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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화 - 이형기

 

 

가야 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봄 한철
격정을 인내한
나의 사랑은 지고 있다.

분분한 낙화······
결별이 이룩하는 축복에 싸여
지금은 가야 할 때.

무성한 녹음과 그리고
머지않아 열매 맺는
가을을 향하여
나의 청춘은 꽃답게 죽는다.

헤어지자
섬세한 손길을 흔들며
하롱하롱 꽃잎이 지는 어느 날

나의 사랑, 나의 결별,
샘터에 물 고이듯 성숙하는
내 영혼의 슬픈 눈.

 

ㅡㅡ

흩날리는 꽃비를 흠뻑 맞으며 마냥 행복에 젖은 하루였다.

언제나 이맘때면 이형기의 시가 가슴을 울리곤 했었다.

찬란한 설렘과 아쉬움을 동시에 느끼며 낙화속 '소풍' 끝내고 집으로 돌아오는 어스름길,

오늘은 나도 모르는 새, 맘 한구석에서 “물보면 흐르고 별보면 또렷한 마음은 어이면 늙으뇨.” 라는 영랑의 시 구절이 함께 따라 나와 혼자 웃었다. 조금은 쓸쓸히...낙화속을 걸으며 마냥 기쁘다가도 느끼는 묘한 마음이 이것이었나?

만물은 흔들리면서 - 오규원

 

살아있는 것은 흔들리면서

튼튼한 줄기를 얻고
잎은 흔들려서 스스로
살아있는 몸인 것을 증명한다.

바람은 오늘도 분다.
수 만의 잎은 제각기
몸을 엮는 하루를 가누고
들판의 슬픔 하나,
들판의 고독 하나
들판의 고통 하나도
다른 곳에서 바람에 쓸리며
자기를 헤집고 있다.

피하지 마라.
빈 들에 가서 깨닫는 그것
우리가 늘 흔들리고 있음을.

오빠가 갑자기 하늘 나라로 가신지 벌써 4년이 되었다. 까마득해 보이기도 하고, 아직도 실감이 나지 않는다.
오늘 밤엔 저 먼 곳 별이 되신 보고픈 얼굴들이, 별이 되어 내 가슴에 뜨고 지는 분들이 자꾸만 그립다.
아버지, 엄마, 큰언니, 큰오빠....그리고 또 작은언니. 

떠나간 사람들이 남긴 빈 자리는 그 무엇으로도 채울 길이 없다.
그런데도 여전히 나는 아직 남아있는 사람들에게 훗날 아쉬워할 일들을 아무 생각없이 하며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아직은 내 곁에 머물러 있을 거라 합리화하면서.....
아직은 시간이 남았다고, 내 하루하루 살아내기가 더 급하다고 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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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3. 24.

큰오빠가 갑자기 우리 곁을 떠나신 지 일주일 째 되는 날이다.
물론 오래 앓으셨지만 갑자기 어느날 아침 떠나실 줄은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

나에게 아주 특별했던 큰오빠, 가족 중에 그 누구보다 나를 사랑하시고 보살펴주시고, 내가 아버지 같이 의지했던 오빠.
어린 시절 서울에서 내려올 때마다 동화책을 한 아름 사다 주시면 외도록 그 책을 있으면서 행복했던 기억이 난다.
오빠 방에는 철학책, 시집, 화집, 문학전집 등 책으로 가득 찬 책장이 있었고 나는 그곳에서 무슨 말인지 알 수도 없는
일어, 불어, 영어 등 외국어 책을 쑤알라 쑤알라 하면서 읽는 흉내를 내었던 기억이 난다.


오빠방 하얀 커버가 씌워진 안락의자에서 나는 엄마 품에 안긴 듯, 참 포근했었다. 오빠가 벽에 걸어 놓은 고흐, 고갱, 세잔, 르노와르, 마티스 등등의 그림들은 어린 내게도 얼마나 큰 경이로움과 알 수없는 위로와 기쁨을 주었던지. 오빠가 전축에서 들려주시던 클래식 음악들, 오빠가 즐겨 부르던 영화 "셰인"의 주제곡....

어린 시절 오빠는 가끔 나를 불러서 외국 시를 읽어주셨다. 10대의 시인이라면서 프랑스 여자아이의 시를 읽어주던 기억도 난다. 긴 겨울 밤 한 이불 속에서, 또는 짧은 여름 밤 마당에 돗자리를 깔고 누워 별을 보면서 듣던 엄마의 구수한 옛날 얘기처럼 오빠의 이런 저런 이야기도 내게는 참 따뜻하고 소중하였다. 그래서인지 나는 교내 글짓기대회 교장상은 물론이고, 시장, 그리고 도지사 상을 늘 받았던 기억이 닌다. 그 어린시절 내 꿈은 소설가였다. 그 꿈을 하얗게 잃어버린 것이 언제부터였을까? 그래서 나도 오빠처럼 대학교 때 모든 선택과목을 철학으로 했었을까? 


철학과 문학과 음악과 미술..... 내가 사랑하는 것들로 가는 마음의 문을 열어준 오빠.

7남매의 막내로 그것도 다섯째 딸로 엄마 나이 40에 태어난 나(어쩌면 반갑지 않아서였을까?)-- 엄마는 간난아기에게 큰 관심을 보이지 않으셨던거 같다. 어느 날 오빠가 안방에 들어가보니 핏덩이인 내가 빈 방에서 혼자 꼬므락거리면서 오빠를 쳐다보는데 갑자기 그렇게 측은할 수가 없으셨단다. 그때부터 오빠는 날 유난히 사랑하셨다. 크면서 유달리 애교가 많았던 나를 보며 오빠는 늘 우리집에 막내 없었으면 어떻게 할 뻔 했어요, 라고 하셨단다. 엄마 모유가 나오지 않아서였을까, 간난아기 때 몇일이고 밤 새 울기만 하여서 엄마는 얘가 이러다 죽으려나보다 하셨단다. (당시는 우리나라에 아이용 분유도 우유도 없을 때였다.) 그런데 어느날 오빠가 미군부대에서 나온 분유(당연히 전지분유)를 사오셔서 그걸 (젖병도 없던 시절이니) 그릇에 타서 수저로 떠 넣어주었더니 간난애가 한 대접을 다 받아먹고 그 날로부터 색색 잘 자더란다. 그래서 엄마는 그 때 미안했다고, 넌 어려서 젖을 주려서 몸이 약하다고 늘 말씀하셨던 기억이 난다. 그래서일까, 아니면 어린 시절 오빠가 명동 찻집에 친구들 만나려가면 나를 꼭 데리고 다니시면서 따뜻한 우유(역시 분유를 탄 것)을 시켜주셔서 그때 그 맛을 못 잊어서일까, 나는 유난히 따듯한 우유를 좋아한다. 아직도 여름에도 우유를 뜨겁게 데워 마시곤 한다.

