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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오는 地圖(지도) ㅡ 윤동주 (1917~1945)

순이(順伊)가 떠난다는 아침에 말 못할 마음으로 함박눈이 내려, 슬픈 것처럼 창 밖에 아득히 깔린 지도(地圖) 위에 덮인다.

방안을 돌아다보아야 아무도 없다. 벽과 천정이 하얗다. 방안에까지 눈이 내리는 것일까. 정말 너는 잃어버린 역사(歷史)처럼

홀홀이 가는 것이냐, 떠나기 전에 일러둘 말이 있던 것을 편지로 써서도 네가 가는 곳을 몰라 어느 거리, 어느 마을, 어느 지붕 밑,

너는 내 마음 속에만 남아 있는 것이냐. 네 쪼고만 발자욱을 눈이 자꾸 내려 덮여 따라갈 수도 없다. 눈이 녹으면 남은 발자국

자리마다 꽃이 피리니 꽃 사이로 발자욱을 찾아나서면 일년 열두 달 하냥 내 마음에는 눈이 내리리라.

- 1948년 유고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정음사)

오래된 수틀 - 나희덕

 

 

누군가 나를 수놓다가 사라져버렸다

 

씨앗들은 싹을 틔우지 않았고

꽃들은 오랜 목마름에도 시들지 않았다

파도는 일렁이나 넘쳐흐르지 않았고

구름은 더 가벼워지지도 무거워지지도 않았다

 

오래된 수틀 속에서

비단의 둘레를 댄 무명천이 압정에 박혀

팽팽한 그 시간 속에서

 

녹슨 바늘을 집어라 실을 꿰어라

서른세 개의 압정에 박혀 나는 아직 팽팽하다

 

나를 처음으로 뚫고 지나갔던 바늘 끝,

이 씨앗과 꽃잎과 물결과 구름은

그 통증을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기다리고 있다

 

헝겊의 이편과 저편, 건너가면

다시 돌아올 수 없는 언어들로 나를 완성해다오

오래 전 나를 수놓다가 사라진 이여

크리스마스를 위하여ㅡ김시태

 

 

​너무 많이 걸었습니다
희미한 고향집과 어머니
그 개구쟁이들
그들을 도로 돌려주소서
조그만 카드 속에 정성을 담던
그 소년들도 돌려주소서
첫아이 보았을 때 기도드리던
그 아빠와 엄마도 돌려주소서
아이들과 손잡고 이야기하며
성당을 찾던 그 시절이
얼마나 행복했던가를...
한 번 더 그 종소리 듣게 하시고
눈 내리는 아침을 걷게 하소서
살면서 가장 소중한 것이
무엇인가를 깨닫게 해 주소서

<데스마스크 Death Mask -허만하>

  바다 위에서 눈은
  부드럽게 죽는다.

  죽음을 덮으며 
  눈은 내리지만

  눈은 다시
  부드럽게 죽는다

  부드럽게 감겨 있는
  눈시울의 바다.

  얼굴 위에 쌓인
  눈의 무게는
  보지 못하지만

  그의 내면에는
  눈이 내리고 있다.

   - [비는 수직으로 서서 죽는다](1999/솔출판사)

21세기 한국시단 - 이봉희

 

[사랑] - 이봉희

 

고통이 말했다

내게 기대렴

고통이 말했다

너 혼자 살 수 없단다

고통이 말했다

내 품에 안기렴

고통이 말했다

내게 돌아와

널 사랑해

 

 

계간 『문예연구』 2010년 겨울호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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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봉희 시인

2003 문예연구로 등단. 나사렛대학교 교수. 미국공인문학치료전문가(CPT)/공인저널치료전문가(CJT). 한국글쓰기문학치료연구소 소장(https://www.journaltherapy.org). 한국시인협회회원. 전미문학치료학회공식한국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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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번역하지 말라, 악몽- 구토, 마지막 잎새. 박제 - 이봉희 / 21세기 한국시단

 

 

[나를 번역하지 말라] - 이봉희

 

