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Sick Rose - William Blake



오 장미여, 너는 병들었다.
울부짓는 폭풍 속
어둔 밤을 날아다니는
보이지 않는 벌레가
진홍빛 기쁨이 있는
너의 침대를 발견하여
그의 어둡고 비밀스런 사랑이
너의 삶을 파괴하는구나.

Oh rose, thou art sick;
The invisible worm
That flies in the night
In the howling storm
has found out thy bed
Of crimson joy,
And his dark secret love
Does thy life destory.


(Blake는 시인이지만 화가이기도 하다. 그의 시에 자신의 삽화를 넣곤 했다.
영국에서 공부할 때 사온 그의 삽화가 있는 시집은 나의 소중한 보물이다.)
왜 나는 나약하며 도움을 필요로 한다고 말하면 안된단 말입니까?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를 편히 쉬게 하리라.
보라. 내가 문밖에서 기다리노니

수필 [내가 그때 거기 있었다] 중에서 일부.
................중략..........


나는 때로 음악회에 가면 연주자와 악기와의 그 놀라운 교류를 바라보며 환희를 느낀다.  모든 것에서 완전히 격리된 그들만의 일치, 그리고 그 일치가 만들어 내는 음. 그들이 얼마나 서로 일치가 되어있는가가 음의 질을 좌우하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해본다. 이건 오디오로는 느낄 수 없는 즐거움과 감동이다. 무엇보다도 피아니시모 같은 소리를 낼 때 연주가들의 땀이, 정말 진한 땀이 솟는 절제된 연주는 아름다움의 극치 같다. 절제야말로 힘을 아끼는 것이 아니라 가장 큰 힘을 필요로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나는 나름대로 음악을 사랑하지만 전공자도 아니고 짝사랑이어서 어디 나가서 음악을 좋아한다는 말을 잘하지 않는다.  그래도 조심스럽게 내가 너무나 좋아하는 연주들 중의 하나를 예로 들라면 아르투르 루빈스타인의 쇼팽 피아노 협주곡을 꼽을 수 있다. 그 음악만큼 연주자와 음악이 일치된 것도 흔하지는 않을 것이다.

........... 중략............

 

요즘은 운전하면서 차 안에서 음악을 듣는 시간이 가장 행복한 시간이다. 나만의 공간, 나만의 허가받은 자유시간이 고속도로 운전이다. 특히 밤 자정이 가까운 시간 퇴근길의 고속도로에서 듣는 음악은 내가 나를 떠나 음악과 하나가 되는 환희의 순간들이다. 바흐의 무반주 첼로 조곡을 카잘스와  요요마를 기분에 따라 바꿔가며 듣는다든지, 1004번 파르티타 샤콘느를 듣거나, 아니 때로 비탈리의 샤콘느를 들을 때,  드보르작의 첼로 콘체르트를 한 음도 놓칠 수 없이 전 악장에 온전히 날 내어 맡길 때,  너무 맘이 비장한 날은 모차르트의 레퀴엠을, 특히 라크리모사(물론 이건 모차르트가 완성한 곡은 아니지만)를 들을 때, 아니면 비발디의 스타바트 마테르는 더할 나위 없이 좋고,  기분전환으로 파바로티의 성가곡, 아니면 다른 이들이 흉내 낼 수 없는 그만의 열정으로 부르는 "패션(Passion)" 이라든가, 카루소,  또는  마리아 칼라스가 아니라면 이네사 갈란테가 부른 아이다의 정결한 여신이라든가, 아니면 군둘라 야노비츠가 부르는(다른 사람은 안된다)  피가로의 결혼 3막의 아리아 "그리운 그 시절은 가고, 즐겁던 시절은 잠시 뿐"만 들어도 어떤 때는 "좋아서 죽고 싶다"는 기분이 들 정도이다. 어떻게 그 리스트를 다 열거할 수 있단 말인가. 

 

내 마음에 하루종일 음악이 흐르지 못하고 이것저것 불협화음으로 괴로울 때는 나도 올페우스처럼 지옥 같은 내 절망의 심연에 대고 "나의 에우리디체를 돌려다오"라고 한 두 번 노래했던가? 음악을 듣다가 흥분되어 하루동안의 모든 고통스러운 맘의 응어리와 피로를 다 잊었던 적도 한두 번이 아니다. 