결혼하고 뒤늦은 나이 유학을 떠났다 돌아왔을 때 친정 가까이 살면서 엄마가 우리 딸을 키워주셨기에, 오빠는 자연스레 우리 딸을 키워주신 셈이 되었다. 내가 수없이 이런 저런 일로 병원에 입원할 때마다, 아플 때 마다, 무슨 교통사로라도 날 때마다, 성하지 않은 몸을 이끌고 기우뚱기우뚱 걸으시며 그 누구보다 가장 먼저 달려오셨던 오빠...... 내게는 은인인 오빠. 내 스스로 선택하고 결정하고 책임져야하는 삶을 가르쳐주신 오빠. 병약하셨던 아버지 대신 내가 의지했던 오빠.

헌칠한 키에 넓은 이마, 오똑한 콧날, 멋스런 모습.
나이들어서 병원에 초췌한 모습으로 입원해 있을 때도, 요양병원에서도,  모두들 잘 생기셨다고 하던 오빠.
담배를 좋아하셔서 늘 손에서 구수한 옥수수 냄새가 났던 오빠.
머리가 유달리 뛰어나신 오빠.
옷을 멋스럽게 입었던 오빠.
미술재능도 뛰어나셔서 그림으로 중고시절 정부에서 보내줘 중국까지 다녀오신 오빠.
하지만 자신이 하고 싶던 철학공부를 못하고, 예술공부도 못하고 맏이라서 실용적인 공부를 하셨어야 했던 오빠.
(결국 서울대 문리대 철학과를 학사편입으로 나오시긴 했지만)
7남매를 다 보살펴주신 오빠. 책임감이 그 누구보다 뛰어나고 성실하셨던 오빠. (그래서 얼마나 버거운 삶이었을지... 그래서 그런 조건 때문에 원하는 결혼도 할 수 없었던 오빠)
형편이 어려운 친구들, 주변에 힘든 사람들을 늘 가족처럼 초대해서 함께 지내고 도와주던 오빠.
늘 아랫사람들을 인격적으로 대했던 오빠.
그렇게 통증에 시달리면서도 책을 손에서 놓지 않던 오빠.
꽃과 나무를 좋아하셨던 오빠.

이제는 우리 곁에 없다.
내 곁에 없다. 아직도 믿기지 않는다.
이리 허망히 가실 줄 알았으면 좀 더 자주 찾아뵐 걸.....

육신의 고통이, 통증이 이리 절대 고독인 걸 내가 그때는 왜 미처 몰랐을까?
왜 우리는 늘 나 살기 바쁘다고 내 사랑하는 사람들이 영원히 곁에 있을 것처럼 착각을 선택하는 이기적인 삶을 사는 것일까?

오빠 사랑해요. 감사해요.
그리고... 너무 미안해요...
아픔 없는 그곳에서 평안하시길 기도합니다.

너무 보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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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살면서 해야하는 세가지
그건 죽기 마련인 모든 것을 사랑하기,
당신의 삶이 거기에 기대고 있음을 깨닫고
그들을 가슴 깊이 끌어안기,
그리고 놓아보내야 할 때가 되었을 때
놓아 보내기.
(M. 올리버)



별을 낳는 것은 밤만이 아니다.
우리의 가슴에도 별이 뜬다.
그러므로 우리의 가슴도 밤이다.
그러나 우리의 가슴에 별이 뜨지 않는 날도 있다.
별이 뜨지 않는 어두운 밤이 있듯
우리가 우리의 가슴에 별을 띄우려면 조그마한 것이라도 꿈꾸지 않으면 안된다.
그리고 다른 것을 조용히 그리고 되도록 까맣게 지워야 한다.
그래야 별이 선명하게 떠오른다.
그러므로 별이 뜨는 가슴이란 떠오르는 별을 위하여 다른 것들을 잘 지워버린 세계이다.
떠오르는 별을 별이라 부르면서 잘 반짝이게 닦는 마음-이게 사랑이다.
그러므로 사랑이 많은 마음일수록 별을 닦고 또 닦아 그닦는 일과
검정으로 까맣게 된 가슴이다.
그러므로 그 가슴 앞에서는 조금이라도 광채를 가진 사람이면 별처럼 반짝반짝 빛난다.
그러므로 사랑은 남을 반짝이게 하는 가슴이다.
사랑으로 가득찬 곳에서는 언제나 별들이 떠있다.
낮에는 태양이 떠오르고 밤에는 별들이 가득하다.
그러므로 그곳에서는 누구나 반짝임을 꿈꾸고 또 꿈을 사랑할 수 있다.
그러므로 사랑으로 가득찬 가슴에 투망을 하면 언제나
별들이 그물 가득 걸린다

[작은 별에 고독의 잔을 마신다- 오규원]

나룻배와 행인 - 한용운(1879~1944)

나는 나룻배
당신은 행인(行人).
당신은 흙발로 나를 짓밟습니다.
나는 당신을 안고 물을 건너갑니다.
나는 당신을 안으면 깊으나 옅으나 급한 여울이나 건너갑니다.

만일 당신이 아니 오시면 나는 바람을 쐬고 눈비를 맞으며 밤에서
낮까지 당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당신은 물만 건너면 나를 돌아보지도 않고 가십니다그려.
그러나 당신이 언제든지 오실 줄만은 알어요.
나는 당신을 기다리면서 날마다 날마다 낡아 갑니다.

