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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잎새 - 이봉희

 

내가 네게

이미 시들어

죽어버린 생명이라면

불가능한 현실이라면

차라리 가난한 화가의

마지막 잎새이고 싶다

견딜 눈서리 된바람에도

현실보다 강인한

생명을 나누는 죽음

그렇게 영영 지지 않는

아름다운 환상이고 싶다

(2003)

 

 

MP

  

 

이별의 노래와 둘째 언니

 

1960년대 초에는 오늘날처럼 학생의 우상이 되는 연예인은 없었다. 노래를 부르는 10대 가수는 아예 없었다. 내가 초등학교 때 듣는 노래는 가끔 오빠가 좋아하는 노래, “검푸른 저 산 넘어, 이슬이 석양빛에 소리 없이 사라져...(나중에야 그것이 영화 <셰인>의 주제가임을 알았다)“ 라든가 암으로 42살에 돌아가신, 살아 계셨다면 지금 70을 훨씬 넘기셨을 당시 영어 선생이던 멋쟁이 큰언니가 벚꽃 만발한 무심천 둑을 내 손을 잡고 거닐면서 불러주던 무언지 모를 영어노래들이 동요 말고 내가 아는 전부였다. 그 중에 내가 열심히 따라하던 ”새드 무비(Sad Movies)"는 언니가 친절히 그 노래의 내용을 다 설명해주기도 했지만 당시 우리나라 가수들이 영어와 섞어 불러서 어린아이에서 어른까지 히트시킨 노래였다.  

 

당시는 전등불을 시에서 일방적으로 켜주고 끄는 시간이 정해져 있었기 때문에 밤마다 불이 '나가는' 시간이 통금처럼 정해져 있었다. 저녁 식사시간에 들어와서 11시인가 12시가 되면 불이 나갔다. 그래서 늘 어머니나 언니들은 불 나가기 전에 숙제하라고 종용을 하시곤 했었다. 불이 나가면 특히 밤이 긴 겨울이면 언니들과 촛불을 켜놓고 그림자놀이를 했다. 그러다가 한 이불 속에 동그랗게 둘러서 누우면 둘째 언니는 어김없이 어둠 속에서 노래를 부르곤 했었다. 다 큰 초등학생 동생들을 위해 자장가를 불러주었을 리는 없고 아마 말로 표현 못한 가슴속의 무엇인가를 어둠 속에서 노래로 대신했었던 것 같다.

“기러기 울어예는 하늘 구만리/ 바람이 싸늘 불어 가을은 깊었네... 산천에 눈이 쌓인 어느 날 밤에/ 촛불을 밝혀두고 홀로 울리라. 아 아, 너도 가고 나도 가야지” “아무도 날 찾는 이 없는 외로운 이 산장에....” “눈을 감고 걸어도 눈을 뜨고 걸어도....” “겨울은 가고 따스한 해가 웃으며 떠오고...” 한 시간정도 언니의 노래는 끝없이 이어졌다. 유난히 숨이 짧은 둘째 언니가 숨을 참아가며 어찌나 정성스럽게 부르는지, 그리고 그 노래가 어쩌면 하나같이 어두운 밤 혼자 문밖에서 울다 가버리는 겨울바람처럼 쓸쓸하게 들리던지 나는 숨소리도 못 내고 옆에 누워 듣다가는 잠이 들고 했었다.

 

그건 노래가 아니라 차라리 말 못할 하소연이었다. 그 언니가 “아름다운 꿈만을 가슴 깊이 안고서 외로이. 외로이 저 멀리 나는 가야지,....말없이 나는 가야지” 하고 부를 때면 정말 내일 아침이면 어디로 가버리려고 몰래 보따리라도 싸 놓은 게 아닌가, 은근히 걱정되어서 졸린 데도 자지 말고 깨어 있어야 할 것 같은 두려움과 사명감에 끙끙대다가 잠이 들곤 했었다. 그 언니는 결국 폐가 너무 나빠서 채 피지도 못한 20대 초반에 자신이 즐겨 부르던 노래, “산장의 여인”처럼 요양소로 떠나야 했었다.  

 

큰오빠가 언니를 면회하러 가면 언제나 내가 보내준 편지(그때 내가 초등학교 1학년쯤이었을 거다.)를 보면서 울고 있었다고 말하던 것이 기억난다. 지금 와서 생각하면 언니는 그 곳에서도 의사 몰래(결핵 환자는 크게 웃지도 못하게 했었다.) 밤이면 [노래]를 불렀을 것 같다. 그곳에서 떠나고 싶은 마음을 또다시 같은 노래 가락들 속에 실어서 “말없이 나는 가야지” 하고 불렀을 건 만 같다. 언니의 노래는 어쩌면 내가 책 한 권 내지 않으면서도 혼자서 항상 무언가를 끄적이는 독백의 습관과 어쩌면 같은 것이었는지 모른다.

 

사실 나는 고등학교 때 그 언니가 너무 불쌍해서 학교 수업 중에도 혼자서 책 위에 눈물을 떨구며 소리없이 운 적도 많았다. 그래서 친구들에게 오해도 많이 받았었다. "어머머 쟤봐 울어...."라고 나를 보고 깔깔대던 아이들의 소리가 기억이 난다.

 

언니는 요양원에서 20살 대학초년생 때 폐하나를 떼어냈다. 평생 온갖 병을 다 겪고, 암도 이겨내고, 늘 숨이 차서 고생하며 살더니, 10년 전 수술을 하고 그 와중에 또 하나밖에 없는 폐가 폐렴에 걸려 회복의 기미가 보이질 않았다. 몇 달간 중환자실에서 산소호흡기에 의지해서 견디더니 기적같이 고비를 넘겼었다. 의사도 포기했었기에 불사조라고 했다. 당시 무의식속에서 이 세상과 저세상을 오가며 겪는 영적인 싸움이 얼마나 무섭고 치열했던지 그 싸움을 할때는 몇일 사이에 완전 뼈와 가죽만 남기도 했었다. 그렇게 힘겹게 살아남았는데 너무 지쳤는지 그 다음 해인가 뜻밖에 알츠하이머 초기라는 진단을 받았다. 10년이 넘도록 치료를 받으며 그래도 잘 견디어왔다. 오랜 옛일은 나보다도 훨씬 더 총기있게 선명히 기억하는데 이제 점점 현재에서 뒷걸음질쳐가고 있다. 단기 기억이 눈에 띄게 나빠지는 요즘의 언니를 보며 마음이 너무 아프다. 아직은 통화도 하고 이것저것 안부도 묻지만 조마조마 불안하기만 하다. 이젠 통화 중에 언니가 기억 못해도 스트레스 줄까봐 그냥 다 받아주고 있다.