 

그 날밤 퇴근길에도 너무 지쳐서 언제나처럼 커피를 진하게 보온병 가득 타서 비상약처럼 곁에 두고 고속도로를 운전을 하고 있었다. 우연히 FM을 틀었는데 마침 미샤 마이스키 공연 실황을 중계하고 있었다. 음악회에 가보지 못한 지 얼마나 되었을까? 음악학과 교수는 내가 CD나 테이프, FM에서 고전 음악을 듣는 것을 보면서 자기는 그런 것으로는 음악을 도저히 못 듣는다고 했던 말이 생각나지만 내겐 그것도 좋아서 좁은 운전공간에 온 우주라도 함께 곁에 있어주는 양 충만감을 느낄 때가 있다. 

그날은 반 수면상태에서 운전하면서 아무 기대도 없이 듣고 있었다. 그런데 마이스키가 연주하는 베토벤의 첼로 소나타는 차츰 나를 피로의 늪에서 끌어내어 넓은 광야로 달리게 만들고 있었다.  특히 A 장조 3번 소나타는 압권이었다. 마이스키의 저음은 놀랍고도 화려한 노크였다. 나도 돌봐주지 못한, 내 관심이 미치지도 못하는 내 깊은 가슴속 바닥까지 찾아가 노크를 해주는 기분이었다. 

그 깊은 속에서 문을 열고 릴케의 "소년"이 달려 나왔다.  나는 나도 모르게 "밤중에 야생마를 타고 달리는 소년, 나는 그런 소년이 되고 싶다"는 릴케의 시를 외우며 단숨에 말을 달리듯, 몸이 날아갈 듯 고속도로를 달려왔었다. 마이스키를 들어보긴 처음이었다. 한복을 입은 멋진 모습의 그가 신문에 화제가 되고 내한공연도 몇 번 있었지만 내가 모든 것 다 잊고 귀 막고 눈감고 일에만 매달려 살아온 지 너무 오래되었으니 그의 음반을 사겠다는 생각도 없었다. 오래 묵은 좋아하는 음악을 꺼내 듣고 또 듣는 기쁨과 달리 이렇게 뜻밖의 아름다운 인연을 만나는 기쁨은 잊을 수가 없는 감동이다. 지금 마이스키를 듣는다면 아마 그 첫 대면의 흥분을 느낄 수는 없을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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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는 모든 음악의 아다지오 악장만 들었었는데 요즘은 바뀌었다.   오늘은 스케르죠와 알레그로 악장을 듣고 싶다.  그리고는  이제 해야하는 일을 하자.  힘을 내야지...   세상의 하루가 밝아오고 나의 하루가 저물기 전에 일을 해야지.


Beethoven Cello Sonata #3 by Mischa Maisky, Martha Argerich

https://youtu.be/toGOeXfikGA

 

 

 

 





지난 글을 찾다가 우연히 발견한 글이다. 내 개인 홈페이지에서 HS학생(지금은 유학중. 아기아빠이며 전도사님이다.)과 주고 받았던 글.

2003년 9월 15일
"발가벗은 한 그루 가을 나무의 용기와 겸허로
밤새도록 밤비처럼 처절한 기도로 울 수 있게 하소서" (유안진)

hs가 다녀갔다. 온 단 말도 없이  조심스런 노크소리와 함께.
자기에게 이 가을 필요한 것이라고 하면서 이 글을 적은 책 한권을 내밀었다.

반가운 손님은 그 자체가 큰 선물이다. 예기치 못한 기쁨. 어느 시린 봄날 아침 아직 다 떠나지도 않은 겨울을 이기고 고개내민 파란 싹을 만나는 기쁨처럼 가슴이 훈훈해진다.

삶의 고달픈 여정에도 항상 길가에는 의자모양 돌이, 누운 고목이 우리를 위해 존재하고 있다. 쉬어가라고.  감사한 일이다.

쌓인 일들과  두번 다시 쳐다보기도 싫은 교정원고 앞에서 봄볕에 녹는 겨울 눈처럼 졸다가 불현듯 깨어나 hs가 주고 간 책을 들쳐본다. 내 졸음은 하고 싶지 않은 일에 대한 내 육신의 소리없는 반항임을 알기에.  어쩌면 하나같이 이렇게 아름다운 글을 쓸수 있을까? 어떻게 이들은 온실에 비친 햇살같은 따뜻함을 황야 한복판에서 일궈내어 도란도란 여성스럽게 들려줄 수 있을까?  질투심 섞인 부러움에 이번엔 또 다른 졸음이 날 마비시킨다.