나를 함부로 펼치지 말라

나를 분석하지 말라

당신의 문법으로 띄어 쓰고

쉼표를 넣고, 밑줄을 치고, 마침표를 찍지 말라

나의 말없음표를 당신의 언어로 채워 넣지 말라

아직 다 쓰이지 못한 나를

꼬리말, 머리말, 주석과 요약문을 달지 말라

나는 바벨의 언어니

당신의 언어로 이해했다 함부로 전하지 말라

당신의 진부한 해석은 오직

당신을 위한 빛나는 업적일 뿐이니

눈물 한 방울 나눈 적 없는

나의 옷을 입어본 적 없는

번쩍이는 당신의 언어로

나를 목 메달아

덜렁 덜렁 간판으로 내걸지 말라

나는 강물처럼 흐르는 노래이니

나를 움켜쥐지 말라

나는 당신과 다른 언어이니

나를 함부로 번역하지 말라

 

10회 전국계간문예지 사화집, 2008 중에서

 

 

[악몽-구토] - 이봉희

 

구토증에시달린다.모든소리와활자가허기지고목말라죽어가는귀에서목에서코에서눈에서가슴에서출혈을일으키며도로토해져나온다.삼킬수가없다.화려하고끈적이는플라스틱언어들이신기루처럼과일쟁반에탐스럽게올려져나오고알수없는구토증은계속된다.당신은누구인가.당신도플라스틱인가.드럼처럼머리를두드려대는삼킬수없는기계음인가.한가지주제의변주만반복하는지루한악기인가.영원한무한대복제인가.저춤추는무희는누구인가.거짓예언자의머리를받쳐들고무희에게다가가는당신은누구인가.저입맞춤은무엇인가.저위에손짓하는탐스러운포도송이의향기는무엇인가.손을뻗어도뻗어도닿을수없는저터질듯한노래는신기루인가깔깔대는환상일뿐인가.아,목마르다.

 

계간 문예연구2010년 겨울호 발표

 

 

[마지막 잎새] - 이봉희

 

내가 네게

이미 시들어

죽어버린 생명이라면

불가능한 현실이라면

 

난 차라리 가난한 화가의

마지막 잎새이고 싶다

 

못 견딜 눈서리 된바람에도

현실보다 강인한

생명을 나누는 죽음

 

그렇게 영영 지지 않는

아름다운 환상이고 싶다

 

계간 문예연구2008년 가을호 발표

 

 

[박제]- 이봉희

 

 

영원히 곁에 두기위해

신성한 제의처럼

새를 잡았다.

피를 다 빼어내고

가슴을 다 후벼 가져가고

그 속에

건조한 짚을 넣었다.

살아 있을 때 보다 더 빛나도록

유리 눈을 박고

날개를 닦아주고

다시는 이 땅에 내려오지 말라고

영원한 비상의 몸짓으로

펼쳐놓았다.

 

새는

다시는 이 낮은 곳에

내려앉지 않을 것이다, 영원히

그러나

노래하지도

통곡하지도

못할 것이다

안식의 날개를 접지도

눈을 감지도

못할 것이다, 영원히

 

계간 문예연구2006년 봄호 발표

 

물레방아가 있는 좁다란 오솔길로 두꺼비 한 마리가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맨드라미처럼 생긴 볏이 붉은 해처럼 고운 수탉 한 마리가 두꺼비 곁으로 다가왔습니다.

"두껍아, 너 혼자서 참 외롭겠구나. 내가 친구가 되어 줄께. 두툴두툴 네 징그러운 몸뚱이를 보면 아무도 가까이 오지 않을 거야. 게다가 네 발로 어기적 어기적 걸아가는 모습은 바보같이 보이거든, 아무도 널 좋아할 사람은 없는 게 마땅해. 난 이렇게 멋지게 잘 생겼다고 모두들 칭찬을 한단다. 그래서 다투어 친구가 되려 하지만 그건 도리어 귀찮은 일이야. 친구란 마음이 맞아야 된다는 걸 난 알고 있거든."

수탉은 친절하게 두꺼비와 나란히 걸아가면서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두꺼비는 조금 부끄러운 듯이 웃었습니다.

"고맙다, 수탉아."