 

몸이 약해 무척 예민하긴 했지만 항상 잘 웃고 긍정적이고 깔끔하고 음식솜씨며 살림이 야무지던 언니. 치매걸린 시부모님 두 분을 집에서 다 보살피던 언니.형부도 오래 전 암으로 떠나가시고 자녀도 없이 저렇게 언니는 20살 어린나이 요양소에 홀로 남겨졌을 때처럼 혼자 과거 속에 남겨지는 것일까? 그런 날이 올까봐 문득문득 그런 이별아닌 이별이 두렵고 눈물이 난다.

 

약한 몸으로 자기 때문에 동생들 결핵 걸렸다고 미안해하던 언니. 책을 손에서 놓지 않던 언니. 서울에서 서울대 이대 경기고 다니던 큰오빠 언니 작은오빠 뒷바라지 다 해주던 언니. 그리 해맑게 자신을 위한 욕심 없이 정말 열심히 사셨는데 삶은 끝까지 언니에게 자비롭지 못하다는 생각마저 든다.

 

생은 그런 것이다.  내가 살아오면서 자주 느끼는 슬픔은 생이 그런 것이라고 가르쳐주고 있었다.

 

9/22/2010

 

 

( 그림에 있는 아이가 입었던 옷과 내가 즐겨입었던 티셔츠)

 

 

 

엄마, 어느새 또 5월 8일이 돌아왔어요. 매년 5월 8일만 잘해드리는 것 같아서 죄송해요. 하지만 엄마, 제가 엄마 사랑하는 거 아시죠? 매년 그래왔던 것처럼 이번에도 “시”를 준비했어요.

엄마. 가만히 오른 손으로 왼손을 쥐어보세요. 전 혼자 있을 때 그렇게 해요. 꼭 엄마의 손이 제 손을 굳게 잡고 있는 듯해요.

눈을 떠 보았습니다
칠흙 같은 어둠의 늪 속에서
홀로 허우적거리는 저를 보았습니다.

어둠과 하나가 되어가는 절망을 느끼며
두려움에 나의 두 눈을
꼭 감았습니다.
“아, 이제는 끝이로구나”

다시 눈을 떴을 때
어둠의 늪을 지나 환한 빛을 향해
당당히 걷고 있는 저를 보았습니다

빛에 도달했을 때
저는 비로소 느꼈습니다.
제 뒤에 있던 당신을.

당신을 느끼기 위해
눈을 살며시 감아보았습니다
저를 붙들어 주었던
당신의 손길이 느껴졌습니다.

당신의 눈물로
제 마음에 파문을 일으키신
당신은 저의 분수십니다.

당신은 제 호수의
분수대이십니다.

은빛 실을 내어
저에게 새로운 삶을 입히시는
당신은 저의 분수대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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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사랑하는 딸아이가 어릴 때 어머니날 카드에 쓴 시.
엄마가 학교에서 늦게 돌아오는 날이면 빈 집에서 얼마나 힘들고 외로웠을지....그래서 엄마 손 대신 자신의 손으로 다른 편 손을 잡아주며 엄마를 느껴보던 아이....

 

다 지난 까마득한 옛일인데 아직도 미안하고 가슴이 아프다. 그래서 딸이 내게 보낸 수 많은 카드들 중 어머니날이면 잊지않고 다시 꺼내보는 카드 중 하나가 이 편지(시)이다.

 

딸아이는 어려서부터 피아노 학원들 다녀오거나, 유치원에서 집에 오는 길에 길가에 핀 작은 꽃이나 작은 돌, 또는 예쁜 작은 카드를 만들어 "써프라이즈!!!" 라고 말하며 고사리 같은 손으로 내게 자랑스럽게 건네곤 했었다.

 

우리는 늘 서로에게 쪽지나 카드를 써주곤 했었지. 지금도 일년에 한 번 만났다 헤어질 때는 어딘가에 편지나 카드를 써서 서로에게 남기곤 한다. 언젠가 아이가 정말 힘들어 할때 내가 그냥 포스트 잇에 세상에서 네가 가장 예쁘고 아름답다고 적어 컴퓨터 모니터 앞에 붙어주었는데 일년 후 가 보니 그 낡은 포스트 잇을 그대로 붙여두고 있었다. 딸애가 유학을 떠나던 날 현관문에 붙여놓고 간 쪽지가 아직도 그곳에 붙어 있듯이.
우리에겐 정말 소중한 추억이 많다. 감사하게도.

 


엄마의 딸에게 보내는 글.

나의 생명, 나의 딸,
이젠 엄마보다 훌쩍 커버려서 한참 올려다 봐야 하는 우리 딸. 그래도 엄마는 지금도 늘 네 손을 잡듯이 나의 두 손을 모으고 널 위해 기도한단다. 잊지마,  우리에겐 우리의 손을 절대 놓지 않으시고 꼭 잡고 함께 가시는 주님이 계심을.

Do you remember all the pretty letters you gave to me from time to time?
Do you remember you used to prepare a "surprise" for me? -- a little nameless flower, a little card.... anything that said "I love you, Mom"

I knew those little gifts were not just saying"I love you, Mom".  I knew they were telling me that "I needed You.  I missed Mom  all day long."  and that you were  alone and lonely.

I AM sorry, Dearest.   I've never been much of a mother, I know.  However, YOU have been always with me as part of my life.

This is one of your letters you gave me when you were so little!
I miss you so much!

080508

Creativity & Technology in the Age of AI

 

바르셀로나에서 열리는 유럽에서 가장 큰 디자인 컨퍼런스 중 하나인 OFFF

Creativity and Tech. in the age of AI (AI 시대에 창조성과 테크놀로지)를 주제로 3명이 Adobe 대표로 발표했다.

오디언스가 3000명가까이 모였다고 한다.

 

커퍼런스 발표 후 live webcast. 흥미롭고 재미있는 내용이다.

 

 

오빠가 갑자기 하늘 나라로 가신지 벌써 4년이 되었다. 까마득해 보이기도 하고, 아직도 실감이 나지 않는다.
오늘 밤엔 저 먼 곳 별이 되신 보고픈 얼굴들이, 별이 되어 내 가슴에 뜨고 지는 분들이 자꾸만 그립다.
아버지, 엄마, 큰언니, 큰오빠....그리고 또 작은언니. 

떠나간 사람들이 남긴 빈 자리는 그 무엇으로도 채울 길이 없다.
그런데도 여전히 나는 아직 남아있는 사람들에게 훗날 아쉬워할 일들을 아무 생각없이 하며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아직은 내 곁에 머물러 있을 거라 합리화하면서.....
아직은 시간이 남았다고, 내 하루하루 살아내기가 더 급하다고 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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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3. 24.