난 아직 입원중이다.
내게 세상은 거대한 병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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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9. 16. by HS

세상은 거대한 병원... 어떤 병원인가요?
한 때, 세상은 거대한 정신병동이란 생각을 한 적이 있습니다.
그건 한눈에 보기에도 결벽증과 약간의 정신이상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을만한 한 아주머니를 보며 생각했던 것입니다.
어쩌면 세상에 대한 더러움을 너무나 잘 알기 때문에 우리 눈에 결벽증 환자처럼 보이는 저 아주머니가 정상일지 모른다고,
미친 세상에 우리 모두가 미쳤기 때문에 그 더러움을 모른채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른다고,
나도 미쳤기 때문에 살아가고 있는거라고...

그 때 저는 창조주란 없다고, 있어도 떠나겠다고, 벌을 내리려면 내려보시라고 반항하던,
그리고 점점 염세적으로 생각이 번지던,
그래서 늘 죽음을 염두에 두고 살던 때였습니다.
죽음이란 결국 정상인이 미친 세상에서 택하는 마지막 탈출구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아, 그러나 저는 그 때에 이미 벌을 받고 있던 것이었습니다.
눈에 보이는 형벌을 받는다는 것은 때로는 축복입니다.
옛 선지자들이 그토록 외치던 "돌이키라"는  명령에 귀를 기울일 기회를 제공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형벌인지도 모른채 형벌을 받고 있는 것은 그 얼마나 큰 형벌인지요.

너무나 감사하게도 저는 형벌을 받고 있는 상태임을 깨닫게 되었고,
그 때에 "돌이키라"는 명령을 깊이 생각했으며,
그리고 지금의 제가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또 언제든지 어두움을 택할 수 있는 유약한 존재임에는 틀림없겠지요.

이런 말씀은 드리지 못했지만,
비젼이 확고부동해야 한다는 말에 대해 동의는 하면서도
상당한 부담을 느끼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그 때처럼 염세적인 생각은 아닙니다만,
때로는 '세상은 거대한 정신병동'이란 생각이 맞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지금 내가 믿고 있는 것에 대해 나 자신은 확신을 하고 있지만,
어쩌면 신의 존재를 있다 없다 논하는 것 자체가 인간이 할 일이 아니지 않는가 싶어(다만 믿을 뿐이라는 뜻에서)
불가지론에 매력을 느끼기도 합니다.
위험한 생각인가요?

세상은 거대한 병원이라는 글귀가
지난날의 저를 생각나게 했습니다.
그리고 지금의 저를 또 생각하게 합니다.

"발가벗은 한 그루 가을 나무의 용기와 겸허로 밤새도록 밤비처럼 처절한 기도로 울 수 있게 하소서"

진정 제게 필요한 것입니다.


제가 이런 말씀 드렸던가요?
어릴 때 선생님이나, 대학에 와서 교수님이나,
그 앞에 서면 너무나 어렵고 불편한 생각만 들었었다는 것을요.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인데,
선생님은 많이 다르네요.
불편한 마음이 전혀 없다면 거짓이겠지만,
지금까지 제가 만난 다른 선생님이나 교수님들과는 많이 아니 전혀 달라요.
감사합니다.
늘 거기 계셔서 들어주시고 말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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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RE to HS
9. 17.

어둠은  밝음을 사모하기에 인식되는 어둠입니다
애통함은  나의 연약함에 대한 끊임없는 깨어있음으로 인한 절망입니다.
세상의 온갖 아픔을 바라보기에, 그들의 시기 질투 욕망 외로움 갈증 두려움 대인기피 과대망상 피해의식 맹목적인 사랑 우매함 판단과 지혜의 눈이 먼 안과질환 이기심 착각... 모든 것이 다 그들의 '아픔'이기에 그것을 바라보는 슬픔을 말하는 것입니다.  

나는 나쁜 사람입니다. 기어이 환희와  밝음과 따스한 웃음 뒤에 다시 찾아올 어둠을 너무 또렷이 찾아내고야 맙니다.  누군가의 밝음이 딛고 선 발밑에 눌린 어둠을 또 바라보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가변성과 무상함을 알면서 나도 이 땅위에 중력의 법칙 속에 얽메어 살아가는 사람이기에 바울처럼 말합니다. 내가 둘 사이에 끼었으니... 나의 원하는 바는 이곳을 떠나는 것...이지만 만일 내가 이 곳에 존재할 이유가 있어서 존재한다면, --너희에게 유익하다면-- 이곳에 있는 것이 내게 옳다는 것이지요. 그게 사나 죽으나 의미있고 유익하다는 거지요.  세상이 병원이라는 말은 나를 제외시킨 비판적인 말이 아닙니다.  나를 포함한 인간들의 "아픔"--악함이라는 궁극적인 병, 죄(허물)라는 깊은 병에서 스스로를  치유할 길 없는 그 사실을 바라보는 슬픔을 이야기 합니다. 누가 감히 아, 기쁘다 주님이 그래서 내 대신 십자가에 돌아가셨으니 나는 기쁩니다. 정말 기뻐요. 불가능이 없어요. 주님만 믿으면... 이라고 용사같은 말을 할 수 있습니까?  절대 나는 배반하지 않아요. 죽기까지 주님을 사랑합니다라고 확신했던 베드로처럼요?   우리도 주를 배반했던 베드로처럼 기껏해야 이렇게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고백할 뿐이지 않은가요?  