둘은 시냇물이 흐르는 둑길을 걸었습니다. 걸으면서 수탉은 먹을 것을 찾았습니다. 보리알, 과자 부스러기, 죽은 메뚜기의 시체, 여러 가지 벌레들이랑, 길바닥엔 먹을 것이 수없이 많았습니다. 그것을 주워 먹느라 수탉은 숫제 아래만 내려다보고 걸었습니다. 반대로 두꺼비는 그 큰 눈으로 푸른 하늘을 바라보며 무엇을 생각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하다 보니, 한나절을 함께 걸었어도 둘은 얘기 한마디 나눌 수 없었습니다. 두꺼비가 잠깐 멈춰 서더니, 수탉을 향해 말했습니다.

"너처럼 잘 생긴 친구와 걷는 것은 좋지만, 줄곧 땅만 내려다보고 먹을 것만 찾는 너하고는 아무래도 사랑하는 친구가 될 수 없어. 먹을 것이란 세끼 필요한 양식만 있으면 그만이야."

그러고 나서, 두꺼비는 주저하지 않고 혼자서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가 버리는 것이었습니다. 수탉은 멍청해진 채 그 자리에 서서, 두꺼비가 걸어가는 뒷모습을 보고만 있었습니다.

권정생-[ 아기 소나무와 권정생 동화나라 ]중에서

흰 바람벽이 있어(1941) - 백석

 

 오늘 저녁 이 좁다란 방의 흰 바람벽에
 어쩐지 쓸쓸한 것만이 오고 간다
 이 흰 바람벽에
 희미한 십오 촉 전등이 지치운 불빛을 내어던지고
 때글은 다 낡은 무명샤쯔가 어두운 그림자를 쉬이고
 그리고 또 달디단 따끈한 감주나 한잔 먹고 싶다고 생각하는 내 가지가지 외로운 생각이 헤매인다
 그런데 이것은 또 어언 일인가
 이 흰 바람벽에
 내 가난한 늙은 어머니가 있다.
 내 가난한 늙은 어머니가
 이렇게 시퍼러둥둥하니 추운 날인데 차디찬 물에 손은 담그고 무이며 배추를 씻고 있다
 또 내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
 내 사랑하는 어여쁜 사람이
 어느 먼 앞대 조용한 개포가의 나즈막한 집에서
 그의 지아비와 마주 앉아 대구국을 끓여 놓고 저녁을 먹는다
 벌써 어린것도 생겨서 옆에 끼고 저녁을 먹는다
 그런데 또 이즈막하여 어느 사이엔가
 이 흰 바람벽엔
 내 쓸쓸한 얼굴을 쳐다보며
 이러한 글자들이 지나간다
 ---나는 이 세상에서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살아가도록 태어났다
 그리고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내 가슴은 너무도 많이 뜨거운 것으로 호젓한 것으로 사랑으로 슬픔으로 가득 찬다
 그리고 이번에는 나를 위로하는 듯이 나를 울력하는 듯이
 눈질을 하며 주먹질을 하며 이런 글자들이 지나간다
 ---하늘이 이 세상을 내일 적에 그가 가장 귀해하고 사랑하는 것들은 모두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그리고 언제나 넘치는 사랑과 슬픔 속에 살도록 만드신 것이다
    초생달과 바구지꽃과 짝새와 당나귀가 그러하듯이
    그리고 또 프랑시쓰 잼과 도연명과 라이넬 마리아 릴케가 그러하듯이

[양천문화재단 특강] 문학치료- 잃어버린 언어의 발견 

- 강의일시:  2021. 9. 10~9. 24  3주간 매주 금요일 10:00-12:00

- 강의장소: 방아다리문학도서관(코로나 상황에 따라 비대면 전환)

- 강사: 이봉희 교수([내 마음을 만지다] 저자) CPT/CJT
          미국공인문학치료전문가/공인저널치료전문가/상담심리사

          나사렛대학교 재활복지대학원 문학치료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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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김없이 글을 통해 듣게 된

그동안 가슴에 소리없이 묻혀있던 자신의 목소리에 그만 눈물을 흘리시는 분들.
3주간의 강의 내내 고개를 들지 못하고 흐느끼시던 00님, 그분이 듣고 싶은 단 한마디는 "미안하다"였다.
늘 그렇지만 시간이 짧다...
후기에서도 모두들 시간을 늘렸으면 좋겠다고 아쉬워하셨다. 