나는 나룻배
당신은 행인.

- 1926년 시집 <임의 침묵> (회동서관)

(c)2008E.Kim

from my lovely and precious daughter to mom


늘 보고싶지만 그렁그렁 맺힌 눈물처럼 유달리 그리운 날이 있다.
주섬주섬 딸아이가 11년 전 만들어 준 작은 책을 들여다 본다.


T. S. Eliot의 황무지(The Waste Land)를 그림으로 그려서 책으로 만들어  여름방학 때 가져왔었지.
이 세상에서 단 하나 뿐인 제일 멋지고 감동적이고 소중한 책.
모든 페이지가 다 예술이지만  몇페이지만 올려본다.

Thank you. You are so special!

워크숍 장소가 압구정동으로 변경되었습니다.

참여자들께는 개별 연락이 갈 것입니다. 착오 없으시길 바랍니다.

 

 

2019 봄,  이봉희 교수의 글쓰기문학치료 워크숍

셀프케어 글쓰기:  "내 마음을 만지다"  

<셀프케어(self-care) 글쓰기란 스스로 자기를 돌보고 사랑하는 문학치료 프로그램입니다.>

 

나는 아프다고 말하지 못할까요?

왜 나는 연약하며 도움을 필요로 한다고 말하면 안되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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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글쓰기문학치료 연구소는 K. 애덤스의 저널치료센터(CJT-Center for Journal Therapy)의 한국지소(CJT-Korea)로 애덤스의 [저널치료기법]을 교수하거나 치료모임을 할 수 있는 합법적 자격을 가진 국내 유일한 연구소입니다.

 

국내유일의 미국 공인문학치료전문가(CPT)/공인저널치료전문가(CJT)이며 상담심리사(한국상담심리학회)인 이봉희 교수의 글쓰기문학치료 워크숍은 시치료와 저널테라피(그림저널 포함)를 활용한 집단상담워크숍입니다.

 

이 워크숍은 모여서 좋은 시나 글을 함께 읽고 감상과 의견을 나누고, 글을 쓰고,  차를 나누고 맛있는 음식을 나누거나, 또는 쓴 글을 모아 문집을 만드는 것과 같은 교제 중심의 모임이 아닙니다. (따라서 개인정보보호를 위해 이 블로그에는 워크숍 사진이나 이를 활용한 광고가 없습니다. )

 

이 워크숍은 공인 문학치료 전문가이며, 수십년간의 교수생활, 지난 13년간 어린이, 청소년, 대학생, 다양한 연령층의 성인남녀, 고령자 어르신들까지 수많은 분들을 대상으로 한 글쓰기문학치료 워크숍과 상담, 특강, 대학원 강의의 경력을 가진 치료전문가가 주관하는 전문적 치료모임입니다.  (모임에서 쓴 글은 사적인 글이므로 외부로 공개되지 않는 것이 원칙입니다.)

 

이봉희 교수에 대한 소개와 경력은 공지사항 [연구소 소개]에 자세히 나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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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일시: 5/1~5/22일 4회 매주 수요일 저녁 7:00-9:00

   

2. 장소: 서울 (강남구 압구정동-  자세한 사항은 개별연락드립니다.)

     

3. 준비물: 줄쳐지지 않은 A4용지 크기의 공책. 혹은 스케치북+ 12가지 사인펜이나 유성펜

 

4.  신청:  <6명 이내로 선착순마감>

 

   이메일  journaltherapy@hanmail.net로 신청.

   또는 이곳에 비밀댓글로 신청. (단, 전화번호와 성함을 남기시되 개인정보보호를 위해

   반드시 비밀댓글 사용)

 

5. 참고도서:

         [내마음을 만지다: 이봉희교수의 문학치유 카페]-문화체육관광부 우수교양도서선정

         [분노치유] 이봉희 역 /학지사

         페니베이커의 [글쓰기치료] 이봉희역/학지사 

         [교사를 위한 치유저널] 이봉희역/학지사 외   


 

6. 기타 자세한 문의: journaltherapy@hanmail.net

 

7. 워크숍에 대한 참여자 인터뷰는

   http://journaltherapy.org/2958,

   https://www.journaltherapy.org/1263 참고 
   저서 [내 마음을 만지다]에 대한 리뷰들은 http://www.journaltherapy.org/2779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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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마음을 들어 준 적 없는 나,

내 감정을 받아주고 제대로 표현해보지 못하고 살아온 나,

그래서 점점 내가 누구인지 잊어버리고 누군가가 원하는 삶만 살고 있는 나,

자꾸 외롭고 우울해지는 나,

다 잊은 줄 알았던 갈등과 상처를 해결하고 싶은 나,

자존감이 낮아서   평생 타인의 인정과 사랑을 갈구하는 나,

머리로는 아는데 늘 나도 어찌하지 못하는 나,

관계 문제로 고통받는 나,

이제는 더 이상 이렇게 계속 나를 방치하고 살 수는 없는 나.........

 

 

이젠 당신도 아프다고 말하셔도 좋습니다.  

photo by bhlee

 


목련을 습관적으로 좋아한 적이 있었다.
잎을 피우기도 전에 꽃을 먼저 피우는 목련처럼
삶을 채 살아보기도 전에 나는
삶의 허무을 키웠다
목련나무 줄기는 뿌리로 부터 꽃물을 밀어올리고
나는 또 서러운 눈물을 땅에 심었다
그래서 내게 남은 것은 무엇인가
모든 것을 나는 버릴 수 있었지만
차마 나를 버리진 못했다

목련이 필 때쯤이면
내 병은 습관적으로 깊어지고
꿈에서 마저 나는 갈 곳이 없었다
흰 새의 날개들이 나무를 떠나듯
그렇게 목련의 흰 꽃잎들이
내 마음을 지나 땅에 묻힐 때
삶이 허무한 것을 진작에 알았지만
나는 등을 돌리고 서서
푸르른 하늘에 또 눈물을 심었다

[목련 -류시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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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을 채 살아보기도 전에 나도 삶의 허무를 키웠다.
무엇 때문이었을까?
열정을 다 해 산다고 삶이 허무하지 않다는 것은 아니었다.
뜨거운 열정의 불꽃 한가운데에는
타지 않는 차가운 파란 허무가 눈을 뜨고 있다는 것을
나도 일찍부터 알았다.

