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두- 도종환 

 

초록은 연두가 얼마나 예쁠까?

모든 새끼들이 예쁜 크기와 보드라운 솜털과

동그란 머리와 반짝이는 눈

쉼 없이 재잘대는 부리를 지니고 있듯

갓 태어난 연두들도 그런 것을 지니고 있다

연두는 초록의 어린 새끼

어린 새끼들이 부리를 하늘로 향한 채

일제히 재잘거리는 소란스러움으로 출렁이는 숲을

초록은 눈 떼지 못하고 내려다본다 

처음처럼 - 신영복

 

처음처럼..
처음으로 하늘을 만나는 어린 새처럼.
처음으로 땅을 밟는 새싹처럼
우리는 하루가 저무는 겨울 저녁에도
마치 아침처럼. 새봄처럼. 처음처럼.
언제나 새날을 시작하고 있다.

오랑캐꽃 - 조운

 

넌지시 알은 채 하는

한 작은 꽃이 있다

 

길가 돌담불에

외로이 핀 오랑캐꽃

 

너 또한 나 보기를

너 보듯 했더냐.

반 고흐, 빗속의 밀밭(1889)

 

 

ㅡㅡ

 

비가 오고 있다

여보

움직이는 비애를 알고 있느냐

 

<김수영, "비" 에서>

사막  -  정호승 

 

들녘에 비가 내린다

빗물을 듬뿍 머금고

들녘엔 들꽃이 찬란하다

사막에 비가 내린다

빗물을 흠뻑 빨아들이고

사막은 여전히 사막으로 남아 있다

받아들일 줄은 알고

나눌 줄은 모르는 자가

언제나 더 메말라 있는

초여름

인간의 사막 

2004Kangsan-reprinted here for therapeutic and/or educational purposes only

(그림은 제가 너무너무나 좋아하는 강산님의 저작권이 있는 그림이며 이곳에 오직 치료적/교육적 목적으로만 게시되었습니다.)

www.jamsan.com

 

 

 

.....
가야 하나? 그럼 어디로 가나?

이때 뚜우 하고 정오 사이렌이 울었다. 사람들은 모두 네 활개를 펴고 닭처럼 푸드덕거리는 것 같고 온갖 유리와 강철과 대리석과 지폐와 잉크가 부글부글 끓고 수선을 떨고 하는 것 같은 찰나, 그야말로 현란을 극한 정오다.

나는 불현듯이 겨드랑이가 가렵다. 아하, 그것은 내 인공의 날개가 돋았던 자국이다. 오늘은 없는 이 날개, 머리 속에서는 희망과 야심의 말소된 페이지가 딕셔너리 넘어가듯 번뜩였다.

나는 걷던 걸음을 멈추고 그리고 어디 한번 이렇게 외쳐 보고 싶었다.

날개야 다시 돋아라.

날자.날자.날자. 한 번만 더 날자꾸나.

한 번만 더 날아 보자꾸나.  (이상- '날개' 중에서)

 

어둠- 장옥관

 

웬일로 밤늦게 찾아온 친구를 배웅하고 불 끄고 자리에 누우니 비로소 스며든다 반투명 셀로판지 같은 귀 엷은 소리, 갸녈갸녈 건너오는 날개 비비는 소리, 달빛도 물너울로 밀려든다

 

아하, 들어올 수 없었구나!

 

전등 불빛 너무 환해서 들어올 수 없었구나 어둠은, 절절 끓는 난방이 낯설어서 발붙일 수 없었구나 추위는,

 

얼마나 망설이다 그냥 돌아갔을까

은결든 마음 풀어보지도 못하고 갔구나 폭포수처럼 쏟아지는 내 이야기에 멍만 안고 돌아갔겠구나

 

 

 

 

 

손님이 없어도 상점의 불빛은 켜져 있다 심야의,

심야극장의 필름은 돌아간다 손님이 없어도

화면 속의 여자는 운다 손님이 없어도

비는 내리고 손님이 없어도

커피 자판기의 불빛은

밤을 지샌다 손님이 없어도

택시는 달리고

손님이 없어도 육교는 젖은 몸을 떨며

늑골처럼 서 있다 손님이 없어도

............

지하철은 달리고

손님이 없어도

삼청공원의 복사꽃은

핀다 흐느끼듯 흐느끼듯

꽃이 피듯이 손님이 없어도

어두운 거리 상점들의 불빛은 켜져 있다

 

오정국, <손님이 없어도 불빛은 켜져 있다> 중에서  

종점 하나 전 - 나희덕

 

집이 가까워 오면

이상하게도 잠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깨어 보면 늘 종점이었다

몇 남지 않은 사람들이

죽음 속을 내딛듯 골목으로 사라져 가고

한 정거장을 되짚어 돌아오던 밤길,

거기 내 어리석은 발길은 뿌리를 내렸다

내려야 할 정거장을 지나쳐

늘 막다른 어둠에 이르러야 했던,

그제서야 터벅터벅 되돌아오던,

그 길의 보도블록들은 여기저기 꺼져 있었다

그래서 길은 기우뚱거렸다

잘못 길들여진 말처럼

집을 향한 우회는 끝나지 않을 것이다

희미한 종점 다방의 불빛과

셔터를 내린 세탁소, 쌀집, 기름집의

작은 간판들이 바람에 흔들렸다

그 낮은 지붕들을 지나

마지막 오르막길에 들어서면

지붕들 사이로 숨은 나의 집이 보였다

 

집은

종점보다는 가까운,

그러나 여전히 먼 곳에 있었다

by bhlee

 

 

그리운 것들이 모두 창 밖에 있다.

창--환상 그러나 절실한 현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