내년 봄에 기회가 되면 또 만나 뵐 수 있기를....

 

 

 

 

 

서울시 간호사협회 보수교육 2021-2 <예술심리치료의 이해>

9/16/2021

 

 

<용서의 의자 -정호승​>

 

나의 지구에는

용서의 의자가 하나 놓여 있다

의자에 앉기만 하면 누구나

용서할 수 있고 용서받을 수 있는

절대고독의 의자 하나

쌩떽쥐뻬리의 어린 왕자가 해질녘

어느 작은 별에 앉아 있던 의자도 아니고

법정 스님이 오대산 오두막에 홀로 살면서

손수 만드신 못생긴 나무 의자도 아닌

못이 툭 튀어나와 살짝 엉덩이를 들고 앉아야 하는

앉을 때마다 삐걱삐걱 눈물의 소리가 나는

작은 의자 하나

누군가가 만들어 놓고

다른 별로 떠났다

여름의 끝 - 박연준
 
 
오래된 시간 앞에서 새로 돋아난 시간이 움츠린다
머리에 조그만 뿔이 두 개 돋아나고
자꾸 만지작거린다
결국 도깨비가 되었구나, 내 사랑
 
신발이 없어지고 발바닥이 조금 단단해졌다
일렁이는 거울을 삼킬 수 있을 것만 같았는데
수천 조각으로 너울거리는 거울 속에
엉덩이를 비추어 보는 일은
이제 그만하고 싶다
 
두 손으로 만든 손우물 위에
흐르는 당신을 올려놓는 일
쏟아져도, 쏟아져도 자꾸 올려놓는 일
 
배 뒤집혀 죽어 있는 풀벌레들,
촘촘히 늘어선 참한 죽음이
여름의 끝이었다고
징— 징— 징—
파닥이는 종소리
 

팽나무 식구 - 문태준

  작은 언덕에 사방으로 열린 집이 있었다
  낮에 흩어졌던 새들이 큰 팽나무에 날아와 앉았다
  한 놈 한 놈 한 곳을 향해 웅크려 있다
  일제히 응시하는 것들은 구슬프고 무섭다
  가난한 애비를 둔 식구들처럼
  무리에는 볼이 튼 어린 새도 있다
  어두워지자 팽나무가 제 식구들을 데리고 사라졌다.

   출처: [맨발, 2003/창비]

<고독 - 릴케>

 

고독과 외로움은 마치 비와 같아

바다로부터 저녁을 향해 올라온다.

멀리 외딴 벌판으로부터 달려와

오랜 제 처소인 하늘로 올라가서는

그 하늘을 떠날 때야 비로소 도시 위로 떨어져 내린다.

 

뒤엉킨 시간에 고독은 비 되어 내린다

모든 거리마다 새벽을 향해 얼굴을 뒤척일 때,

아무것도 찾지 못한 두 육체가

실망과 슬픔으로 서로 등 돌리고 누울 때,

서로 경멸하는 두 사람이

한 잠자리에 들어야만할 때ㅡ

그 시간 고독은 강과 하나 되어 흐른다.

2021.5.31. 

<The Bustle in a House - Emily Dickinson>

The Bustle in a House
The Morning after Death
Is solemnest of industries
Enacted opon Earth –

The Sweeping up the Heart
And putting Love away
We shall not want to use again
Until Eternity –
____
5월의 마지막 날 언니가 떠났다...

엄마 내가 이모 기도하는 데 “내 주를 가까이 하게함은...”이라는 찬송이 귀에 들렸어.  엊그제 딸이 또 다시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달린 채 말했다. 

사실은 (딸은 전혀 몰랐지만) 그게 울 언니가 제일 좋아하던 찬송가였다.  너무 아파하지말라고, 너무 슬퍼말라고 오히려 우리를 위로해주는 언니의 메시지 같아서 큰 위로가 되었다. 

