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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전하는 말 - 이해인
 

밤새
길을 찾는 꿈을 꾸다가
빗소리에 잠이 깨었네 
 
물길 사이로 트이는 아침
어디서 한 마리
새가 날아와 나를 부르네 
 
만남보다
이별을 먼저 배워
나보다 더 자유로운 새는 
 
작은 욕심도 줄이라고
정든 땅을 떠나
나를 향해 곱게 눈을 흘기네 
 
아침을 가르는 하얀
빗줄기도 내 가슴에
빗금을 그으며 전하는 말 
 
진정 아름다운 삶이란
떨어져 내리는 아픔을
끝까지 견뎌내는 겸손이라고 
 
오늘은
나도 이야기하려네
함께 사는 삶이란 힘들어도 
 
서로의

다름을 견디면서
서로를 적셔주는 기쁨이라고
 

뒤늦은 편지 -유하

늘상 길 위에서 흠뻑 비를 맞습니다
떠나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떠났더라면,
매양 한 발씩 마음이 늦는 게 탈입니다
사랑하는 데 지치지 말라는 당신의 음성도
내가 마음을 일으켰을 땐 이미 그곳에 없었습니다
벚꽃으로 만개한 봄날의 생도
도착했을 땐 어느덧 잔설로 진 후였지요
쉼 없이 날개짓을 하는 벌새만이
꿀을 음미할 수 있는 靜止의 시간을 갖습니다

지금 후회처럼 소낙비를 맞습니다
내겐 아무것도 예비된 게 없어요
사랑도 감동도, 예비된 자에게만 찾아오는 것이겠지요
아무도 없는 들판에 멍하니 앉아 있었습니다
게으른 몽상만이 내겐, 비를 그을 수 없는 우산이었어요
푸르른 날이 언제 내 방을 다녀갔는지 나는 모릅니다
그리고 어둑한 귀가 길, 다 늦은 마음으로 비를 맞습니다

 

021708



어린 왕자 - 생텍쥐페리 (1900.6.29~1944.7.31)

제 9 장

나는 어린 왕자가 철새들의 이동을 이용하여 별을 떠나왔으리라 생각한다. 떠나는 날 아침 그는 그의 별을 잘 정돈해 놓았다. 불을 뿜는 화산들을 정성스레 쑤셔서 청소했다. 그에게는 불을 뿜는 화산이 둘 있었다. 그런데 그것은 아침밥을 데우는 데 아주 편리했다.
불이 꺼져 있는 화산도 하나 있었다. 그러나 그의 말처럼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그는 그래서 불 꺼진 화산도 잘 쑤셔 놓았다. 화산들은 잘 청소되어 있을 때는 부드럽게, 규칙적으로 폭발하지 않고 타오른다. 화산의 폭발은 벽난로의 불과 마찬가지인 것이다. 물론 우리 지구 위에서는, 우리들의 화산을 쑤시기에는 우리가 너무 작다. 그래서 화산이 우리에게 숱한 곤란을 가져다주는 것이다.

어린 왕자는 좀 서글픈 심정으로 바오밥나무의 마지막 싹들도 뽑아 냈다. 다시는 돌아오지 못하리라 그는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친숙한 그 모든 일들이 그날 아침에는 유난히 다정하게 느껴졌다. 그래서 그 꽃에 마지막으로 물을 주고 유리덮개를 씌워 주려는 순간 그는 울고 싶은 심정이었다.  
「잘있어.」그는 꽃에게 말했다.
그러나 꽃은 대답하지 않았다.
「잘 있어.」그가 되뇌었다.
꽃은 기침을 했다. 하지만 그것은 감기 때문이 아니었다.
「내가 어리석었어. 용서해 줘. 행복해지도록 노력하길 바래. 」이윽고 꽃이 말했다.


비난조의 말들을 들을 수 없게 된 게 어린 왕자는 놀라웠다. 그는 유리덮개를 손에 든 채 어쩔 줄 모르고 멍하니 서 있었다. 꽃의 그 조용한 다정함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래, 난 너를 좋아해. 넌 그걸 전혀 몰랐지. 내 잘못이었어. 아무래도 좋아. 하지만 너도 나와 마찬가지로 어리석었어. 부디 행복해...... 유리덮개는 내버려 둬. 그런 건 이제 필요 없어.」
「하지만 바람이 불면......」
「내 감기가 그리 대단한 건 아냐...... 밤의 서늘한 공기는 내게 유익할 거야.   나는 꽃이니까.」
「하지만 짐승이......」
「나비를 알고 싶으면 두세 마리의 쐐기벌레는 견뎌야지.   나비는 무척 아름다운 모양이니까. 나비가 아니라면 누가 나를 찾아 주겠어?   너는 멀리에 있겠지. 커다란 짐승들은 두렵지 않아. 손톱이 있으니까.」
그러면서 꽃은 천진난만하게 네 개의 가시를 보여 주었다. 그리고 다시 말을 이었다.    
「그렇게 우물쭈물하고 있지마. 신경질 나. 떠나기로 결심했으니, 어서 가.」

꽃은 울고 있는 자기 모습을 어린 왕자에게 보이고 싶지 않았다. 그토록 자존심 강한 꽃이었다......