"네가 이 모든 것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지 주께서 아시나이다"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그렇지만  이제는 감히 맹세하듯이 큰소리 칠 수 없어요. 난 언제 또 당신을 부인할 지 몰라요. 언제 또 세상과 타협하거나 외로움에 몸을 떨며 모든 걸 포기해 버리고 싶어지거나, 나태해져서 세상을 포기한듯 우울해 질지 몰라요. 언제또 나를 괴롭히는 사람들을 저주하거나 내 알량한 선악의 판단으로 남을 정죄하며 미워할지 모릅니다. 언제 또 당신을 외면한 채 골방에서 혼자 쓰러져 꼼짝도 않고 생을 낭비할지 모릅니다.  오직 당신만이 지금 고백하는 이 사랑이 진심임을 아시며 동시에 그 "진심"이 얼마나 나약한 것인지도 아십니다.  내 고통이 무서워 그 진심을 언제 가치없는 것인양  부인할지도 아십니다. 내 진심은 그렇게 거짓으로 어느순간 변할지 모릅니다.  그렇지만 지금 할 수 있는 대답은 그리도 여전히  '사랑합니다....'입니다.  당신만이 나의 진심을 아십니다...

병들지 않는 사람이 없기에 아무도 대적할 수 없어서 --사실은 미운데, 저러면 안되는 데 하고 화가 나는데--내 속에서 늘 싸웁니다. 이것도 나의 무기력함에 대한 교묘한 합리화이면 어쩌나하고 갈등합니다.

또한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이 맘 깊이 상처를 안고 병을 앓고 살아가는 것을 보는 아픔이 너무 큽니다. 내가 해 줄 수 있는 것이 없기에. 내가 해주고 싶어도 그 도움이 그들에게는 무의미하기에.  

주님은 누구든지 나를 따르려거든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내가 지고 가는 십자가 중 가장 힘겨운 것은, 아니 가장 먼저  져야 할 십자가는 세상과 싸우는 것이 아닙니다.  나의 연약함과 별볼일 없음과 절망을 안고도 등에 지고도 포기하지 않고 날마다의 길을 또 무겁게 무겁게 발자국을 떼며 조금씩 가는 것이지요.  절망의 끝에서 희망을 갖는 것은,  내 속에 없는 그 무엇을 믿음으로 나를 "포기"하지 않고 나아가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신앙생활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한 각오가 없이는 난 언제 또 쉽사리 넘어져 버릴지 모릅니다.  난 나쁜 사람입니다.  그런 각오 없이는 하루에도 열번도 더 분통을 터뜨리거나 나를 미워하거나 남을 비난할지 모릅니다.  항상 환자복을 입고, 때로는 병든 몸위에 가장 깨끗한 의사의  가운을 입고 나와 남을 대면해야 하는 것입니다.   내가 대면하는 사람들은 모두 연약한 환자들( 나처럼) 이니까요.  사랑스럽지 않기에 오히려 더 큰 사랑을 필요로하는 사람들이 바로 나이며 우리모두이니까요.  사랑스럽지 않은 사람을 사랑하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모두들 어딘가 아파하는 사람들 아닙니까?  진정 누군가를 사랑하려고 해본 사람은  상대가 앓고 있는 병이 눈에 보일 것입니다.