큰오빠가 갑자기 우리 곁을 떠나신 지 일주일 째 되는 날이다.
물론 오래 앓으셨지만 갑자기 어느날 아침 떠나실 줄은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

나에게 아주 특별했던 큰오빠, 가족 중에 그 누구보다 나를 사랑하시고 보살펴주시고, 내가 아버지 같이 의지했던 오빠.
어린 시절 서울에서 내려올 때마다 동화책을 한 아름 사다 주시면 외도록 그 책을 있으면서 행복했던 기억이 난다.
오빠 방에는 철학책, 시집, 화집, 문학전집 등 책으로 가득 찬 책장이 있었고 나는 그곳에서 무슨 말인지 알 수도 없는
일어, 불어, 영어 등 외국어 책을 쑤알라 쑤알라 하면서 읽는 흉내를 내었던 기억이 난다.


오빠방 하얀 커버가 씌워진 안락의자에서 나는 엄마 품에 안긴 듯, 참 포근했었다. 오빠가 벽에 걸어 놓은 고흐, 고갱, 세잔, 르노와르, 마티스 등등의 그림들은 어린 내게도 얼마나 큰 경이로움과 알 수없는 위로와 기쁨을 주었던지. 오빠가 전축에서 들려주시던 클래식 음악들, 오빠가 즐겨 부르던 영화 "셰인"의 주제곡....

어린 시절 오빠는 가끔 나를 불러서 외국 시를 읽어주셨다. 10대의 시인이라면서 프랑스 여자아이의 시를 읽어주던 기억도 난다. 긴 겨울 밤 한 이불 속에서, 또는 짧은 여름 밤 마당에 돗자리를 깔고 누워 별을 보면서 듣던 엄마의 구수한 옛날 얘기처럼 오빠의 이런 저런 이야기도 내게는 참 따뜻하고 소중하였다. 그래서인지 나는 교내 글짓기대회 교장상은 물론이고, 시장, 그리고 도지사 상을 늘 받았던 기억이 닌다. 그 어린시절 내 꿈은 소설가였다. 그 꿈을 하얗게 잃어버린 것이 언제부터였을까? 그래서 나도 오빠처럼 대학교 때 모든 선택과목을 철학으로 했었을까? 


철학과 문학과 음악과 미술..... 내가 사랑하는 것들로 가는 마음의 문을 열어준 오빠.

7남매의 막내로 그것도 다섯째 딸로 엄마 나이 40에 태어난 나(어쩌면 반갑지 않아서였을까?)-- 엄마는 간난아기에게 큰 관심을 보이지 않으셨던거 같다. 어느 날 오빠가 안방에 들어가보니 핏덩이인 내가 빈 방에서 혼자 꼬므락거리면서 오빠를 쳐다보는데 갑자기 그렇게 측은할 수가 없으셨단다. 그때부터 오빠는 날 유난히 사랑하셨다. 크면서 유달리 애교가 많았던 나를 보며 오빠는 늘 우리집에 막내 없었으면 어떻게 할 뻔 했어요, 라고 하셨단다. 엄마 모유가 나오지 않아서였을까, 간난아기 때 몇일이고 밤 새 울기만 하여서 엄마는 얘가 이러다 죽으려나보다 하셨단다. (당시는 우리나라에 아이용 분유도 우유도 없을 때였다.) 그런데 어느날 오빠가 미군부대에서 나온 분유(당연히 전지분유)를 사오셔서 그걸 (젖병도 없던 시절이니) 그릇에 타서 수저로 떠 넣어주었더니 간난애가 한 대접을 다 받아먹고 그 날로부터 색색 잘 자더란다. 그래서 엄마는 그 때 미안했다고, 넌 어려서 젖을 주려서 몸이 약하다고 늘 말씀하셨던 기억이 난다. 그래서일까, 아니면 어린 시절 오빠가 명동 찻집에 친구들 만나려가면 나를 꼭 데리고 다니시면서 따뜻한 우유(역시 분유를 탄 것)을 시켜주셔서 그때 그 맛을 못 잊어서일까, 나는 유난히 따듯한 우유를 좋아한다. 아직도 여름에도 우유를 뜨겁게 데워 마시곤 한다.

결혼하고 뒤늦은 나이 유학을 떠났다 돌아왔을 때 친정 가까이 살면서 엄마가 우리 딸을 키워주셨기에, 오빠는 자연스레 우리 딸을 키워주신 셈이 되었다. 내가 수없이 이런 저런 일로 병원에 입원할 때마다, 아플 때 마다, 무슨 교통사로라도 날 때마다, 성하지 않은 몸을 이끌고 기우뚱기우뚱 걸으시며 그 누구보다 가장 먼저 달려오셨던 오빠...... 내게는 은인인 오빠. 내 스스로 선택하고 결정하고 책임져야하는 삶을 가르쳐주신 오빠. 병약하셨던 아버지 대신 내가 의지했던 오빠.

헌칠한 키에 넓은 이마, 오똑한 콧날, 멋스런 모습.
나이들어서 병원에 초췌한 모습으로 입원해 있을 때도, 요양병원에서도,  모두들 잘 생기셨다고 하던 오빠.
담배를 좋아하셔서 늘 손에서 구수한 옥수수 냄새가 났던 오빠.
머리가 유달리 뛰어나신 오빠.
옷을 멋스럽게 입었던 오빠.
미술재능도 뛰어나셔서 그림으로 중고시절 정부에서 보내줘 중국까지 다녀오신 오빠.
하지만 자신이 하고 싶던 철학공부를 못하고, 예술공부도 못하고 맏이라서 실용적인 공부를 하셨어야 했던 오빠.
(결국 서울대 문리대 철학과를 학사편입으로 나오시긴 했지만)
7남매를 다 보살펴주신 오빠. 책임감이 그 누구보다 뛰어나고 성실하셨던 오빠. (그래서 얼마나 버거운 삶이었을지... 그래서 그런 조건 때문에 원하는 결혼도 할 수 없었던 오빠)
형편이 어려운 친구들, 주변에 힘든 사람들을 늘 가족처럼 초대해서 함께 지내고 도와주던 오빠.
늘 아랫사람들을 인격적으로 대했던 오빠.
그렇게 통증에 시달리면서도 책을 손에서 놓지 않던 오빠.
꽃과 나무를 좋아하셨던 오빠.

이제는 우리 곁에 없다.
내 곁에 없다. 아직도 믿기지 않는다.
이리 허망히 가실 줄 알았으면 좀 더 자주 찾아뵐 걸.....