011708 

문을 닫고 나올 때마다
내 속에는 얼마나 많은
침묵의 층계가 생겨난 것일까

소리 없이 불이 꺼지기 시작하는 빌딩들처럼
내 사랑도
비에
봉인된다

["나는 천천히 입구쪽으로" -강신애 중에서 ]

돌멩이-정호승

 

아침마다 단단한 돌멩이 하나
손에 쥐고 길을 걸었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 먼저 돌로 쳐라...
누가 또 고요히
말없이 소리치면
내가 가장 먼저 힘껏 돌을 던지려고
늘 돌멩이 하나
손에 꽉 쥐고 길을 걸었다
어느날
돌멩이가 멀리 내 손아귀에서 빠져나가
나를 향해 날아왔다
거리에 있는 돌멩이란 돌멩이는 모두 데리고
나를 향해 날아와
나는 얼른 돌멩이에게 무릎을 끓고
빌고 또 빌었다

  [들판을 푸르게 하는 것은 잡초다 -이문조]

 

  저 푸른 들판을 보라
  얼마나 아름다운가

  들판을 푸르게 하는 것은
  잘난 장미도 백합도 아니다

  이름도 없는
  있어도 불려지지도 않는
  잡초
  누가 시키지 않아도
  제각기 자리 잡아
  제 역할에 충실한 들풀

  그들이 들판을 푸르게 한다
  소리 없는
  그들이 세상을 지탱한다.

 

photos by bhlee0520

 

 

<유리조각>- 나희덕

내 어머니가 그랬듯이 아이의 손을 잡고 오늘은 내가 밤길을 간다. 아이는 내가 세상의 어둠으로부터 저를 지켜줄 유일한 사람이라도 되는 것처럼 내 손을 꼭 잡는다. 그러다가 갑자기 굉장한 걸 발견한 듯 손을 끌어당기며 외친다.
“엄마! 저기 보석이 있어요.”
아이는 골목 입구의 폐차장 쪽을 가리키며 그리로 달려가려고 한다. 그곳엔 외등의 불빛을 받아 무언가 반짝거리고 있었다. 아마도 부서진 차체에서 흩어져나온 유리조각일 것이다. 낮에 그 앞을 지나오면서 아이들이 뛰어놀다 밟으면 위험할 텐데 하고 생각했었다.
“성주야, 빛난다고 다 보석은 아니란다. 저건 깨진 유리조각일 뿐이야. 잘못 만지면 다쳐.”
나의 말에도 아이는 아랑곳하지 않는다.
“아니에요. 보석이란 말이에요.”
아이와 가벼운 실랑이를 벌이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스쳐갔다.  이럴 떄 나의 어머니라면...... 어머니는 아마도 나에게 “그래, 보석이 맞아. 보석이 참 예쁘구나.”하고 말씀하셨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 반짝이는 게 보석이라고 믿으면서 자랐을 것이다. 어느 대낮 빛을 잃고 흙먼지 속에 뒹굴고 있는 유리조각의 초라함에 스스로 실망하기 전까지는, 또는 빛나는 그것에 손을 베이기 전까지는.
어린 시절 어머니의 손을 잡고 밤에 개울을 건넌 적이 있다. 지금 내 아이가 그러듯이 어린 나도 어머니의 손을 꼬옥 잡았으리라. 그때 나는 어머니에게 물었다.
“엄마! 하나님 목소리를 들어봤어요?”
“그럼, 들었구말구.”
“어떤 목소린데요?”
“마치 저 물소리들을 합쳐놓은 것 같지.”
나는 물소리를 들으려고 귀를 쫑긋거렸고. 또렷하지는 않지만 들릴 듯 말 듯 한 어떤 소리가 내 마음에 들려오는 것 같기도 했다. 그리고 바람이 불 때마다 불빛에 반짝이는 물비늘의 모습은 낮에 볼 때와는 아주 다른 느낌이었다.
그렇게 어머니 무릎 아래서 키워온 신앙은 이제 거의 잃어버렸다. 어린 시절 주머니에 불룩하던 유리구슬들이 하나 둘 어디론가 굴러가 버린 것처럼, 신앙뿐 아니라 세상을 향한 맑은 눈도 잃어버렸다. 그래도 물가에 앉을 때면 그 많은 물소리 속에서 어떤 음성이 섞여 들리는 것 같아 귀기울이곤 하는 것은 어릴 때 어머니의 말을 아직 기억하고 있어서일 것이다.
그러나 나는 지금 아이에게 말하고 있지 않은가. 빛나는 게 다 보석은 아니라고. 어머니를 떠올리는 순간 나는 내 속의 빛 하나가 이미 오래 전에 사라져버렸음을 느꼈다. 유리는 유리일 뿐이라는  현실에 대한 씁쓸한 깨달음만이 그 빛의 자리를 대신하게 되었음을 말이다.
유리조각이 불빛에 반짝이는 것은 그것이 더 이상 한 장의 유리일 수 없도록 깨어졌기 때문이다. 깨어진 유리의 날, 그 속에는 제 몸을 잃어버린 슬픔이 간직되어 있다. 그리고 세상엔 정작 눈부신 보석보다는 제 슬픔의 빛을 빌려 살아가는 유리조각 같은 존재가 더 많을 것이다. 그 슬픔들이 밤마다 되살아나 저렇게 반짝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어린시절 우리의 눈에 비친 세상은 왜 그리도 아름다웠는지, 모든 게 반짝이고 그래서 모든 게 보석처럼 마음에 와 박혔는지...... 그때의 빛은 잃어버렸지만 또 다른 슬픔의 빛 하나를 받아들이며 나는 오늘 밤길을 간다. 한 어린 영혼의 손을 잡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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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엔 정작 눈부신 보석보다는 제 슬픔의 빛을 빌려 살아가는 유리조각 같은 존재가 더 많을 것이다.
그럴 것이다.