너무나 고통스럽게 너무나 급히 떠난 언니.. 코로나로 면회도 불가능하고 2주 격리까지 있어 가볼 수도 없이 멀리서 안타깝고 측은하고 미안하고 보고 싶고 만나지도 못하고 그냥 보내드릴 생각에 얼마나 가슴이 아프던지... 

뉴욕으로 떠나기 전 언니를 만나고 오는 날 유달리 몇달 사이 창백하고 소녀 같이 작아진 언니가 현관 문고리 잡고 배웅하면서 “너마저 가면 난 어쩌냐..” 하셨던 게 내내 가슴에 걸리고 맘이 아팠었다. 늘 다녀오는 여행이었는데 왜 이번에는 그런 말을 하셨는지... "언니 가긴... 곧 돌아올거야.  늘 그랬잖아... 식사 잘하고 있어." 그렇게 말하고 돌아서 오늘 길이 왜 그리 무겁고 안쓰럽고 불안하던지... 

바로 지난 주에도 보내 드린 우리 아가 사진들 보면서 너무 좋아서 까꿍까꿍하고 난리가 났다고 전해들었는데. 그래서 또 맘이 짠 했는데... 몇일사이 손도 쓸 수 없이 열었다 닫았다만 반복하고 저혈압 패혈증 투석 또 2차 수술 시도... 대체 그리 괴사가 된 몸을 어찌 견디며 지내신 것일까... 너무 불쌍하고 딱하고 미안하고 .... 

언니가 중환자실에서 그리 쓸쓸히 홀로 가셨지만  결코 "홀로"가 아니었을거라고, 
주님의 임재를 느끼며 베드로처럼 “주여 여기가 좋아오니...”하며 고통스런 이 땅에서의 삶을 다 내려놓고 평안히 눈부신 빛속에 안겨 가셨으리라 믿고 감사한다.  
하느님이 언니를 더이상 고통속에 두지 않으시려고 딱해서 얼른 안고 가셨을거라고.... 혼자가 아니었을거라고...  
쓸쓸하고 외롭지도 두렵지도 않았을거라고... 
언니는 가서 아버지 엄마 큰언니 큰오빠 모두 만났을거라고.......  그리 믿으면서도 왜 이리 아프고 슬플까. 

그래... 상실의 아픔과 슬픔 그리움 미안함 회한... 그 모든 것은 남겨진 자가 짊어질 사랑의 대가이며 감사히 지니며 살아갈 선물이다. 

https://journaltherapy.tistory.com/2454

[꽃 피는가 싶더니 꽃이 지고 있습니다 - 도종환]

 

피었던 꽃이 어느새 지고 있습니다
화사하게 하늘을 수놓았던 꽃들이
지난 밤 비에 소리없이 떨어져
하얗게 땅을 덮었습니다

꽃그늘에 붐비던 사람들은 흔적조차 없습니다
화사한 꽃잎 옆에 몰려오던 사람들은
제각기 화사한 기억 속에 묻혀 돌아가고
아름답던 꽃잎 비에 진 뒤 강가엔
마음 없이 부는 바람만 차갑습니다

아름답던 시절은 짧고
살아가야 할 날들만 길고 멉니다
꽃 한 송이 사랑하려거든 그대여
생성과 소멸 존재와 부재까지 사랑해야 합니다

아름다움만 사랑하지 말고 아름다움 지고 난 뒤의
정적까지 사랑해야 합니다
올해도 꽃 피는가 싶더니 꽃이 지고 있습니다.

속으론 나를 좋아하면서도
만나면 짐짓 모른체하던
어느 옛 친구를 닮았네

꽃을 피우기 위해선
쌀쌀한 냉랭함도
꼭 필요한 것이라고
변명 아닌 변명을 늘어놓으면서

얄밉도록 오래 부는
눈매 고운 꽃샘바람

나는 갑자기
아프고 싶다

[이해인]

<그녀에게- 박정대>

 

고통이 습관처럼 밀려올 때 가만히 눈을 감으면 바다가 보일 거야
석양빛에 물든 검은 갈색의 바다, 출렁이는 저 물의 大地

누군가 말을 타고 아주 멀리로 갔다가 다시 돌아오는 모습이 보일거야
그럴 때, 먼지처럼 자욱이 일어나던 生은 다시 장엄한 음악처럼 거대한 말발굽 소리와 함께 되돌아오기도 하지