육신의 고통이, 통증이 이리 절대 고독인 걸 내가 그때는 왜 미처 몰랐을까?
왜 우리는 늘 나 살기 바쁘다고 내 사랑하는 사람들이 영원히 곁에 있을 것처럼 착각을 선택하는 이기적인 삶을 사는 것일까?

오빠 사랑해요. 감사해요.
그리고... 너무 미안해요...
아픔 없는 그곳에서 평안하시길 기도합니다.

너무 보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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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살면서 해야하는 세가지
그건 죽기 마련인 모든 것을 사랑하기,
당신의 삶이 거기에 기대고 있음을 깨닫고
그들을 가슴 깊이 끌어안기,
그리고 놓아보내야 할 때가 되었을 때
놓아 보내기.
(M. 올리버)

(c)2008E.Kim

from my lovely and precious daughter to mom


늘 보고싶지만 그렁그렁 맺힌 눈물처럼 유달리 그리운 날이 있다.
주섬주섬 딸아이가 11년 전 만들어 준 작은 책을 들여다 본다.


T. S. Eliot의 황무지(The Waste Land)를 그림으로 그려서 책으로 만들어  여름방학 때 가져왔었지.
이 세상에서 단 하나 뿐인 제일 멋지고 감동적이고 소중한 책.
모든 페이지가 다 예술이지만  몇페이지만 올려본다.

Thank you. You are so special!

<[photo by bhlee>

 

  

여릿여릿 봄이 오는데

설렘으로 피어나는 눈부신 생명 곁에서 나는

조용히 사라져가는 것들에게 눈길이 간다. 

곧 스러질 것, 잊혀질 것들의 아름다움에,  

추억이 더 많은 고독에

뒤돌아보며 돌아보며

자꾸 마음이 따라 간다.

 

시가 있는 마음 풍경: 그림저널쓰기

(c)2009BongheeLee

 

 

 

이봉희, PhD

미국공인문학치료전문가(CPT)

공인저널치료전문가(CJT)

상담심리사

나사렛대학교대학원 문학치료학과 교수

한국글쓰기문학치료연구소 소장 

 

 

 

저널치료의 기법 중에는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쓰는 그림저널이 있다. 치료로서의 글쓰기와 마찬가지로 자신만의 저널에 그리는 그림은 자기표현의 수단이지 남을 보이기 위한 좋은 그림을 그리는 것이 아니다. 나는 그림을 그린 적이 없다. 그림을 무척이나 좋아하고 또 화가들을 무척 부러워하는 것도 사실이지만 미술시간에 특별한 칭찬을 받아본 적도 없다. 하지만 때로 언어가 더 이상 갈 수 없는 언덕 끝에 서는 날은 저널에 그림을 그린다. 이곳에 나의 해묵은 그림저널 중에서 시와 연관된 단상 몇 개를 실어본다. 어떤 글은 신문에 연재되었던 본인의 문학칼럼에서 가져온 것도 있다.

 

 

I. 집이 없었다.

 

(그림: 이봉희)

 

외딴 곳

집이 없었다

짧은 겨울날이

침침했다

어디 울 곳이

없었다 (김용택 - 슬픔)

 

지난주는 갑자기 눈보라가 쳤다. 슬픈 재즈 같이 젖은 눈이 아프다는 소리도 없이 잿빛 바람에 마구 휩쓸려 불려 다녔다. 누군들 곱게 하얗게 내려 쌓이고 싶지 않을까....

세상은 온통 고장 난 시계처럼 하루 종일 희미한 눈을 뜨고 있었다. 다 타고난 재가 불어오고, 불려 다녔다. 공연히 해묵은 아픔이 가슴을 적셨다. 이 작은 냉기에도 마음이 또 다시 위축된다. 하루하루 손에 남은 건 녹아버린 눈송이 같은 젖은 방울 몇 점 뿐.

해 놓은 일도, 남겨진 것도 없이 무산된 계획만 헛손질하며 가버리는 하루, 하루, 그리고 또 하루....늘 손잡아 주던 엄마가 이젠 혼자 가라고 나를 남겨둔 정류장 앞에 선 어린아이처럼 초조하고 불안하기도 하다. 이런 날은 어려서부터 공연히 서둘러 집에 가고 싶었던 기억이 난다. 시인은 그런데 집이 없었다고 한다.

외딴 곳에 홀로 남겨진 것처럼 늘 반복되는 일상의 삶이 갑자기 낯설게 느껴지는 날이 있다. 익숙하던 길이 갑자기 보이지 않는 날이 있다. 잿빛 바람이 불고 날은 쉽게 어둑어둑해지는 겨울날이 우리 삶의 여정에는 누구에게나 있다. 외딴 곳, 침침한 곳에서 시인이 집을 찾는 이유는 울 곳이 필요해서이다. 우리 모두 길을 잃은 듯 외로운 날, 서로에게 집이 되어주면 좋겠다고 시인은 말하고 있는지 모른다. 서로에게 이슬을 막아주는 지붕이 되고 기대어 울 수 있는 벽이 되고 희망이 될 수 있는 동으로 난 작은 창이 되어 이 외딴 세상에서 살아가면 좋겠다는 소망으로 내 맘대로 시를 고쳐 써본다. “외딴 곳, 짧은 겨울날이 침침했다. 작은 창에 불이 켜졌다. 나는 그대의 가슴에 들어가 내 이름 없는 설움을 비워내며 조용히 울었다.” (2005)

 

 

II. 나도 시를 쓰고 싶다.

 

"갈매기가 푸른 하늘에 를 쓰고 있다.

나도 시를 쓰고 싶다."

 

어느 누구의 시인지 모른다. 다만 대학시절 노트 표지에 적어 두었던 인 것만 기억한다. 시인은 어느 날 시를 쓰기 위해, 아니 어쩌면 사랑하는 이에 대한 묘사를 하기 위해 애를 써 본다. 이렇게 표현해도 저렇게 그려봐도 사랑하는 그 사람에 대한 마음을 다 표현하기에는 부족한 언어의 한계를 느낀 시인은 아무 것으로도 채우지 못한 작은 하얀 종이를 내려다보다가 절망하고 만다. 그리곤 피곤한 눈을 들어 푸른 하늘을 바라본다. 그 때 시인은 놀랍게도 갈매기가 그 넓은 푸른 종이 위에 시를 적고 있는 것을 보았다.

시인이 발견한 시는 무엇이었을까. 갈매기는 하늘 위에서 사랑한다고 언어로 시를 쓴 것이 아니다. 세상을 향해 소리 높여 노래와 찬양을 한 것도 아니다. 갈매기는 다만 푸른 하늘 위를 날고 있었을 뿐이다. 그래, 바로 이것이 시인이 발견한 시였다. 시인은 갈매기의 삶 자체, 그의 존재 자체가 하나의 시가 된 것을 깨달은 것이다.