임의 말씀 절반은
맑으신 웃음
그 웃음의 절반은
하느님 거 같으셨다
임을 모르고 내가 살았더면
아무 하늘도 안보였으리

그리움이란
내 한몸
물감이 적시는 병
그 한번 번갯불이 스쳐간 후로
커다란 가슴에
나는
죽도록 머리 기대고 산다.

임을 안 첫 계절은
노래에서 오고
그래 만날 시만 쓰더니
그 다음 또 한철은
기도에서 오고
그래 만날 손씻는 마음

어제와 오늘은
말도 잠자고
눈 가득히
귀 가득히
빛만 받고 있다. (김남조)

분수 - 김춘수


1
발돋움하는 발돋움하는 너의 자세는
왜 이렇게
두 쪽으로 갈라져서 떨어져야 하는가.

그리움으로 하여
왜 너는 이렇게
산산이 부서져서 흩어져야 하는가.

2
모든 것을 바치고도
왜 나중에는
이 찢어지는 아픔만을
가져야 하는가.

네가 네 스스로에 보내는
이별의
이 안타까운 눈짓만을 가져야 하는가.

3
왜 너는
다른 것이 되어서는 안 되는가.
떨어져서 부서진 무수한 네가
왜 이런
선연한 무지개로
다시 솟아야만 하는가.

 


새- 아폴로에서 /천상병

참으로 오랜만에 음악을 듣는것이다. 내 마음의 빈터에 햇살이 퍼질 때, 슬기로운 그늘도 따라와 있는 것이다. 그늘은 보다 더 짙고 먹음직한 빛일지도 모른다.  

새는 지금 어디로 갔을까? 골짜구니를 건너고 있을까? 내 마음 온통 세내어 주고 외국 여행을 하고 있을까?  

돌아오라 새여! 날고 노래하기 위해서가 아니고! 이 그늘의 외로운 찬란을 착취하기 위하여!

04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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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 어딘가 통증이 있을 때 사람들이 호흡법으로 긴장을 풀 듯이

나는 내 심장 어디께 통증이 있을 때면 천상병님의 시를 읽는다.

물새들이 날개를 접고 엎드려
미친 바람이 지나가기를 기다리고 있다
지난 세월의...
우리들의 모습도 바로 저러했을까

 

[겨울바다2 - 신경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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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ist: (c)Hundert Wasser

 

<변명- 마종기>

 

흐르는 물은
외롭지 않은 줄 알았다
어깨를 들썩이며 몸을 흔들며...
예식의 춤과 노래로 빛나던 물길,
사는 것은 이런 것이라고 말했다지만
가볍게 보아온 세상의 흐름과 가버림.
오늘에야 내가 물이 되어
물의 얼굴을 보게 되다니.