 

어쩌면
그 허무가 나를 지켜준 것인지도 모르겠다.

이 세상 욕심에서 자유롭도록....

(032415)

 


 

<[photo by bhlee>

 

  

여릿여릿 봄이 오는데

설렘으로 피어나는 눈부신 생명 곁에서 나는

조용히 사라져가는 것들에게 눈길이 간다. 

곧 스러질 것, 잊혀질 것들의 아름다움에,  

추억이 더 많은 고독에

뒤돌아보며 돌아보며

자꾸 마음이 따라 간다.

 

나무는 - 류시화

 

나무는
서로에게 가까이 다가가지 않기 위해
얼마나 애를 쓰는 걸까
그러나 굳이 바람이 불지 않아도
그 가지와 뿌리는 은밀히 만나고
눈을 감지 않아도
그 머리는 서로의 어깨에 기대어 있다.

 

나무는
서로의 앞에서 흔들리지 않기 위해
얼마나 애를 쓰는 걸까
그러나 굳이 누가 와서 흔들지 않아도
그 그리움은 저의 잎을 흔들고
몸이 아프지 않아도
그 생각은 서로에게 향해 있다

나무는
저 혼자 서 있기 위해
얼마나 애를 쓰는 걸까
세상의 모든 새들이 날아와 나무에 앉을 때
그 빛과
그 어둠으로
저 혼자 깊어지기 위해 나무는
얼마나 애를 쓰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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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

  我有一卷經(아유일권경}
  不因紙墨成(불인지묵성)
  展開無一字(전개무일자)
  常放大光明(상방대광명)

  나에게 한 권의 경전이 있는데
  그것은 종이나 활자로 된 게 아니다
  펼쳐보아도 한 글자 없지만
  항상 환한 빛을 발하고 있네

 

 (서산대사의 운수단가사에 나오는 구절이라고 함) 


 

내가 으스러지게 설움에 몸을 태우는 것은
내가 바라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그 으스러진 설움의 풍경마저 싫어진다.

나는 너무나 자주 설움과 입을 맞추었기 때문에
가을바람에 늙어가는 거미처럼 몸이 까맣게 타버렸다.

[거미- 김수영]

[별, 이별- 마종기]

 

열매를 다 털어낸 늙은 나무가
마지막 숨을 몰아쉬기 시작한다.
시든 나무 그늘도 떠날 준비를 하고
가지 사이 거미도 거미줄을 걷어들일 즈음,
우울한 부나비 한 마리 날개 접고
새들이 날아간 석양 쪽을 바라본다.

잠시 잠들었었나, 잠시 죽었었나
모든 사연이 휘발한 땅이 그새 문 닫고
피곤에 눌려 커다란 밤 장막을 내린다.
아. 그러나, 우리는 손해본 게 아니었구나.
청명 밤하늘의 이 별들, 무수한 환희들!
헤어진 별 옆에서 새로 만난 별이 웃고
집 떠난 밝은 유성은 잠시 발 멈추고
죽어가는 나무에게 가볍게 입맞춤한다.

갑자기 나무 주위에 환한 꽃향기 넘치고
누군가 만 개의 새 별들을 하늘에 뿌렸다.
어디선가 고맙다, 고맙다는 메아리 울리고------.

가장 정이 많이 든, 교실에서 참 많이 울고 또 웃고 따뜻한 추억이 가장 많은 대학원 선생님들과 함께!

 

6명의 논문지도로 정말 함께 힘들었던 지난학기의 모든 일들도 다 추억이 되었다. 수고하셨어요.

부쩍 성장하신 선생님들 정말 좋은 문학치료사가 되실 것을 믿으며....   여러분들이 자랑스럽습니다. (2019. 2.)

 

 

 

 

 


 

 

시가 있는 마음 풍경: 그림저널쓰기

(c)2009BongheeLee

 

 

 

이봉희, PhD

미국공인문학치료전문가(CPT)

공인저널치료전문가(CJT)

상담심리사

나사렛대학교대학원 문학치료학과 교수

한국글쓰기문학치료연구소 소장 

 

 

 

저널치료의 기법 중에는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쓰는 그림저널이 있다. 치료로서의 글쓰기와 마찬가지로 자신만의 저널에 그리는 그림은 자기표현의 수단이지 남을 보이기 위한 좋은 그림을 그리는 것이 아니다. 나는 그림을 그린 적이 없다. 그림을 무척이나 좋아하고 또 화가들을 무척 부러워하는 것도 사실이지만 미술시간에 특별한 칭찬을 받아본 적도 없다. 하지만 때로 언어가 더 이상 갈 수 없는 언덕 끝에 서는 날은 저널에 그림을 그린다. 이곳에 나의 해묵은 그림저널 중에서 시와 연관된 단상 몇 개를 실어본다. 어떤 글은 신문에 연재되었던 본인의 문학칼럼에서 가져온 것도 있다.

 

 

I. 집이 없었다.

 

(그림: 이봉희)

 

외딴 곳

집이 없었다

짧은 겨울날이

침침했다

어디 울 곳이

없었다 (김용택 - 슬픔)

 

지난주는 갑자기 눈보라가 쳤다. 슬픈 재즈 같이 젖은 눈이 아프다는 소리도 없이 잿빛 바람에 마구 휩쓸려 불려 다녔다. 누군들 곱게 하얗게 내려 쌓이고 싶지 않을까....

세상은 온통 고장 난 시계처럼 하루 종일 희미한 눈을 뜨고 있었다. 다 타고난 재가 불어오고, 불려 다녔다. 공연히 해묵은 아픔이 가슴을 적셨다. 이 작은 냉기에도 마음이 또 다시 위축된다. 하루하루 손에 남은 건 녹아버린 눈송이 같은 젖은 방울 몇 점 뿐.