독일의 한 철학자는 신들의 말, 우주의 말을 눈짓이라고 표현하면서 시인은 이러한 눈짓을 포착해서 다시 사람들에게 눈짓으로 전하는 것이라고 했다. 사랑하는 사람들은 서로 닮아간다. 그렇기에 우리가 가장 존경하고 사랑하는 대상에 대한 나의 사랑의 표현, 즉 나의 시는 바로 그렇게 그 대상을 닮은 눈짓과 날갯짓이어야 한다.

말보다 더한 나의 삶으로, 그분의 모습 닮은 내 존재 자체로 쓰는 시, 이것이야말로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이 세상에서 내가 평생토록 써야 하는 연작시이라는 것을 저 짧은 한 줄의 시가 어느 날 내게 깨우쳐주었다. 횔더린은 빵과 포도주라는 비가(悲歌)에서 '이 궁핍한 시대에 누구를 위한 시인인가?'라고 묻고 있는데 이 가난한 시대에 그 분을 위해 연약한 나는 어떤 시가 되어 살아가야 하나 눈감고 기도해본다.

제 영혼은 저 높은 곳을 향해 푸드덕거리는 어린 새입니다. 세상이 나를 땅위에 묶어 놓을 수 없게 높이 나는 새가 되고 싶습니다. 이 세상이 감당치 못하는 그런 새처럼 살고 싶습니다. 저에게 힘찬 날개를 달아 주세요. 자유로이 저 높은 창공 위에 시를 쓸 수 있도록. 나의 삶 자체가 당신께 바치는 진실 되고 아름다운 시가 되도록.”

 

III. 나는 슬픔은 건널 수 있어요

 

나는 슬픔은 건널 수 있어요

가슴까지 차올라도

익숙하거든요.

하지만 기쁨이 살짝만 날 건드리면

발이 휘청거려 그만

넘어집니다취해서.

조약돌도 웃겠지만

맛 본 적 없는 새 술이니까요

그래서 그런 것뿐입니다.

(에밀리 디킨슨-“나는 슬픔은 건널 수 있어요일부/필자 역)

 

 

(그림:이봉희)

 

 

내가 가장 좋아하는 시인을 몇 꼽으라면 주저 없이 에밀리 디킨슨을 떠올린다. 에밀리 디킨슨을 알게 된 것은 아버지가 돌아가셨던 대학교 2학년 때 한 선배가 편지에 적어 보내준 시(A Bustle in a House)를 통해서이다. 나는 곧 이 여자에게 매료되고 말았다. 평생을 자신이 태어난 곳과 집을 떠나 살아 본 적이 없는 여자. 항상 흰 옷을 입었다고 알려진 여자. 이루어질 수 없는 한 사람을 사랑하고 혼자 살았던 여자. 그런데 그녀의 시는 마음 깊은 곳과 저 먼 우주를 종횡하고 있다.

영혼의 여행자인 에밀리 디킨슨의 시, “나는 슬픔은 건널 수 있어요는 나이가 들도록 여전히 내 곁을 지켜주는 오랜 친구 같은 노래이다. 저벅저벅 가슴에 출렁이는 물을 건너 하룻길 삶을 살다가 문득문득 목이 차오르면 꺼억꺼억 울며 나는 물새들이 부러웠다. 그 때마다 나는 꺼억꺼억 우는 대신 이 시를 중얼거리곤 했다. 나는 슬픔은 저벅저벅 건널 수 있어.......그래, 익숙잖아. 뭘 새삼.

위태롭게 금이 간 유리병 같은 내 몸엔 항상 물이 넘칠 듯 고여 있어서 누군가와 부딪히지 않으려고 늘 홀로 걸었다. 황혼이 너무 뜨거워, 고개 숙인 내 눈길을 맞아주는 풀 섶에 숨은 좁쌀만큼 작은 꽃이 너무 반가워, 새벽 별이 너무 시려, 누군가 무심코 던진 한마디가 너무 따스해, 아무 뜻 없이 지나가는 바람일 뿐인데 꼭꼭 덮어둔 간절한 마음이 펄럭여.... 그만 삐걱하고 발을 헛디디며 흔들리면, 바보처럼 휘청거린 나에게 말해주곤 했다. 괜찮아. 그럴 수도 있지. 맛보지 못한 새 술이잖아. 다시 꼿꼿이 걸어가면 돼.

나는 거인도 아니며 거인이 되고 싶지도 않지만 내 삶은 늘 그것을 내게 요구하는 듯 했다. 그리고 사람들은 말한다. 그건 당신이 그렇게 선택한 것이라고.

거인들에게 향유를 주어보세요/ 평범한 인간들처럼 나약해질 테니./ 그들에게 히말라야 산을 주면/그 산을 번쩍 들고 갈 것입니다.” (2008)

 

 

IV. 여러 개의 언어를 알았으면 했지

 

사람들의 끝없는 잡담. 퍼붓는 그 위로 나는 쓰러진다. 그들은 공허하게 지껄이고 또 되뇐다. 얼굴을 맞대고 있으나 눈길은 서로 다른 곳을 향하며 각자의 이야기를 쏟아내는 사람들. 그들이 들어줄, 혹은 들을 수 있는 귀를 갖게 된다면?” (마틴 발저)

 

 

(그림:이봉희)

 

물질문명, 고도로 성장한 기계문명이 낳는 인간사이의 단절을 단적으로 예견하는 신화가 있다. 바로 황금의 손, 마이다스(Midas) 이야기다. 경제계에서 마이다스의 손'은 황금알을 낳는 성공자를 일컫는 말이지만 다른 측면에서 보면 그 만큼 비극적인 인물도 없다. 손으로 만지는 것마다 금으로 변하는 바람에 사랑하는 딸조차 금으로 변하고 마는, 가장 사랑하는 사람과의 관계, 접촉마저 불가능한 저주로 변한 물질과 성공의 축복이기 때문이다. 마이다스는 인간과 인간사이의 접촉 불가능성을 비극적으로 보여주는 신화의 인물이다.

오늘날 우리는 고도로 발달된 기계문화 속에서 인류역사상 어느 때 보다도 그 문명의 혜택을 누리고 산다. 이제는 내 책상에서 세계로 가는 창인 컴퓨터로도 모자라 손에 들고 다니는 작은 기계 속에 온 세상이 들어와 있고, 타인과의 의사소통의 통로가 열려있다. 내 손안에 들어온 세계. 그러나 잠깐 멈춰 서서 생각해보면 내 손안에 세계가 들어온 것이 아니라 하이테크시대의 거대한 기계문명의 손바닥 속, 가상공간이 만들어 내는 환상의 손바닥 속에 우리가 갇혀있는지도 모른다.