그러나 흐르는 물만으로는 다 대답할 수 없구나.
엉뚱한 도시의 한쪽을 가로질러
길 이름도 방향도 모르는 채 흘러가느니
헤어지고 만나고 다시 헤어지는 우리.

물이 낮은 곳으로 흐르는 마음도 알 것 같으다.
밤새 깨어 있는 물의 신호등,
끝내지 않는 물의 말소리도 알 것 같으다.

 

 

출처: 『그 나라 하늘빛 』/문학과 지성사

Kafka and the traveling doll by Jordi Sierra i Fabra

Illustrator: (C)Isabel Torner

 

카프카(Franz Kafka 1883-1924)는 평생 아내도 자녀도 없이 독신으로 살다 41세에 세상을 떠났다. 

 

그가 40살 때의 어느날 베를린의 스티글리츠 공원을 산책하고 있었다.  그 때 한 소녀가 자신이 아끼는 인형을 잃어버리고 눈이 붓도록 울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는 그 소녀와 함께 인형을 찾아보았으나 끝내 찾지 못했다.  카프카는 그 소녀에게 다음날 다시 공원에서 만나서 함께 인형을 찾아보자고 약속하고 헤어졌다.

하지만 다음날도 그들은 인형을 찾을 수 없었다. 울음을 터뜨린 소녀에게 카프카는 인형의 이름을 묻고 브리짓트(인형)가 여행을 떠났다고 말했다. 그리고 인형의 편지를 내밀었다. 그 편지에는-- 나는 세상을 구경하려고 여행을 떠났어요.  내가 겪는 모험을 편지로 써서 보낼게요.  그러니 울지 마세요--라고 적혀있었다.

 

이렇게 카프카는 그후 날마다 인형이 보낸 편지를 써서 읽어주었다. 두 사람이 만날때마다 카프카는 그 인형이 세상에서 경험하는 모험과 대화를 세밀하게 써서 읽어주곤했고 소녀는 그 이야기에 매료되었다.  마침내 그 인형이 다시 베를린으로 돌아오게 될 때 카프카는 인형을 하나 새로 사서 소녀에게 주었다.  그 인형을 보자 소녀는 "이 인형은 내 인형과 전혀 닮지 않았어요...."라고 말했다.  그러자 카프카는 소녀에게 다시 인형의 편지를 전해주었다.  그 편지에는 "여행을 하면서 나는 많이 변했어요."라고 적혀있었다.  소녀는 그 인형을 소중히 안고 집으로 돌아갔다.

 

얼마 후 (그 다음 해) 카프카는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세월이 흐른 후 이제 어른이 된 소녀는 그 인형 속에 눈에 잘 띄지 않게 들어있는 편지 하나를 발견하였다.  그 작은 편지에는 카프카의 자필 서명이 적혀져 있었다.  카프카는 그녀에게 이렇게 글을 남겼다: 

 

 "네가 사랑하는 모든 것은 쉽게 잃을 수 있어.  하지만 결국 사랑은 다른 형태로 반드시 네게 돌아온단다.

 

https://www.facebook.com/bonghee.lee.7399/posts/548842739320693

 

(여러 자료를 찾고 번역하고 내용을 편집하여 올린 글입니다.
가져가실 때는 출처를 정확히 밝혀주시는 최소한의 예의를 지켜주세요!!! )


[겨울기도 1-마종기]

하느님, 추워하며 살게 하소서.
이불이 얇은 자의 시린 마음을
잊지 않게 하시고
돌아갈 수 있는 몇 평의 방을
고마워하게 하소서.

겨울에 살게 하소서.
여름의 열기 후에 낙엽으로 날리는
한정 없는 미련을 잠재우시고
쌓인 눈 속에 편히 잠들 수 있는
당신의 긴 뜻을 알게 하소서.

한번 더
나를 헐어서
붉고 붉은 편지를 쓸까봐
차갑게
비웃는 바람이
내팽개친 들 또 어떠랴
눈부신 꿈 하나로
찬란하게
죽고만 싶어라

[낙엽 쌓인 길에서 - 유안진]

오늘도 삶을 생각하기보다
죽음을 먼저 생각하게 될까봐 두려워라

세상이 나를 버릴 때마다
세상을 버리지 않고 살아온 나는

아침 햇살에 내 인생이 따뜻해질때까지
잠시 나그네새의 집에서 잠들기로 했다.