해 놓은 일도, 남겨진 것도 없이 무산된 계획만 헛손질하며 가버리는 하루, 하루, 그리고 또 하루....늘 손잡아 주던 엄마가 이젠 혼자 가라고 나를 남겨둔 정류장 앞에 선 어린아이처럼 초조하고 불안하기도 하다. 이런 날은 어려서부터 공연히 서둘러 집에 가고 싶었던 기억이 난다. 시인은 그런데 집이 없었다고 한다.

외딴 곳에 홀로 남겨진 것처럼 늘 반복되는 일상의 삶이 갑자기 낯설게 느껴지는 날이 있다. 익숙하던 길이 갑자기 보이지 않는 날이 있다. 잿빛 바람이 불고 날은 쉽게 어둑어둑해지는 겨울날이 우리 삶의 여정에는 누구에게나 있다. 외딴 곳, 침침한 곳에서 시인이 집을 찾는 이유는 울 곳이 필요해서이다. 우리 모두 길을 잃은 듯 외로운 날, 서로에게 집이 되어주면 좋겠다고 시인은 말하고 있는지 모른다. 서로에게 이슬을 막아주는 지붕이 되고 기대어 울 수 있는 벽이 되고 희망이 될 수 있는 동으로 난 작은 창이 되어 이 외딴 세상에서 살아가면 좋겠다는 소망으로 내 맘대로 시를 고쳐 써본다. “외딴 곳, 짧은 겨울날이 침침했다. 작은 창에 불이 켜졌다. 나는 그대의 가슴에 들어가 내 이름 없는 설움을 비워내며 조용히 울었다.” (2005)

 

 

II. 나도 시를 쓰고 싶다.

 

"갈매기가 푸른 하늘에 를 쓰고 있다.

나도 시를 쓰고 싶다."

 

어느 누구의 시인지 모른다. 다만 대학시절 노트 표지에 적어 두었던 인 것만 기억한다. 시인은 어느 날 시를 쓰기 위해, 아니 어쩌면 사랑하는 이에 대한 묘사를 하기 위해 애를 써 본다. 이렇게 표현해도 저렇게 그려봐도 사랑하는 그 사람에 대한 마음을 다 표현하기에는 부족한 언어의 한계를 느낀 시인은 아무 것으로도 채우지 못한 작은 하얀 종이를 내려다보다가 절망하고 만다. 그리곤 피곤한 눈을 들어 푸른 하늘을 바라본다. 그 때 시인은 놀랍게도 갈매기가 그 넓은 푸른 종이 위에 시를 적고 있는 것을 보았다.

시인이 발견한 시는 무엇이었을까. 갈매기는 하늘 위에서 사랑한다고 언어로 시를 쓴 것이 아니다. 세상을 향해 소리 높여 노래와 찬양을 한 것도 아니다. 갈매기는 다만 푸른 하늘 위를 날고 있었을 뿐이다. 그래, 바로 이것이 시인이 발견한 시였다. 시인은 갈매기의 삶 자체, 그의 존재 자체가 하나의 시가 된 것을 깨달은 것이다.

독일의 한 철학자는 신들의 말, 우주의 말을 눈짓이라고 표현하면서 시인은 이러한 눈짓을 포착해서 다시 사람들에게 눈짓으로 전하는 것이라고 했다. 사랑하는 사람들은 서로 닮아간다. 그렇기에 우리가 가장 존경하고 사랑하는 대상에 대한 나의 사랑의 표현, 즉 나의 시는 바로 그렇게 그 대상을 닮은 눈짓과 날갯짓이어야 한다.

말보다 더한 나의 삶으로, 그분의 모습 닮은 내 존재 자체로 쓰는 시, 이것이야말로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이 세상에서 내가 평생토록 써야 하는 연작시이라는 것을 저 짧은 한 줄의 시가 어느 날 내게 깨우쳐주었다. 횔더린은 빵과 포도주라는 비가(悲歌)에서 '이 궁핍한 시대에 누구를 위한 시인인가?'라고 묻고 있는데 이 가난한 시대에 그 분을 위해 연약한 나는 어떤 시가 되어 살아가야 하나 눈감고 기도해본다.

제 영혼은 저 높은 곳을 향해 푸드덕거리는 어린 새입니다. 세상이 나를 땅위에 묶어 놓을 수 없게 높이 나는 새가 되고 싶습니다. 이 세상이 감당치 못하는 그런 새처럼 살고 싶습니다. 저에게 힘찬 날개를 달아 주세요. 자유로이 저 높은 창공 위에 시를 쓸 수 있도록. 나의 삶 자체가 당신께 바치는 진실 되고 아름다운 시가 되도록.”

 

III. 나는 슬픔은 건널 수 있어요

 

나는 슬픔은 건널 수 있어요

가슴까지 차올라도

익숙하거든요.

하지만 기쁨이 살짝만 날 건드리면

발이 휘청거려 그만

넘어집니다취해서.

조약돌도 웃겠지만

맛 본 적 없는 새 술이니까요

그래서 그런 것뿐입니다.

(에밀리 디킨슨-“나는 슬픔은 건널 수 있어요일부/필자 역)

 

 

(그림:이봉희)

 

 

내가 가장 좋아하는 시인을 몇 꼽으라면 주저 없이 에밀리 디킨슨을 떠올린다. 에밀리 디킨슨을 알게 된 것은 아버지가 돌아가셨던 대학교 2학년 때 한 선배가 편지에 적어 보내준 시(A Bustle in a House)를 통해서이다. 나는 곧 이 여자에게 매료되고 말았다. 평생을 자신이 태어난 곳과 집을 떠나 살아 본 적이 없는 여자. 항상 흰 옷을 입었다고 알려진 여자. 이루어질 수 없는 한 사람을 사랑하고 혼자 살았던 여자. 그런데 그녀의 시는 마음 깊은 곳과 저 먼 우주를 종횡하고 있다.