북소리, 네 심장이 고동치는 소리를 들어봐
고독이 왜 그렇게 장엄하게 울릴 수 있는지 네 심장의 고동소리를 들어봐

너를 뛰쳐나갔던 마음들이 왜 결국은 다시 네 가슴속으로 되돌아오는지
네 가슴속으로 되돌아온 것들이 어떻게 서로 차가운 살갗을 비벼대며 또다시 한 줄기 뜨거운 불꽃으로 피어나는지

고통이 습관처럼 너를 찾아올 때 그 고통과 함께 손잡고 걸어가 봐
고통과 깊게 입맞춤하며 고독이 널 사랑할 때까지 아무도 모르는 너만의 보폭으로 걸어가 봐

석양빛에 물든 저 검은 갈색의 바다까지만
장엄한 음악까지만

[아무르 기타, 문학과사상사, 2004]

왜 나는 아프다고 말하지 못할까?

- 상처의 대물림

   

영화 <다크나이트>를 보면 악의 상징인 조커가 등장합니다. 그는 자신과 같은 고통을 당하면 그 누구라도 자신과 같은 악이 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을 증명해 보여주고자합니다. 시민들의 희망인 고담시의 정의로운 검사 하비덴트는 그런 조커에게 희생되고 맙니다. 자신이 사랑하는 여자의 죽음을 복수하기 위해서 조커와 똑같은 악의 화신이 되는 것이지요. 영화에서 보여주는 하비덴트의 이중적인 얼굴, 즉 반은 손상되기 이전의 온전한 모습, 나머지 반은 화상을 입고 괴물로 변한 얼굴은, 조커가 원하던 대로 괴물과 싸우다 괴물이 되고 만 안타까운(그러나 너무나 인간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모두 병들었는데 아무도 아프지 않았다.

요즘은 우리나라에도 육체적 건강뿐 아니라 정신적, 정서적 건강의 중요성이 일깨워지면서 상담과 치료에 관심이 많아졌습니다. 의료전문가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분야뿐 아니라 자가치료에도 관심이 쏠리고 있습니다. 특히 미술, 음악, 연극 등의 예술치료에 이어 문학치료와 글쓰기치료가 새롭게 주목받고 있지요. 하지만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왜 이런 치료를 받아야 하는지에 대해 거부감을 드러냅니다. 나는 아프지 않은데, 치료 따위가 왜 필요하냐는 것이지요.

 

살아가면서 우리는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자연스럽게 관계의 문제로 고통 받는 경험을 피할 수가 없습니다. 이렇게 해도 저렇게 해도 피할 수 없는 이 고통스런 관계 속에서 괴로워하다가 발견한 사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사람들은 악하기 이전에 심히 병들었다는 것을, 가해자는 가해자가 되기 이전에 먼저 피해자였다는 사실입니다. 그들은 그렇게밖에 살아남는 법을 배우지 못한 것입니다. 우리는 종종 저 사람은 거짓말을 밥 먹듯 한다고 말합니다. 참 슬픈 말입니다. 이 말에는 그냥 거짓말을 쉽게 한다는 것 이상의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저 사람은 거짓이 생존의 수단()이라는 뜻이며, 거짓말을 하지 않고는 달리 살아가는 법을 모르는 사람이라는 의미입니다. 따라서 그도 가해자이기 이전에 하비덴트처럼(그리고 조커처럼) 피해자인 것입니다. 가해자의 뒤에는 반드시 또 다른 가해자(특히 어린 시절의 가정 문제)가 있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의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악의 승리는 상대의 파멸 혹은 선의 파멸이 아니라 상대를 또 다른 악으로 만든다는 점입니다. 이것을 나는 흡혈귀론이라고 말합니다. 흡혈귀는 자신이 살기 위해서 단순히 누군가를 죽게 하지 않습니다. 흡혈귀는 자기에게 물린자를 또 다른 누군가를 희생시켜야만 살 수 있는 상태, 즉 자신과 똑같은 또 하나의 악을 만들고야 맙니다. 이렇게 악은 대물림되듯 연속적으로 이어집니다. “그는 괴물과 싸웠으나 괴물이 되지 않았다는 니체의 말은 진정한 승리가 무엇인지를 깨닫게 합니다. 문제는 사람들이 자신이 병들었음을 알지 못하는 것이며 따라서 그 병을 전염시키고 있다는 사실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이성복 시인의 말했듯이 모두가 병들었는데 아무도 아프지 [않은] 것과 같습니다.