인간들은 갈수록 소외되고 의사소통은 무의미한 언어들로 단절되고 있다. 난무하는 말장난들, 기호들, 부호들, 은어들, 거짓말들이 언어의 폭력이 되어 우리의 귀를 오염시켜버렸다. 하이데거의 말대로 진정 존재를 지키는 파수꾼인 시인들은 없는 것일까? 의사소통의 가장 중요한 수단인 언어는 너무나 허망한 그리고 때로는 위험한 암호라는 생각이 든다. 그 말을 하는 사람의 진심을 알 수 없다면. 추측은 고통이다. 그렇기에 추측하도록 버려두는 것은 무례한 행동을 상대에게 부추기는 잔인한 일 일수도 있다.

그래서 때로 말이 무섭다. 제 맘대로 오해를 불러오는 괴물 같기도 하다. 아니면 사람들이 각자 암호이며 부호(sign. cipher)인 언어에 제 생각의 숨결을 불어넣어 원하는 대로 자의적으로 살려내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각자 자신의 프랑켄슈타인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그리고는 프랑켄슈타인과 같은 "자의적인 해석에 따른 의미"를 살아있는 사람보다 더 중요시해서 자신이 만든 괴물이 살아있는 생명을 잡아먹게 하고 있다. 모두가 인간 대 인간의 진실 된 의사소통의 수단인 언어가 하이테크시대의 기기들을 매개로, 그리고 그 문화와 문명이 부추기는 가짜 욕망과 일회용 인스턴트 희망을 매개로 왜곡되고 소외되었기 때문이다. 인간들을 소외시키기 때문이다.

왠지 사람들의 거짓언어에 지쳐버린 오늘은 나도 마틴 발저의 말처럼 진실을 말할 수 있는 새로운 언어를 가지고 싶다. “여러 개의 언어를 알았으면 했지. 내가 나와 이야기를 나눌 때만 사용할, 그 누구도 이해할 수 없는, 내 심연의 언어와 알 수 없는 먼 나라에서 온 사람들과도 이야기를 나눌, 수많은 낯선 말, 말들을.(마틴 발저)”(2006)

 

 

V. 그대에게 가고 싶다.

 

해 뜨는 아침에는

나도 맑은 사람이 되어

그대에게 가고 싶다

그대 보고 싶은 마음 때문에

밤새 퍼부어 대던 눈발이 그치고

오늘은 하늘도 맨 처음인 듯 열리는 날

나도 금방 헹구어낸 햇살이 되어

그대에게 가고 싶다

 

그대 창가에 오랜만에 별이 들거든

긴 밤 어둠 속에서 캄캄하게 띄워 보낸

내 그리움으로 여겨다오

사랑에 빠진 사람보다 더 행복한 사람은

그리움 하나로 무장무장

가슴이 타는 사람 아니냐

 

사랑이란

또 다른 길은 찾아 두리번거리지 않고

그리고 혼자서는 가지 않는 것

지치고 상처입고 구멍 난 삶을 데리고

그대에게 가고 싶다. (안도현-‘그대에게 가고 싶다일부)

 

 

 

(그림:이봉희)

 

밤 새 눈이 왔다. 오늘 아침 눈을 떠보니 거짓말처럼 창문 가득 부신 햇살이 맘속의 그리움을 깨워준다. 밤새 가슴속에서 퍼붓던 잿빛 번민의 눈발을 그치고 햇살이 가득한 아침을 열 때는 누구나 저 햇살처럼 방금 헹구어낸 희망이 되어 그대에게 찾아가고 싶을 것만 같다. 나도 내 영혼의 긴 긴 밤 어둠 속에서 시리도록 쌓이던 절망으로 인해 그 누구의 창가엔가 빛나는 희망의 별로 뜰 수 있다면 좋겠다고 소망해본다.

우리는 무엇인가 사랑하지 않고는 살 수 없는 존재란 생각을 한다. 그것이 일이든, 사람이든, 예술이든, 사람들은 무엇엔가 마음을 주고 그리워하지 않고는 하루하루 살아있는 느낌을 가질 수가 없다. 그리움은 우리를 영원히 살아있게 하는 힘이요 희망이니까. 무엇과의 이별이든 이별의 슬픔은 다름 아닌 희망의 상실, 그리워할 무엇의 상실이다. 그래서 신경숙의 소설, 깊은 슬픔에 나오는 한 시인도 그리워할 그 무엇을 잃었을 때 삶이 지옥과도 같았다고 말한다. 그리워할 무엇이 없어 가슴이 사막이 되거나 눈보라치는 잿빛하늘이 되는 것보다는 영원히 잡히지 않아도 그리워하며 바라볼 별 하나 가슴에 띄우고 사는 사람은 행복하다. 그래서 어쩌면 사랑에 빠진 사람보다 더 행복한 사람은 무장무장 가슴이 타는 사람이라고 시인은 말하는 것일까.

오늘 밤엔 내 맘 창가에도 오랜만에 별이 들까? 아니면 그 누군가의 창가에 내 그리움이 별이 되어 찾아갈 수 있을까? 그리워할 무엇이 있음에 감사하면 좋겠다. 우리 모두가 그리움하나로 무장무장 타는 가슴이 오히려 행복임을 알 수 있다면 좋겠다. (2006)

 

 

VI. 자아의 감옥

 

문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난 열 수가 없었습니다. 손잡이를 만질 수가 없었습니다.

나는 왜 나의 감옥에서 걸어 나가지 못했던 것일까요?

무엇이 지옥입니까? 지옥은 우리 자신입니다.

지옥은 혼자입니다. 그곳의 다른 이들은

단지 투영된 그림자들일 뿐. 도망쳐 갈 것도 없고

도망하여서 갈 곳도 없습니다. 누구나 언제나 혼자니까요.

(T. S. 엘리엇, 칵테일 파티중 에드워드의 대사/필자 역)

 

 

(그림:이봉희)

 

문은 열려있는지도 모른다. 내가 절망하는 것이 습관이 되어서 이젠 문이 열려있는데도 외면하고 무기력하게 앉아서 날아가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어서 설거지를 하다말고 책상 앞에 앉아 그림을 그렸다. 새장을 그리고 열린 문을 그리고 횃대에 문을 외면하고 돌아앉아 눈을 감고 절망만하고 있는 새를 그렸다. 그래도 희망을 그리고 싶어서 파랑새로 그렸다. 그런데 어느새 내가 쇠창살을 그리는 대신 나무들을 그려 넣고 있었다. 숲이었다. 비록 나뭇잎이 무성하지는 않아도 새가 갇힌 곳은 새장이 아니라 숲이었다. 그래, 새는 갇혀있는 것이 아닌지 모른다. 맘껏 날 수 있는 숲인데 스스로 눈을 감고 자신의 무기력을 새장에 갇혀서라고 합리화시키는 것이다.