영혼의 여행자인 에밀리 디킨슨의 시, “나는 슬픔은 건널 수 있어요는 나이가 들도록 여전히 내 곁을 지켜주는 오랜 친구 같은 노래이다. 저벅저벅 가슴에 출렁이는 물을 건너 하룻길 삶을 살다가 문득문득 목이 차오르면 꺼억꺼억 울며 나는 물새들이 부러웠다. 그 때마다 나는 꺼억꺼억 우는 대신 이 시를 중얼거리곤 했다. 나는 슬픔은 저벅저벅 건널 수 있어.......그래, 익숙잖아. 뭘 새삼.

위태롭게 금이 간 유리병 같은 내 몸엔 항상 물이 넘칠 듯 고여 있어서 누군가와 부딪히지 않으려고 늘 홀로 걸었다. 황혼이 너무 뜨거워, 고개 숙인 내 눈길을 맞아주는 풀 섶에 숨은 좁쌀만큼 작은 꽃이 너무 반가워, 새벽 별이 너무 시려, 누군가 무심코 던진 한마디가 너무 따스해, 아무 뜻 없이 지나가는 바람일 뿐인데 꼭꼭 덮어둔 간절한 마음이 펄럭여.... 그만 삐걱하고 발을 헛디디며 흔들리면, 바보처럼 휘청거린 나에게 말해주곤 했다. 괜찮아. 그럴 수도 있지. 맛보지 못한 새 술이잖아. 다시 꼿꼿이 걸어가면 돼.

나는 거인도 아니며 거인이 되고 싶지도 않지만 내 삶은 늘 그것을 내게 요구하는 듯 했다. 그리고 사람들은 말한다. 그건 당신이 그렇게 선택한 것이라고.

거인들에게 향유를 주어보세요/ 평범한 인간들처럼 나약해질 테니./ 그들에게 히말라야 산을 주면/그 산을 번쩍 들고 갈 것입니다.” (2008)

 

 

IV. 여러 개의 언어를 알았으면 했지

 

사람들의 끝없는 잡담. 퍼붓는 그 위로 나는 쓰러진다. 그들은 공허하게 지껄이고 또 되뇐다. 얼굴을 맞대고 있으나 눈길은 서로 다른 곳을 향하며 각자의 이야기를 쏟아내는 사람들. 그들이 들어줄, 혹은 들을 수 있는 귀를 갖게 된다면?” (마틴 발저)

 

 

(그림:이봉희)

 

물질문명, 고도로 성장한 기계문명이 낳는 인간사이의 단절을 단적으로 예견하는 신화가 있다. 바로 황금의 손, 마이다스(Midas) 이야기다. 경제계에서 마이다스의 손'은 황금알을 낳는 성공자를 일컫는 말이지만 다른 측면에서 보면 그 만큼 비극적인 인물도 없다. 손으로 만지는 것마다 금으로 변하는 바람에 사랑하는 딸조차 금으로 변하고 마는, 가장 사랑하는 사람과의 관계, 접촉마저 불가능한 저주로 변한 물질과 성공의 축복이기 때문이다. 마이다스는 인간과 인간사이의 접촉 불가능성을 비극적으로 보여주는 신화의 인물이다.

오늘날 우리는 고도로 발달된 기계문화 속에서 인류역사상 어느 때 보다도 그 문명의 혜택을 누리고 산다. 이제는 내 책상에서 세계로 가는 창인 컴퓨터로도 모자라 손에 들고 다니는 작은 기계 속에 온 세상이 들어와 있고, 타인과의 의사소통의 통로가 열려있다. 내 손안에 들어온 세계. 그러나 잠깐 멈춰 서서 생각해보면 내 손안에 세계가 들어온 것이 아니라 하이테크시대의 거대한 기계문명의 손바닥 속, 가상공간이 만들어 내는 환상의 손바닥 속에 우리가 갇혀있는지도 모른다.

인간들은 갈수록 소외되고 의사소통은 무의미한 언어들로 단절되고 있다. 난무하는 말장난들, 기호들, 부호들, 은어들, 거짓말들이 언어의 폭력이 되어 우리의 귀를 오염시켜버렸다. 하이데거의 말대로 진정 존재를 지키는 파수꾼인 시인들은 없는 것일까? 의사소통의 가장 중요한 수단인 언어는 너무나 허망한 그리고 때로는 위험한 암호라는 생각이 든다. 그 말을 하는 사람의 진심을 알 수 없다면. 추측은 고통이다. 그렇기에 추측하도록 버려두는 것은 무례한 행동을 상대에게 부추기는 잔인한 일 일수도 있다.

그래서 때로 말이 무섭다. 제 맘대로 오해를 불러오는 괴물 같기도 하다. 아니면 사람들이 각자 암호이며 부호(sign. cipher)인 언어에 제 생각의 숨결을 불어넣어 원하는 대로 자의적으로 살려내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각자 자신의 프랑켄슈타인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그리고는 프랑켄슈타인과 같은 "자의적인 해석에 따른 의미"를 살아있는 사람보다 더 중요시해서 자신이 만든 괴물이 살아있는 생명을 잡아먹게 하고 있다. 모두가 인간 대 인간의 진실 된 의사소통의 수단인 언어가 하이테크시대의 기기들을 매개로, 그리고 그 문화와 문명이 부추기는 가짜 욕망과 일회용 인스턴트 희망을 매개로 왜곡되고 소외되었기 때문이다. 인간들을 소외시키기 때문이다.