 

그날 태연한 나무들 위로 날아오르는 것은 다 새가

아니었다 나는 보았다 잔디밭 잡초 뽑는 여인들이 자기

삶까지 솎아내는 것을, 집 허무는 사내들이 자기 하늘까지

무너뜨리는 것을 나는 보았다 새 점치는 노인과 교통의

다정함을 그날 몇 건의 교통사고로 몇 사람이

죽었고 그날 시내 술집과 여관은 여전히 붐볐지만

아무도 그날의 신음 소리를 듣지 못했다

모두 병들었는데 아무도 아프지 않았다

- 이성복, <그날> 중에서

 

나보다 더 약한 상대를 희생자로 삼는다.

어떤 부모도 자신의 질병을 자녀에게 대물림하고 싶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 누구도 독감에 걸렸을 때 자녀 앞에서 대놓고 재채기를 하거나 기침을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어떤 부모도 자녀의 입에 일부러 담배연기를 일부러 불어넣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독감 균보다, 담배연기보다 더 치명적인 파괴적 언어의 독을 아이들 앞에서 재채기처럼, 담배연기처럼 마구 쏟아내고 뿜어냅니다. 내가 들었던 더없이 끔찍한 그 말들을 나도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고스란히 그 누군가에게 다시 퍼부어댑니다. 내가 가장 싫어했던 부모의 잔소리나 비난을 무의식중에 나의 자녀에게 똑같이 반복하는 경우는 아주 흔한 일입니다.

우리는 내가 받았던 유형과 무형의 폭력을 그 누구에겐가 다시 휘두릅니다. 이때 그 누군가는 나에게 다시 복수할 힘이 없는 안전한 상대, 즉 나보다 연약한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자녀보다 더 연약한 존재들은 없습니다. 그래서 모든 악은 무엇보다 부모에게서 (사실은 우리가 누구보다 먼저 보호해주어야 할) 자녀에게로 대물림됩니다. 그리고 외부에서 복수의 대상을 찾지 못한 경우 사람들은 스스로에게 복수를 합니다. 누군가가 나를 찌른 칼을 뽑아서 다시 내가 나에게 상처를 입히는 것입니다. 이는 곧 우울증이 되고 자존감을 바닥으로 내동댕이칩니다. 프랑스의 철학자 폴 리쾨르(Paul Ricoeur)돌출된 악은 이미 존재하고 있었던 악이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치료를 받아야 하는 이유는 나만의 문제 때문만이 아니라 나를 병들게 한 그 불행이 그대로 그 누군가에게 대물림되기 때문입니다. 치료받지 못한 희생자인 내가 나도 모르는 사이에 또 다른 가해자가 되기 때문입니다.

 

내가 먼저 건강해져야 한다

한 아버지가 있었습니다. 그는 어린 시절 정신분열증에 걸린 어머니가 자주 발작을 일으키는 것을 보고 자랐습니다. 예고 없이 발작을 일으키는 어머니를 바라보며 아이는 매번 공포에 질렸지만 아무에게서도 어머니의 그런 행동에 대해 설명을 듣지 못했습니다. 소년은 자라 어른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딸아이에게 아주 무서운 이야기를 들려주기를 좋아하는 아버지가 되었습니다. 그는 두려워하는 어린 딸의 모습을 보며 웃었습니다. 그리고는 무서워하지 않아도 돼. 이건 꾸며낸 이야기야. 아빠가 곁에 있잖아라고 위로해주었습니다.