올바르게 사는 것이 무엇인가  (용어를 좀 쓰자면 주님의 뜻을 이루어 드리는 삶, 더 "제도화된" "학습된" 용어를 쓰자면 주님의 영광을 위해 산다--아,  이 놀라운 두렵고 떨리는 엄청난 말을 사람들은 구구단 외듯이, 군번 외듯이 외워서  나의 존재이류라 소리높여 외치지요.--는 것이 무엇인가 아주 쬐끔이라도 매일 생각하며 산다면 )  매일아니라도 어쩌다라도 진지히 생각하며 산다면 내가 병들어 있으며 치유받아야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온전히 사랑하지 못하는 무능력이 바로 병이기 때문입니다.
구원은 사랑할 수 없고 의로울 수 없는 우리를 그것이 가능한 존재로 다시 태어나게 해주는 것 아닌가요. 이 병든 영혼으로는 사랑은 불가능하니까요. 줄 수 없을 뿐 아니라 사랑을 받는 일도 못하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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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너무 바빠서 그 후 그의 편지에 답장도 못하고, 소식을 주고 받은 지도 한참 되었다.

언젠가 내가 인천으로 특강을 가면서 버스 멀미로 거의 몸을 가눌 수 없었던 적이 있었지.
그때 용케 강의는 끝내고 HS에게 도움을 청했었다.  다시는 버스를 타고 집으로 갈 수 없을 듯해서.
그리고 그의 차를 타고 서울로 오면서  중간 중간,  하다못해 고속도로에서도 갓길에 세우고 토할 것도 없는

빈 속에서 초록색 물을 토하며 돌아왔던 기억이 난다.
그가 했던 말, 교수님도 정말 힘드시고...... 가족들도 힘드시겠어요.....  그 말이 내게 비수처럼 꽂혔던 기억도 난다.

 

그는 지금 미국에서 목사님으로 목회하고 있다. 
주님이 기뻐하시는 그 마음에 합한 사람이 되어있으리라고 확신하고 있다. 이미 예전에 그랬었듯이............


거의 2달이 넘어 만나니 참 반가웠다. 반가운 얼굴들이 많이 모였다.  처음 온 분도 있고. 인천, 천안에서 온 이들도 있다. 그동안 일어났던 참 좋은 일들을 소식으로 가져오신 분들도 있었다.  모두들 사람들에게 일어난 뜻밖의 변화에 대해 감동을 받았고 동시에 용기도 얻고 또 더욱 겸손해지는 계기가 되었다.  오랜만이라 서로 할 이야기도 많았지만 오늘의 시가 또 많은 이야기 거리를 만들어 내었기 때문에 3시간 반이 넘도록 계속되었다.  시간이 지날 수록 모두들 더 통찰력이 깊어지고 관점이  넓어지는 것을 참여자들이 다 스스로 느끼는 기회가 된 모임이었다.

다음달 부터는 첫째 주 토요일에 모임을 갖기로 하였으므로 2월 모임은 다음 주인 2/3일이 된다. 
마침 카메라가 있어서 한장 찰칵!! (먼저 가신 L선생님께는 좀 미안했지만.)

You are special.


You needed me, Sung by Anne Murray

내가 눈물 흘렸을 때 당신이 닦아 주었고

내가 혼동 중에 방황할 때 당신은 내 의심을 씻어주었습니다.

내 영혼을 팔았지만 당신이 내게 되찾아 주었고

날 높이 올려 존귀함 주었습니다.

어쩌면 당신은 내가 필요했습니다.


당신은 내게 다시 홀로 설 힘을 주었고

내 혼자 힘으로 세상과 맞설 수 있게 해주었고

날 높이 올려 존중해 주니 너무 높아 영원까지 볼 수 있었습니다.

당신은 내가 필요했어요,
당신은 내가 필요했어요.

바로 당신이라는 게 믿을 수가 없어요, 그게 사실이라는 게,

나 당신이 필요했는데 당신이 바로 거기 있었습니다.

난 당신을 떠나지 않아요, 내가 왜 바보같이 떠나겠어요?

마침내 진정으로 나를 염려해주는 그런 사람 찾았는데.


내가 추울 때 당신은 내 손 잡아주었고

길을 잃었을 때 날 집으로 데려다 주었고

막다른 길목에 몰렸을 때 내게 희망을 주었으며

나의 거짓도 진실로 다시 바꾸어 주었습니다

날 친구라고 부르기까지 하면서.