왠지 사람들의 거짓언어에 지쳐버린 오늘은 나도 마틴 발저의 말처럼 진실을 말할 수 있는 새로운 언어를 가지고 싶다. “여러 개의 언어를 알았으면 했지. 내가 나와 이야기를 나눌 때만 사용할, 그 누구도 이해할 수 없는, 내 심연의 언어와 알 수 없는 먼 나라에서 온 사람들과도 이야기를 나눌, 수많은 낯선 말, 말들을.(마틴 발저)”(2006)

 

 

V. 그대에게 가고 싶다.

 

해 뜨는 아침에는

나도 맑은 사람이 되어

그대에게 가고 싶다

그대 보고 싶은 마음 때문에

밤새 퍼부어 대던 눈발이 그치고

오늘은 하늘도 맨 처음인 듯 열리는 날

나도 금방 헹구어낸 햇살이 되어

그대에게 가고 싶다

 

그대 창가에 오랜만에 별이 들거든

긴 밤 어둠 속에서 캄캄하게 띄워 보낸

내 그리움으로 여겨다오

사랑에 빠진 사람보다 더 행복한 사람은

그리움 하나로 무장무장

가슴이 타는 사람 아니냐

 

사랑이란

또 다른 길은 찾아 두리번거리지 않고

그리고 혼자서는 가지 않는 것

지치고 상처입고 구멍 난 삶을 데리고

그대에게 가고 싶다. (안도현-‘그대에게 가고 싶다일부)

 

 

 

(그림:이봉희)

 

밤 새 눈이 왔다. 오늘 아침 눈을 떠보니 거짓말처럼 창문 가득 부신 햇살이 맘속의 그리움을 깨워준다. 밤새 가슴속에서 퍼붓던 잿빛 번민의 눈발을 그치고 햇살이 가득한 아침을 열 때는 누구나 저 햇살처럼 방금 헹구어낸 희망이 되어 그대에게 찾아가고 싶을 것만 같다. 나도 내 영혼의 긴 긴 밤 어둠 속에서 시리도록 쌓이던 절망으로 인해 그 누구의 창가엔가 빛나는 희망의 별로 뜰 수 있다면 좋겠다고 소망해본다.

우리는 무엇인가 사랑하지 않고는 살 수 없는 존재란 생각을 한다. 그것이 일이든, 사람이든, 예술이든, 사람들은 무엇엔가 마음을 주고 그리워하지 않고는 하루하루 살아있는 느낌을 가질 수가 없다. 그리움은 우리를 영원히 살아있게 하는 힘이요 희망이니까. 무엇과의 이별이든 이별의 슬픔은 다름 아닌 희망의 상실, 그리워할 무엇의 상실이다. 그래서 신경숙의 소설, 깊은 슬픔에 나오는 한 시인도 그리워할 그 무엇을 잃었을 때 삶이 지옥과도 같았다고 말한다. 그리워할 무엇이 없어 가슴이 사막이 되거나 눈보라치는 잿빛하늘이 되는 것보다는 영원히 잡히지 않아도 그리워하며 바라볼 별 하나 가슴에 띄우고 사는 사람은 행복하다. 그래서 어쩌면 사랑에 빠진 사람보다 더 행복한 사람은 무장무장 가슴이 타는 사람이라고 시인은 말하는 것일까.

오늘 밤엔 내 맘 창가에도 오랜만에 별이 들까? 아니면 그 누군가의 창가에 내 그리움이 별이 되어 찾아갈 수 있을까? 그리워할 무엇이 있음에 감사하면 좋겠다. 우리 모두가 그리움하나로 무장무장 타는 가슴이 오히려 행복임을 알 수 있다면 좋겠다. (2006)

 

 

VI. 자아의 감옥

 

문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난 열 수가 없었습니다. 손잡이를 만질 수가 없었습니다.

나는 왜 나의 감옥에서 걸어 나가지 못했던 것일까요?

무엇이 지옥입니까? 지옥은 우리 자신입니다.

지옥은 혼자입니다. 그곳의 다른 이들은

단지 투영된 그림자들일 뿐. 도망쳐 갈 것도 없고

도망하여서 갈 곳도 없습니다. 누구나 언제나 혼자니까요.

(T. S. 엘리엇, 칵테일 파티중 에드워드의 대사/필자 역)

 

 

(그림:이봉희)

 

문은 열려있는지도 모른다. 내가 절망하는 것이 습관이 되어서 이젠 문이 열려있는데도 외면하고 무기력하게 앉아서 날아가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어서 설거지를 하다말고 책상 앞에 앉아 그림을 그렸다. 새장을 그리고 열린 문을 그리고 횃대에 문을 외면하고 돌아앉아 눈을 감고 절망만하고 있는 새를 그렸다. 그래도 희망을 그리고 싶어서 파랑새로 그렸다. 그런데 어느새 내가 쇠창살을 그리는 대신 나무들을 그려 넣고 있었다. 숲이었다. 비록 나뭇잎이 무성하지는 않아도 새가 갇힌 곳은 새장이 아니라 숲이었다. 그래, 새는 갇혀있는 것이 아닌지 모른다. 맘껏 날 수 있는 숲인데 스스로 눈을 감고 자신의 무기력을 새장에 갇혀서라고 합리화시키는 것이다.

그런데 그림을 그리고 다시 생각해보니 어쩌면 나는 내가 갇힌 쇠창살 감옥이 고통스러워 숲이라는 환상을 만들어낸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어떤 경우든 문은 열려있다. 나는 날갯짓을 해야 한다. 이 자아의 감옥에서 나와야 한다. “당신이 자신의 적이 아닌 한/ 당신을 묶은 속박은 당신의 의식/ 자유도 마찬가지다. (E. 디킨슨)” (2007)

 

 

                         

오늘을 위한 기도

오늘 하루의 숲속에서
제가 원치 않아도
어느새 돋아나는 우울의 이끼,
욕심의 곰팡이, 교만의 넝쿨들이
참으로 두렵습니다.

그러하오나 주님,
이러한 제 자신에 대해서도
너무 쉽게 절망하지 말고
자신의 약점을 장점으로 바꾸어가는
끗끗한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게 하소서.

어제의 열매이며
내일의 씨앗인 오늘

하루의 일과를 끝내고
잠자리에 들때는
어느날 닥칠 저의 죽음을
미리 연습해 보는 겸허함으로
조용히 눈을 감게 하소서.

'모든 것에 감사했습니다'

                               -이해인

동안(童顔),

그리고 마스크

 

   
  이탈리아의 작가 피란델로는 『각자 자기방식대로』의 주인공을 통해 "변해 가는 나를 바라보는 것이 너무나 부끄러워 나는 끊임없이 나 자신에게 내 얼굴을 감춘다"라고 말합니다. 이러한 수치심은 시간이 갈수록 더해집니다. 왜냐하면 시간은 늙음이라는 변화를 즉각 인간의 모습에 판화처럼 새겨 넣기 때문이지요.

