나.

"나는 병이 난 것이 아니다. 나는 산산히 부셔셨다. 그러나 내가 그림을 그리는 한 나는 행복하다. "
"나는 나 자신의 현실을 그린다. 내가 아는 것이라고는 내가 필요해서 그림을 그린다는 것이다. 나는 그저 내 머리 속을 스쳐가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그린다. 다른 생각은 없다.(I paint my own reality. The only thing I know is that I paint because I need to, and I paint whatever passes through my head without any other consideration)"
(프리다 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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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ictures are from the movie, Frida, and used only here for therapeutic and/or educational purposes)

사용자 삽입 이미지

                       발아, 날 수 있는 날개가 있다면 네가 무슨 소용있단 말인가? (발가락을 절단 한 후)

사용자 삽입 이미지

                                마지막 외출(퇴장)이  즐겁길, 그래서 다시는 돌아오지 않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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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그림을 누가 초현실주의라 하는가
이보다 더한 생생한 현실이 어디있을까?
평생 소아마비로 시작해서 사고,  32번의 수술, 병과 통증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그녀의 "적나라한 현실"을,  
눈물과 피와 고통으로 가득찬 그녀의 현실을 우리는 "초현실"이라 부른다.

 

photo by bhlee

나는 이제 나무에 기댈 줄 알게 되었다
나무에 기대어 흐느껴 울 줄 알게 되었다
나무의 그림자 속으로 천천히 걸어 들어가
나무의 그림자가 될 줄 알게 되었다


(정호승, "아버지의 나이" 중에서)

  here only for therapeutic and/or eduational purposes

어떤 그림 아래로 - P. 첼란

까마귀 뒤덮힌 보리밭 물결.
어느 하늘의 푸르름인가? 아래인가? 위인가?
영혼에서 튕겨나온 때늦은 화살.
보다 강렬한 울림. 보다 가까운 타오름. 두 개의 세계.

(출처: 고위공, <<문학과 미술의 만남>>)
photo by bhlee(@SFO)


그리운 사람,
때로 너무 생각이 간절해져서 전화조차 버거웠다면 쓸쓸히 웃을까?
보고 싶어서 컴퓨터 자판 위에 놓인 손가락들을 본다
그런데
손가락들이 봉숭아보다 더 붉어서 아프다
그리운 사람
조금씩만 서로 미워하며 살자
눈엔 술을 담고 술엔 마음을 담기로
(여림)

(c)2008 bhlee (주 1회 총 10회)
한국문화예술교육진흥원주최 한국글쓰기문학치료연구소주관 문화관광부/국민체육공단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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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이 점점 깜직하고 놀라운 글을 쓴다. 아이들이 너무 이쁘다..^^ 
여기 소개된 시는 모두 넌센스 시짓기이다. 부디 혹시 부모나 어른, 선생이 읽으신다면  맞춤법이 틀렸네, 글씨가 왜 저래, 말이 안되는 이야기네... 등 이상한 말을 하지 말아주시길 바란다.
모두 초등학교 1학년. 많은 글중에 가장 자신이 누군지 드러나지 않는 것만 모았다.
아이들과 [비밀이에요... 글쓰기치료]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누구인지 알아볼 수 있는 단서가 되는 것들은 지웠다.
사실은 마음에 감동이 되거나 찡한 이야기들이 숨어 있다.....

중고등생 10대 보다 아직 '학습된 사고방식'에 길들여지기 전의 아이들이라 너무나 글쓰기를 즐거워한다. 한 번도 빠지지 않고 '선생님 오늘은 글쓰기치료 안 해요? 너무 재미있어요"하는 아이들 때문에 방학도 없이 매주 진행하고 있다.  그래도 몇몇아이들은 자신이 하는 글쓰기, 그림그리기에 대해 '못한다... 못했다..' 등 여전히 어른들의 평가에 길들여져있는 모습을 보여주어서 마음이 안쓰럽다.  겨우 1학년인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