당신은 내가 필요했던 거에요.
당신은 내가 필요했던 거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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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노래가사가 좀 이상하지 않나요?
힘들고 지치고 넘어지고 외로운 것은 나였는데... 그런 내게 "당신이"  다가와 손 내밀어주었는데, 내가 그렇게 절실히 바라고 필요로 하던  "당신"이었는데...  오히려 "당신이 나를 필요로 했었다(You needed me)"고 노래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우린 말하죠. '난 당신없인 안돼.'
그거 아세요?  부모님도 나 없인 안되는 것을요.  밤낮 속썩이고 실망만 시키는 연약한 내가 부모님을 필요로 하는 줄 알았는데 뭐든 다 하실 수 있는 어른인 부모님이 바로 날 필요로 하신다는 것을.
(심바에게 고백하던 아버지의 고백을 기억하세요?  그 누구도 감히 대적하지 못할 아무것도 두렵지 않은 동물의 왕인 아버지 사자가 '오늘 두려워서 죽는 줄 알았다.'고  "사랑하는 널 잃을까봐 두려웠다고" 고백하는 것을..  )

하나님도 우리 없인 안돼라고 말씀하시는 것을 아십니까? '난 네가 필요해'라고 말씀하시는 것을요. 
[피곤치 아니하시며 곤비치 아니하시며]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이라고 이사야는 말합니다. 이때 피곤, 곤비는 영어로 sick and tired라고 표현되어 있습니다. 지쳐서 진력이 난다는 뜻입니다. 실망하고 포기하고 싶다는 말이지요. 

그런데 주님은 내게 피곤해하지 않으십니다.  나도 자꾸 나에게 실망하고 지쳐가는데 그래서 자존감도 용기도 희망도 다 사그라져 그저 누워버리고 싶은데  주님은 아니랍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나보다도 더 잘 이미 "나의 불가능성과 나의 나약함을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나 대신 내 안에서 그의 일 (착한일, 선한일, 나를 주님 닮아가게 키우는 구원의 완성-빌립보서)을 시작하시고 이루어가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자여 다 내게로 오라고 하십니다.  나의 가는 길이 이렇게 캄캄하고, 외롭고, 고단하고 힘들어도 주님은 나를 포기하지 않고 있습니다.  오늘도 나는 어제의 나와 하나도 달라진 거 없는 것처럼  또 실패를 반복하는데 주님은 나를 붙들고 계시다 합니다.  

믿을 수 없습니다.  내가 이렇게 힘든데 어디 곁에 있다는 말인가 하고 대뜸 반발심이 일지 않습니까?

시편 23편에서의 고백을 보면: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쉴만한 물가로 나를 인도하시며...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害)를 두려워하지 않음은 여호와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심이라.

가만히 보십시오. 내게 부족함이 없다는 고백에 그가 탄탄대로로 걸었다고 하지 않습니다.  쉴 만한 물가로 인도받는 그 길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valley of the shadow of death)"입니다.  그런데 부족함이 없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그 죽을 것 같이 힘든 그늘진 골짜기에서 그가 가장 두려워한 것은 바로 "害(해)" 이기 때문이며 그 해로 부터 보호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때 해란 손해보고 세상에서 실패하고 외면당하는 것이 아니라 Evil, 즉 악을 말합니다.  내가 악으로 부터 보호받는 것 이것이 "부족함이 없는 삶" 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도달할 쉴만한 물가, 평화를 의미합니다.  이 비밀을 깨달아 안 사람들은 인생길에서 피곤하고 곤비하고 넘어지고 자빠지되 여호와의 지팡이(인도)와 막대기(보호)로 인해 독수리처럼 날개치는 존재인 것을 믿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바로 세상이 감당치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이것이 바로 실패자 같고 이름없는 존재이며 외톨이인 우리가 가진 "그럼에도"의 권리와 승리와 힘의 "비밀"입니다.  세상과 나의 삶과 나를 새롭게 보는 눈입니다.

나의 귀한 친구가 한 말이 생각납니다.  강하다는 게 무엇인줄 아느냐고.  웃을 수 있는 사람이 강한 사람이라고. 
이것이 바로 그 친구가 말한 웃을 수 있는 힘이라고 생각합니다.

나의 신음소리까지 다 듣고 알고 있는 누군가가 있다는 것은 얼마나 힘이되는 지요.  그런데 그 누군가가 나보다 더 나를 필요로 하고 있다는 것을.

너는 알지 못하였느냐 듣지 못하였느냐 영원하신 하나님 여호와, 땅 끝까지 창조하신 자는 피곤치 아니하시며 곤비치 아니하시며 명철이 한이 없으시며 피곤한 자에게는 능력을 주시며 무능한 자에게는 힘을 더하시나니 소년이라도 피곤하며 곤비하며 장정이라도 넘어지며 자빠지되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힘을 얻으리니 독수리의 날개침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 하여도 곤비치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치 아니하리다. (이사야 40)


오래 먼 숲을 헤쳐 온 피곤한
상처들은 모두 신음 소리를 낸다
산다는 것은 책임이라구.
바람이라구. 끝이 안 보이는 여정.
그래. 그래 이제 알아들을 것 같다
갑자기 다가서는 가는 바람의 허리.