솔바람 소리 그친 뒤에도 살아가노라면
사랑도 패배할 때가 있는 법이다.

마른 잎새들 사이로 얼굴을 파묻고 내가 울던 날
싸리나무 사이로 어리던 너의 얼굴

이제는 비가 와도
마음이 젖지 않고

인생도 깊어지면
때때로 머물 곳도 필요하다

 


[쓸쓸한 편지 - 정호승] 

[ 얼룩에 대하여 - 장석남 ]

 

못 보던 얼룩이다 


한 사람의 생은 이렇게 쏟아져 얼룩을 만드는 거다


빙판 언덕길을 연탄을 배달하는 노인

팽이를 치며 코를 훔쳐대는 아이의 소매에

거룩을 느낄 때


수줍고 수줍은 저녁 한 자락씩 끌고 집으로 갈 때

千手千眼(천수천안)의 노을 든 구름장들 장엄하다

 

내 생을 쏟아서

몇 푼의 돈을 모으고

몇 다발의 사랑을 하고

새끼와 사랑과 꿈과 죄를 두고

적막에 스밀 때


얼룩이 남지 않도록

 

맑게

울어 얼굴에 얼룩을 만드는 이 없도록

맑게

노래를 부르다 가야 하리

추억은 혼자 분주하다 - 이기철
  
저녁이 되면 먼 들이 가까워진다
놀이 만지다 두고 간 산과 나무들을
내가 대신 만지면
추억이 종잇장 찢는 소리를 내며 달려온다
겹겹 기운 마음들을 어둠 속에 내려놓고
풀잎으로 얽은 초옥에 혼자 잠들면
발끝에 스미는 저녁의 체온이 따뜻하다
오랫동안 나는 보이는 것만 사랑했다
이제는 보이지 않는 것도 사랑해야 하리라
내 등뒤로 사라진 어제, 나 몰래 피었다 진 들꽃
한 번도 이름 불러보지 못한 사람의 이름
눈 속에 묻힌 씀바귀
겨울 들판에 남아 있는 철새들의 영혼
오래 만지다 둔 낫지 않은 병,
추억은 어제로의 망명이다
생을 벗어버린 벌레들이 고치 속으로 들어간다
너무 가벼워서 가지조차 흔들리지 않는 집
그렇게 생각하니 내 생이 아려온다
짓밟혀서도 다시 움을 밀어 올리는 풀잎
침묵의 들판 끝에서
추억은 혼자 분주하다

게처럼 꽉 물고 놓지 않으려는 마음을
게발처럼 뚝뚝 끊어버리고
마음 없이 살고 싶다.
조용히, 방금 스쳐간 구름보다도 조용히
마음 비우고가 아니라
그냥 마음 없이 살고 싶다
저물녘, 마음 속 흐르던 강물들 서로 얽혀
온 길 갈 길 잃고 헤맬 때
어떤 강물은 가슴 답답해 둔치에 기어올랐다가
할 수 없이 흘러내린다
그 흘러내린 자리를
마음 사라진 자리로 삼고 싶다
내림 줄 쳐진 시간 본 적이 있는가

photo by bhlee

 

사람들은 모두 그 나무를 썩은 나무라고 그랬다.

그러나 나는 그 나무가 썩은 나무가 아니라고 그랬다.

그 밤, 나는 꿈을 꾸었다.

그리하여 나는 그 꿈속에서 무럭무럭 푸른 하늘에 닿을 듯이

가지를 펴며 자라가는 그 나무를 보았다.

나는 또다시 사람을 모아 그 나무가 썩은 나무가 아니라고 그랬다.

 

그 나무는 썩은 나무가 아니다.

 

 

- 천상병, ‘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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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는 대학생 때 이후 산에 가지 못해서 잘 몰랐었다.

그런데 덴버에서 연구교수를 할 때 록키산과 그 근처 산을 자주 갔었다.
그때 정말 놀랐던 기억이 난다.

나무는 죽어서도 살아있다는 것에......  살아있는 아름다움이며 예술이라는 것에. 

처음 천상병의 시, <나무>를 읽었을 때와는 또 다른 의미를 알게 되었다.

꿈에서나 볼 수 있는 나무의 생명력--

사람들의 눈에는 그저 썩어버린 나무가 여전히 당당히 견디며 서 있는 아름다움.
마지막 순간 제 몸을 땅에 누이는 그 때 조차도 경이로운 예술품이라는 것을.
때로 거기서 녹색 싹을 틔우기도 하는 나무

나무는 쓰러져서도
말라 조각품이 되는 죽음이 비켜가는 아름다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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