그런데 그림을 그리고 다시 생각해보니 어쩌면 나는 내가 갇힌 쇠창살 감옥이 고통스러워 숲이라는 환상을 만들어낸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어떤 경우든 문은 열려있다. 나는 날갯짓을 해야 한다. 이 자아의 감옥에서 나와야 한다. “당신이 자신의 적이 아닌 한/ 당신을 묶은 속박은 당신의 의식/ 자유도 마찬가지다. (E. 디킨슨)” (2007)

 

 

by bhlee

 

[겨울눈 나무숲-기형도]


눈(雪)은
숲을 다 빠져나가지 못하고
여기 저기 쌓여 있다.
'자네인가,
서둘지 말아.'
쿵, 그가 쓰러진다.
날카로운 날(刃)을 받으며.
나는 나무를 끌고
집으로 돌아온다.
홀로 잔가지를 치며
나무의 沈默(침묵)을 듣는다.
'나는 여기 있다.
죽음이란
假面(가면)을 벗은 삶인 것.
우리도, 우리의 겨울도 그와 같은 것'
우리는
서로 닮은 아픔을 向(향)하여
불을 지피었다.
窓(창)너머 숲 속의 밤은
더욱 깊은 고요를 위하여 몸을 뒤채인다.
내 淸潔(청결)한 죽음을 確認(확인)할 때까지
나는 不在(부재)할 것이다.
타오르는 그와 아름다운 距離(거리)를 두고
그래, 心臟(심장)을 조금씩 덥혀가면서.
늦겨울 태어나는 아침은
가장 完璧(완벽)한 自然(자연)을 만들기 위하여 오는 것.
그 後(후)에
눈 녹아 흐르는 방향을 거슬러
우리의 봄은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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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네인가.. 서둘지 말아... 그가 날카로운 날을 받으며 쿵, 쓰러진다.  나는 그를 끌고 집으로 와 홀로 그의 몸의 잔가지를 치며 그의 침묵을 듣는다. 서로 닮은 아픔을 향해 불을 지피며, 타오르는 그와 아름다운 거리를 두고 심장을 조금씩 덥혀가야지.  그렇게 나무와 함께 청결한 죽음을 확인할 때까지 나는 존재하지 않으려 한다. 녹아 흐르는 겨울 눈을 거슬러 봄이 다가오는 그때 나 다시 존재하기 시작할 것인가?

(120211) 

by bhlee

 

 

그리운 것들이 모두 창 밖에 있다.

창--환상 그러나 절실한 현실

나도 새가 되고 싶다

내가 날려보낸 새가 되고 싶다

                               (bhlee "입술" 중에서)  MP

오늘도 멀리 있는 딸아이에게 문자를 보내다가 "너가 행복하니까 엄마도 정말 행복하다" 라고 썼다가 얼른 고친다.

"너에게 행복한 일이 있어서 엄마도 정말 행복하다.!"라고. 

내 딸이 엄마를 행복하게 하기 위해서 자신이 행복해야한다는 부담을 주기 않기 위해서. 

인생은 힘들고 때로는 불행하다고 느끼는 순간이 얼마나 많은데 엄마를 위해서 그것을 숨기려하지 않도록.  삶은 힘겨운 것임을 알게 해주고 싶어서. 힘겹워하는 순간에도 딸을 보며 엄마가 불행하진 않다는 것을 알게해주고 싶어서. 엄마는 우리 딸이 불행한 순간도 넘어지는 순간도 있지만 긴긴 어둠의 터널 속에 있기도 하지만 그곳에서 인내할 줄 알고, 맞서 싸울 줄 알고, 빛을 찾아내려고 노력하는 것을 포기하지 않고 최선 다하는 것을 칭찬해주고 싶고 그런 딸이 자랑스럽고 행복하다는 것을 알게 해주고 싶어서.............

 

 

photo by bhlee

사용자 삽입 이미지



대체 나는 너를 기다리는 것일까
오늘은 비명없이도 너와 지낼 수 있을 거 같아
나 너를 기다리고 있다 말해도 좋은 것일까
(나희덕)

(c)photo by bhlee @Denver


어스름. 더스크. 땅거미... 그리고 꿈결

하늘은 항상 땅보다 천천히 어두워진다. 땅 위에 어둠이 덮인 후에도 아직은 바라볼 무엇이 하늘에는 있다.
흐린 날도, 비오는 날도 나는 밤이면 늘 하늘을 본다.

이런 시간이면 떠오르는 노래...
김광석의 거리에서...........

012917

 

https://youtu.be/TEKkvPQlO9M

 

photo by bhlee

@Santa Fe

겨울나무- 김혜순

나무잎들 떨어진 자리마다
바람 이파리들 매달렸다

사랑해 사랑해
나무를 나무에 가두는
등 굽은 길밖에 없는
나무들이
떨어진 이파리들이 아직도
매달려 있는 줄 알고
몸을 흔들어보았다

나는 정말로 슬펐다. 내 몸이 다 흩어져버릴 것만 같았다.
나는 이 흩어져버리는 몸을 감당 못 해 몸을 묶고 싶었다.
그래서, 내 몸 속의 갈비뼈들이 날마다 둥글게 둥글게
제자리를 맴돌았다. 어쨌든 나는 너를 사랑해 너는 내 몸
전체에 박혔어. 그리고 이건 너와 상관없는 일일 거야, 아마.

나는 편지를 썼다
바람도 안 부는데
굽은 길들이 툭툭
몸 안에서
몸 밖으로
부러져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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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편지를 썼다. 바람도 안 부는데. 떨어진 이파리 아직도 매달려 있는 줄 알고 몸을 흔들어 본다.


(c) photo by bhlee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은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하자.  - 서정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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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살이 영혼에 불을 그으면" (박상건)

 

 

photo (c)bhlee5716 

photo by bhlee

 

 

 

고속도로를 운전하고 출퇴근할 때 봄마다 안성을 지날때면 고속도로변 언덕위 줄지어 늘어 선 배밭--

그 언덕을  햐얗게 덮은 배꽃이 눈이 아프도록 부시게 손짓해서 늘 울어버릴 듯한 심정이었던 기억이 난다.

가슴이 후들거리도록 뜨거운 저 흰 불꽃들....저렇게 하얗게 불타오를 수도 있구나 생각했었지.

그렇게 침묵으로 아우성치며 나를 부르는 그 부름에 그만 무너져버릴 것 같았었지.

나보고 어쩌라고, 어쩌라고....