같이 있어도 같이 있지 않고
같이 없어도 같이 있는, 알지?
겨울 밤 언 강의 어둠 뒤로
숨었다가 나타나는 숲의 상처들.

그래서 이렇게 환하게 보이는 것인가.
지워 버릴 수 없는 그 해의 뜨거운 손
수분을 다 빼앗긴 눈밭의 시야.
부정의 단단한 껍질이 된
우리 변명은 잠 속에서
밤새 내리는 눈먼 폭설처럼
흐느끼며 피 흘리며 쌓이고 있다.


[상처 - 마종기]

네가 얼마나 사랑스런 데. 네가 너무 힘들어서 그래.
 
우선 일기에 네가 가장 힘든 일에 대해서 맘 놓고 다 털어놓아봐.  널 힘들게 하는 사람에게 편지를 써봐.  물론 보내지 않는 너만 보는 편지야.  네 맘속에 있는 분노와 미움과 그사람의 맘에 들지 않는 점, 그리고 네게 상처주는 말과 행동, 사건들을 모두 다 털어놓고 그 사람에게 화를 내.  욕을 해도 되고 네 손이 가는 대로 맘 껏 다 털어놓으렴.  분노는 부끄러운게 아니야.  네 화가 다 풀릴때까지 2-3일 아니면 4일간 편지를 써봐.  편지를 쓰고는 버려도 돼.  이건 부끄러운 일이 아니니까 울고 불고 화를 내면서 종이에다 다 쏟아내.  이건 절대 보내는 편지나 남에게 보여주는 글이 아니니까 맘껏 욕도 하고 화를 내.
그리고 선생님에게 다시 편지 주렴.  다른 글쓰기 방법을 또 가르쳐줄게.우선 네가 널 사랑해주어야해. 알았지? 
세상은 그 누구도 남에게 관심이 없단다.  내가 날 아끼고 위로해주고 용기주고 다독거려주어야 해.  내가 스스로에게 떳떳하다면 당당하렴.  네가 스스로를 사랑해야 남들앞에서도 네가 당당할 수 있어.  네가 스스로 주눅이 들어 있으면 남들이 널 사랑해도 네가 그걸 느끼지 못하고 자꾸 오해하게 돼.  널 무시한다고 고약한 착각을 하기도 하고.  거울을 보고 스스로에게 늘 말을 하렴.  넌 예쁘고 멋진 아이야.  넌 다 잘할 수 있어 하고.  그리고 주님께 늘 기도해.  지혜를 달라고.  네가 못하는 일도 네 안의 주님의 지혜가 널 인도하게 해달라고.
그리고 직장에서 네 친구를 한 사람 사귀어두려고 해봐.  누군가 대화할 수 있는 사람.  물론 쉽지 않아.  하지만 너무 많은 기대는 하지말고 같이 점심먹고 가끔 퇴근하고 커피 한 잔 할 수 있는 친구.  물론 네 맘을 털어놓는 친구가 되는 걸 기대할 수 없을 수도 있어.  그 친구의 맘을 들어주는 일부터 시작해봐.  남에게 널 알아주길 기대하기는 거의 불가능해.  모두 자신들이 아프고 힘들어 할 뿐 남에게는 관심이 없어. 그리고는 자신들만 사랑받고 인정받고 위로받고 싶어하는 게 인간들이야.  슬프게도....  그러니까 직장에선 그렇게 많은 기대를 하면 안 돼.   일하는 곳이니까.   네 친구가 되게 하려면 노력해야 해. 

 