   또 다른 극의 인물을 통해 피란델로는 늙음은 “인간의 차원으로 축소시킨 고통스런 시간”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당신은 모를 겁니다. 늙은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거울 앞에서 자신을 바라보았을 때 느끼는 그 쓰라린 경험을. 기억력이 사라짐에 대한 놀라움보다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는 슬픔이 더 크다는 것을 알게 되는 그 때의 경험을. 늙은 육체 속에 젊고 뜨거운 심장을 느낄 때의 그 외설적인 수치심을 당신은 모릅니다."(『내가 다른 사람일 때』)

   육체는 형상입니다. 그러나 그 형상은 무엇이든 삼키는 굶주린 시간의 눈 아래서 변하는 형상입니다. 시간을 멈추기 위해, 정지하기 위해, 피란델로의 인물들은 마스크를 씁니다. 마스크'의 역할연기를 통해 그들의 부끄러운 '얼굴'을 가려주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작가의 주인공들은 서글픈 피에로처럼 그로테스크해보입니다.       

.........

  진정한 동안(童顔)은 마음의 순수함과 따뜻함을 유지한 사람들에게서 느껴지는 것이겠지요.   시기와 질투, 허세로 가득한 자기기만의 마스크를 쓴 얼굴이 아무리 주름이 없다한들 “어리고 아름답다”고 여겨지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나의 겉 사람은 후패하나 속사람은 날로 날로 새롭다(젊어진다)’고 말한 바울의 당당함을 기억하고 싶습니다.  남들이 보지 않는 나만의 거울 앞에 설 때, 아니, 나 자신의 환상의 거울도 아닌 나의 참 얼굴을 비추는 거울 앞에 설 때, 그 때 그 거울에 비칠 내 후패하지 않은 “얼굴”을 위해 오늘도 깨끗하게 세수하고 단장하고 싶습니다.
(Denver 중앙일보 이봉희 문학칼럼, '내 영혼의 작은 새' 중에서)

by bhlee

 

[겨울눈 나무숲-기형도]


눈(雪)은
숲을 다 빠져나가지 못하고
여기 저기 쌓여 있다.
'자네인가,
서둘지 말아.'
쿵, 그가 쓰러진다.
날카로운 날(刃)을 받으며.
나는 나무를 끌고
집으로 돌아온다.
홀로 잔가지를 치며
나무의 沈默(침묵)을 듣는다.
'나는 여기 있다.
죽음이란
假面(가면)을 벗은 삶인 것.
우리도, 우리의 겨울도 그와 같은 것'
우리는
서로 닮은 아픔을 向(향)하여
불을 지피었다.
窓(창)너머 숲 속의 밤은
더욱 깊은 고요를 위하여 몸을 뒤채인다.
내 淸潔(청결)한 죽음을 確認(확인)할 때까지
나는 不在(부재)할 것이다.
타오르는 그와 아름다운 距離(거리)를 두고
그래, 心臟(심장)을 조금씩 덥혀가면서.
늦겨울 태어나는 아침은
가장 完璧(완벽)한 自然(자연)을 만들기 위하여 오는 것.
그 後(후)에
눈 녹아 흐르는 방향을 거슬러
우리의 봄은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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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네인가.. 서둘지 말아... 그가 날카로운 날을 받으며 쿵, 쓰러진다.  나는 그를 끌고 집으로 와 홀로 그의 몸의 잔가지를 치며 그의 침묵을 듣는다. 서로 닮은 아픔을 향해 불을 지피며, 타오르는 그와 아름다운 거리를 두고 심장을 조금씩 덥혀가야지.  그렇게 나무와 함께 청결한 죽음을 확인할 때까지 나는 존재하지 않으려 한다. 녹아 흐르는 겨울 눈을 거슬러 봄이 다가오는 그때 나 다시 존재하기 시작할 것인가?

(120211) 

어느 영혼이기에 아직도 가지 않고 문밖에서 서성이고 있느냐. 네 얼마나 세상을 축복하였길래 밤새 그 외로운 천형을 견디며 매달려 있느냐. 푸른 간유리 같은 대기 속에서 지친 별들 서둘러 제 빛을 끌어모으고 고단한 달도 야윈 낫의 형상으로 공중 빈 밭에 힘없이 걸려있다.

아느냐, 내 일찍이 나를 떠나보냈던 꿈의 짐들로 하여 모든 응시들을 힘겨워하고 높고 험한 언덕들을 피해 삶을 지나다녔더니, 놀라워라. 가장 무서운 방향을 택하여 제 스스로 힘을 겨누는 그대, 기쁨을 숨긴 공포여, 단단한 확신의 즙액이여.

보아라, 쉬운 믿음은 얼마나 평안한 산책과도 같은 것이냐. 어차피 우리 모두 허물어지면 그뿐, 건너가야 할 세상 모두 가라앉으면 비로소 온갖 근심들 사라질 것을. 그러나 내 어찌 모를것인가. 내 생 뒤에도 남아있을 망가진 꿈들, 환멸의 구름들, 그 불안한 발자국 소리에 괴로워할 나의 죽음들.

오오, 모순이여, 오르기 위하여 떨어지는 그대. 어느 영혼이기에 이 밤 새이도록 끝없는 기다림의 직립으로 매달린 꿈의 뼈가 되어있는가. 곧 이어 몹쓸 어둠이 걷히면 떠날 것이냐. 한때 너를 이루었던 검고 투명한 물의 날개로 떠오르려는가. 나 또한 얼마만큼 오래 냉각된 꿈속을 뒤척여야 진실로 즐거운 액체가 되어 내 생을 적실 것인가. 공중에는 빛나는 달의 귀 하나 걸려 고요히 세상을 엿듣고 있다. 오오, 네 어찌 죽음을 비웃을 것이냐 삶을 버려둘 것이냐, 너 사나운 영혼이여! 고드름이여

기형도 - 이 겨울의 어두운 창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