 

이 아버지는 정말 딸을 보호해주는 다정한 아버지일까요? 그는 자기 아이의 두려움을 교묘하게 조종하면서 자신이 강해지는 것을 느끼고 있었던 것이라고 심리학자 엘리스 밀러(Alice Miller)는 말합니다. 그의 의식적인 소망은 자신에게 박탈되었던 것, 즉 보호와 위로, 공포에 대한 설명을 딸아이에게 베푸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이 아버지가 무의식적으로 아이에게 전해준 것은 바로 자신이 어린 시절 겪었던 두려움과 재난의 예측 그리고 대답을 듣지 못한 질문의 대물림이었습니다.

 

왜 사랑하는 사람이 나를 이토록 두렵게 하는 거지?”

 

그래서 우리에게 치료가 필요한 것입니다. 부모 자신이 먼저 과거 속 고통의 거미줄을 거두어내고, 자신과 자신의 행복을 전적으로 책임질 수 있도록 건강하고 성숙해져야 합니다. 나는 불행하면서 자녀에게 행복하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부모가 먼저 행복하면 자녀는 자연히 행복해집니다. 나의 고통을 가장 사랑하는 자녀와 가족, 또는 그 누군가 무고한 사람에게 반복해서 악을 전파하는 불행한 존재가 되지 않기 위해서도 우리는 정신적으로 건강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당신은 당신의 정원에서 악마를 쫓아낼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 악마를 당신 아들의 정원에서 다시 발견할 것입니다.”

 

<내 마음을 만지다: 이봉희 교수의 문학치료 카페>(생각속의 집) 중에서

저작권이 있으므로 정확한 출처나 허가 없이 사용할 수 없음.

그는 말을 듣지 않는 자신의 육체를 침대 위에 집어 던진다
그의 마음속에 가득 찬, 오래 된 잡동사니들이 일제히 절그럭거린다
이 목소리는 누구의 것인가, 무슨 이야기부터 해야할 것인가
나는 이곳까지 열심히 걸어왔었다, 시무룩한 낯짝을 보인 적도 없다
오오, 나는 알 수 없다, 이곳 사람들은 도대체 무엇을 보고 내 정체를 눈치챘을까
그는 탄식한다, 그는 완전히 다르게 살고 싶었다, 나에게도 그만한 권리는 있지 않은가
모퉁이에서 마주친 노파, 술집에서 만난 고양이까지 나를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중얼거린다, 무엇이 그를 이곳까지 질질 끌고 왔는지, 그는 더 이상 기억도 못한다
그럴 수도 있다, 그는 낡아빠진 구두에 쑤셔박힌, 길쭉하고 가늘은
자신의 다리를 바라보고 동물처럼 울부짖는다, 그렇다면 도대체 또 어디로 간단말인가!

[여행자 - 기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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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만 쉬고 싶은데 쉬려고 떠나왔는데 그만한 권리를 찾아 떠나왔는데... 
대체 무엇을 보고 사람들은 저 사람의 정체를 눈치챈 것일까요. 

아니. 
저사람의 정체를 정말 눈치채기나 했을까요?
그에게도 그만한 권리는 있지 않은가요. 

완전 다르게 살고 싶어할 권리... 

밀양의 신애처럼.

 

도대체 또 어디로 간단 말인가?
도대체 어디로...

가기는 간단 말인가? 

<지상의 방 한 칸>  -  김사인
 -  박영한님의 제(제목)을 빌려


세상은 또 한 고비 넘고
잠이 오지 않는다.
꿈결에도 식은 땀이 등을 적신다
몸부림치다 와 닿는
둘째놈 애린 손끝이 천 근으로 아프다
세상 그만 내리고만 싶은 나를 애비라 믿어
이렇게 잠이 평화로운가
바로 뉘고 이불을 다독여 준다
이 나이토록 배운 것이라곤 원고지 메꿔 밥비는 재주 뿐
쫓기듯 붙잡는 원고지 칸이
마침내 못 건널 운명의 강처럼 넓기만 한데
달아오른 불덩어리
초라한 몸 가릴 방 한칸이
망망천지에 없단 말이냐
웅크리고 잠든 아내의 등에 얼굴을 대본다
밖에는 바람소리 사정 없고
며칠 후면 남이 누울 방바닥
잠이 오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