좀 힘들겠지만 용기가 나면 그 사람에게 웃어봐.  그건 일종의 "역할극"이라고 생각해.  네가 그 사회에서 해야하는 너의 "역할"을 하는 거야. 무대 위에서 하듯이. 화장을 하듯이. 그리고 가끔 그 사람 책상 위에 쵸콜렛이라도 하나 가져다 놓아봐.  이건 참 힘드는 일이지만 이상하게 어떨 땐 내가 그런 행동을 (의지적으로, 용기내어) 하고 나면 그런 맘이 따라올  때도 있어.   (이건 지금 당장은 어려워.  보내지 않는 편지쓰기를 한 후 혹시 용기가 나면 해봐.)  어쩌면  의외로 그 사람 네게 상처준 일이 있는 지 조차 기억도 못할거야.  즉 네 잘못이 아니라 그 사람의 성격이 그런 거야.  기억해. 인간들이 다 그런거야.누구나 사람들은  자신이 타인에게 어떤 상처를 주고 있는지 알지도 못하고 기억도 못한단다.  때로는 나도 내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도 상처를 줄때가 있단다. 누구나 그래.  인간은 그렇게 불완전하고 나약하단다. 그냥 각자 몸에 자신들만의 냄새를 가지고 살 듯 자신들의 뾰죽한 가시, 울퉁불퉁한 혹... 들을 품고 살면서 서로 스쳐갈 때마다 서로에게 상처를 주기도 하고 못된 냄새를 풍겨 불쾌하게 하기도 하고 그러는 거야.  내게서도 나는 모르는 냄새가 날수도 있고 뽀죽한 가시가 남을 긇을 수도 있는데 각자는 자신의 몸에 무엇이 있는지 모르는 거야.   그러면서 서로 부딛치고 상처입고 차차 뽀죽한 부분들이 닳고 .... 그렇게 성숙해 가는 거야. 때로 내가 냄새가 있다는 걸 깨닫는 사람들은 열심히 몸을 씻고(인격을 가다듬고, 인내하는 법과 용서하는 법과 자제하는 법을 배우고) 때로 향수를 뿌려 타인을 배려하기도 하고 감추고 남앞에 나가기도 해.  그러니까 겁먹지마.  네 잘못이 아니니까.  그사람 성격이 그런거야.   가시나무도 있고 향기로운 꽃도 있고 그런 숲이 우리가 사는 곳이니까.      이곳에 있는 학생들의 글(치료모임이야기)을 읽어봐.  그애들도 첨엔 많이 힘들어 했었어.꼭 내 말대로 그렇게 해봐. 그리고 작은 일기장이나 노트 하나 준비해서 가지고 다니면서 직장에서도 그런 일 있으면 화장실 같은 데 가거나 점심시간에 카페 같은 데 가서 맘껏 분노를 터뜨리는 글을 써봐.   억울함. 분노, 미움은 간직하면 점점 널 힘들게 해.  그런 것들이 우리 속에 혹으로, 가시로, 향기롭지 못한 냄새로 남을 수도 있는 거야.  그 그 가시가 나 자신을 병들게 하는 거야. 남을 상처주기 이전에 우선 나부터 망가지게 한단다.  그러니까 분노, 슬픔, 억울함, 원한 등의 부정적인 감정들은 그때 그때 그 에너지들을 분출해버려야해.  (남에게 해가 되지 않는 방법으로 말이야.)   털어버려야 해. 알았지?선생님도 네가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행복하게 사는게 아니란다.  우선 육체적으로도 늘 힘들어.  어제 밤에도 내내 앓고 결국엔 두통이 너무 심해서 잠을 제대로 잘 수도 없어 새벽에 일어났다가 네 글을 보았네....  그래도 또 학교 갈 준비해야 하지.  사는게 다 그런거야.  서글프게도.  시간이 없어서 급히 썼어.  언제라도 힘들면  편지해.오늘도 힘내. 널 위해 기도할게.

 

Ain't No Mountain High 라는 이름도 시적인 상('산도 가로막지 못할' 활약상이라 할 수 있다)을 받은 Kay와 함께. 같이 공부하던 제인, 부르스, 그리고 Kay's team facilitator인  Joy 외에 teleconference 에서 목소리만 들었던 시카고에서 온 케이트와 수잔, 멜라  모두 만났다. 너무나 좋은 친구들.

그리고 공로상을 받은 Caryn과 함께.
Caryn은 영문학교수. 자신의 학교에 Transformative Language Art라는 학과를 창설하여 공로상을 받았다. Caryn의 세션에 참가해서 captured moment 식의 시를 썼었다. 대학교때 나의 연극에 장미꽃 23송이를 가지고 온 사건에 대해서 그리고 그 이후에 대해서...  어린왕자의 장미와 연결지어 시를 썼던거 같다. 그리고 발표했는데 그 후 지나갈 때 잘 모르는 얼굴들이 웃으며 다가와  아까 너의 시가 너무 감동적이었다고 악수를 하고 칭찬을 해주어서 정말 당황했었다. 어디 있는지 한번 찾아봐야 겠다.  돌아와서는 또 학교일과 학교 행사들, 연극 공연들.. 그리고 남은 과제들을 쫓아 앞으로 나가느라고 너무 바빠서 그때 공부했던것들이 하나도 정리되지 못한 채 그대로 쌓여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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