그리움으로 내 가슴도 하얗게 타버렸었지. 

 

그립다..... 다시 말을 하니 오물오물 아가의 여린 손이 펴지듯 그리움이 살아난다. 

봄은 무심히 오고 가는데. 

(c)photos by bhlee 

 

 

 

 

이제하 - 빈 들판

 

빈 들판으로 바람이 가네 아아

빈 하늘로 별이 지네 아아

빈 가슴으로 우는 사람 거기 서서

소리 없이 나를 부르네

 

어쩌나  어쩌나 귀를 기울여도

마음 속의 님 떠날 줄 모르네

 

빈 바다로 달이 뜨네 아아

빈 산 위로 밤이 내리네 아아

빈 가슴으로 우는 사람 거기 서서

소리 없이 나를 반기네

 

(출처: [나무생각] 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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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영화에서 엠마 톰슨이 앤소니 홉킨스에게 저녁에 불이 들어오는 시간이 가장 아름답다고 말을 한 것이 생각난다.

뒤늦게 깨달은 그러나 시간을 되돌릴 수 없는 안타까운 사랑이야기였다.

 

어스름이 내려오는 시간, 특히 늦은 봄 땅거미가 지는 시간을 가장 괴로워했다.

가장 아름다운 시간이기에 유독 아팠다. 유독 외로웠다. 유독 그리웠다.

그리고 유독 알 수 없는 슬픔이 밀려오는 시간이었다.

 

아직도 그렇다..........

 

화요일 전북대 한중문화사업단 초청 특강에 초대되어 갔었다.  중문과에 우리나라에서 정말 드믈게 서예과목이 있었다. 교수는 유명한 서예가 김병기 교수. 정말 많은 일을 하고 계신 교수님이다.  학생들에게 서예를 시키면 아이들의 마음이 정화되고 안정되고 치유되는 것을 느끼신다고.

 

한옥마을(이곳은 또 언제 다시 이야기 하기로 하고)과 여기저기 차로 데리고 다니면서 자세한 설명을 해주셨다. 

전주향교 마루에 앉아서는 낭낭한 목소리로 한시도 낭송해주시고.....

강암 서예관에도 가서 강암 송성용 선생의 서예를 감상했다.  교수님으로부터 한시의 의미와 작품 설명과 함께 들으니 그 분의 수묵화와 서예의 예술성을 조금이나마 더 잘 알수 있었다.  강암은 바람에 날리는 풍죽을 그린 화가로 유명하다.

 

그 중에 마음에 남은 작품중 하나는 수묵화와 함께 쓴 한시, 풍죽(風竹)이다. 그 한시의 해석은...

 

풍죽(風竹)

 

미풍이 불어 올때면 빙그레 웃다가

바람이 드세질때면 불평소리를 내기도 하지

아직도 악기를 다루는 명인을 만나지 못해

할일 없이 커다란 음악소리를 안으로만 감추고 있구나.

 

(대나무가 장차 큰 악기가 될 수 있는 재목인데

아직 명인을 만나지 못해 그 음악소리를 표현 못하고 속으로 감추고 있다는 뜻)

 

강암이 쓴 일지암이라는 글(서예작품)이 또 마음에 남았다.   서예작품 옆에 초의선사가 머물던 일지암 사진도 있었다.  쓸쓸한 듯 보이는 아주 작은 암자.  시승(詩僧) 초의선사가 그의 시상(詩想)에 가지는 수많으나 새가 깃드는 가지는 오직 하나로, "나는 새는 한가지의 나무에만 있어도 편안하다."는 데에서 '일지암(一枝庵)'이라는 암자이름을 얻었다고 한다.  강암의 글씨에서 '암'자는 마치 지붕아래 사람이 앉아 있는 듯이 보여서 그렇게 말했더니 그런 해석을 처음 들어봤다면서 보니 정말 그렇다고 김병기 교수님이 재미있어하셨다. 또 감동적인 것은 76세인가에 8시간동안 쉬지 않고 천자문을 쓰신 작품이었다.  정말 대단한 열정과 정신력과 에너지시다. 끝까지 글자가 흩어지지도 힘이 약해지지도 않으시고 한결 같이 쓰시다니.  교수님의 설명을 다 기억 못하는 게 아쉽다.

 

케이티엑스 역까지 태워주시고 기차시간 기다리기 무료할까봐 친절하게 또 곁에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가셨다.  김일로라는 시인의 시를 들려주셨던 게 가장 기억에 남는다. 내가 일본 하이쿠 시를 언급하자 우리나라에도 그런 비슷한 영역을 개척한 유일한 시인이 있다면서 김일로를 소개해주셨다.

 

꽃씨 하나 얻으려고 일 년

그 꽃 보려고 다시 일 년   (김일로)

 

김일로가 쓴 시 중  또 가슴을 울린 시는

 

저 숨결 저 몸짓

풀 한포기  돌 하나였으면 좋을 것을

 

이것을 김일로는 또 한시로 옮겼다는데 그게 기막혔다. 

一石草人不及

 

정말 감사한 마음이 가득이다. 내가 중문과 교수님들과 대학원생을 놓고 무슨 강의를 하면 좋을까 하고 고민하는 맘으로 갔는데 2시간 예정이던 것을  쉬는 시간도 없이3시간이 되도록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그리고 오히려 내가 더 많은 것을 배우고 느끼고 와서 되로 주고 말로 받는다는 게 이런 건가보다 싶다.  들고 가기 무겁다고 교수님께서 책과 도록 등을 보내주신다고 하셨다. 그리고 오늘은 K교수님이 자신이 번역하신 중국 소설3권을 보내주셔서 참 감사히 받았다.

언젠가 다시 가고 싶다. 특히 땅거미 진 후  전주천 길도, 한옥마을도 걸어보고 구석구석 들어가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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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남 두륜산 자락에 위치한 단촐한 암자 일지암은 초의 선사가 39세였던 1824년에 지어 40여 년간 기거한 한국 차 문화 중흥의 상징인 곳이다. 초의 선사는 추사 김정희, 다산 정약용 등 당대의 명사, 시인, 예인들과 폭넓게 교류하면서 이곳에서 다서()의 고전인 『동다송』을 저술하고 『다신전』을 정리했다고 한다.  『동다송』은 차의 효능과 산지에 따른 품질, 만들고 마시는 법 등을 적은 것으로 우리나라 최초의 차에 관한 책이며 동다(), 즉 우리나라 차에 대한 예찬을 담고 있다고 한다.(하지만 초의 선사 입적 후 일지암은 화재로 소실되었고, 현재의 일지암은 1970년대에 복원된 것이다.  차를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성지와 같은 곳이다."[네이버 지식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