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전쟁 직후인 1950년대 중반에 태어나 팍팍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부모는 남자 형제들에게 대학을 양보하라고 했다. 22세쯤 결혼해 시부모를 모시고 살면서 2명의 아이를 낳아 길렀다. 남편이 가져다주는 월급을 한푼 두푼 모아, 아이만큼은 '못 배운 설움'을 겪지 않도록 매섭게 공부시켰다. 사회는 이들의 열성에 '치맛바람'이란 별명을 붙였다. 남편이 한창 일할 때인 40대 초반, 외환위기에 가정이 휘청댔다. 생계, 그리고 아이들의 등록금을 위해 생전 처음으로 취업 전선에 뛰어들었다. 할 수 있는 일은 일용직, 혹은 임시직뿐이었다. 자녀가 대학을 졸업할 때쯤인 2005년, 20대 젊은이의 7.5%가 실업자인 '청년 실업의 시대'가 시작됐다. '88만원 세대'로 전락한 아이들은 아직도 부모에게 손을 벌린다.
통계청의 '인구주택 총조사' '경제활동인구 조사' 등을 토대로 재구성한 대한민국 55세 여성의 전형적인 삶이다. 전통적 가치관과 급변하는 사회를 치열하게 버텨온 한국의 50대 여성은 조선일보·한국갤럽·글로벌마켓인사이트가 신년기획 '2011년, 한국인이여 행복하라'를 위해 실시한 10개국 5190명의 여론조사에서 가장 불행한 집단으로 조사됐다. 중년 한국 여성의 불행 뒤엔 평생 축적된 경제적 부채의 굴레, 삶을 바쳐 뒷받침해온 가족에 대한 부담감이 자리 잡고 있었다.
◆한국 50대 여성, 10개국 중 가장 불행한 집단
영국 이코노미스트는 지난해 12월, 인생의 행복도가 20대에서 40대까지 꾸준히 떨어지다가 50대에 다시 올라간다는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인생이 내리 하락세가 아니라 40대에 바닥을 치고 반등하는, 이른바 'U자형 행복 곡선'을 그린다는 것이 미 프린스턴대의 연구 결과였다.
'행복 여론조사' 결과 한국의 남성은 전형적인 'U자형' 행복도를 보였다. 그러나 여성은 아니었다. 한국에서 가장 '행복하지 않다'고 느낀 세대는 50대 여성이었다. 스스로를 '행복하다'고 평한 여성의 비율은 40대 77.2%에서 50대 61.1%로 가파르게 떨어졌다. 한국의 50대 여성은 조사 대상 10개국의 모든 세대를 통틀어 '불행하다'고 답한 비율(37%)이 가장 높았다.
한국 여성의 행복도는 20대·40대 때 높고 30대·50대에 낮은 지그재그형이었다. 남성의 행복도는 20대에서 40대까지 떨어지다가 50대에 다시 상승했다. 50대 여성의 행복도가 세계 최저치를 기록하면서, 한국인 전체의 평균 행복도도 '50대 반등'에 실패했다. 행복한 한국인의 비율은 20대 80.2%로 높게 출발해 30대 69.2%, 40대 67.5%, 50대 64.2%로 꾸준한 내리막을 기록했다.
◆가족을 사랑한다… 그러나 한편으론 '인생의 큰 부담'
50대 여성은 빚과 관련한 질문에서 큰 부담을 드러냈다. 10명 중 7명이 '빚이 있다'고 답했고, 그중 42.6%는 빚으로 인한 이자 때문에 고민하고 있었다. 다른 나라의 경우 빚에 대한 부담은 주로 새 가정을 시작하는 20대·30대 몫이었다. 호주와 핀란드의 경우 30대 여성(각각 41.6%·29.5%), 미국은 20대 여성(35.9%)의 부채 부담이 가장 컸다. 반면 한국의 20대 중 '빚이 없다'고 답한 비율은 49.5%로, 조사 대상 10개국 중 가장 높았다. 대학에 입학한 후 학자금대출 등을 받으며 자립(自立)의 길에 들어서는 다른 나라 청년들과 달리 한국 젊은이 중 상당수가 20대가 되어서도 부모에 의존해야 하는 상황임을 드러낸다.
전통적인 가치관 아래 평생 가족을 보살피는 데 힘써온 한국의 50대 여성은 가족에 대한 애정과 피로감을 동시에 드러냈다. 그들에게 가족은 대체로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74.1%)이었지만 '필요에 의해 같은 공간에서 생활하는 사람들' '인생의 큰 부담'이라는 답이 한국인 평균을 웃돌았다. 특히 필요 때문에 가족과 같이 산다는 답은 전체 평균(1.4%)의 3배(5.6%)가 넘었다. 같은 세대의 남성 중엔 이 답이 한 명도 나오지 않았다. 이화여대 사회복지전문대학원 김미혜 교수는 "한국의 50대 여성은 전형적인 샌드위치 세대"라며 "보수적인 부모 아래서 자라 여성이라는 이유로 가족을 위해 많은 것을 희생하고서도, 정작 다음 자녀들에게는 자신의 노력에 대한 보상을 기대하기 어렵다는 박탈감에 빠져 있다"고 말했다.
◆"마음 수행 위한 종교 활동" 한국 50대 여성 78% vs 덴마크 11%
한국의 중년 여성은 삶의 위안을 종교에서 찾으려는 성향이 강했다. '마음의 안정을 얻기 위해 종교를 가졌다'는 비율이 77.8%로 평균(61.8%)을 크게 웃돌았다. '50대 한국 여성'은 전 세계에서 이 답이 가장 많이 나온 집단으로, 덴마크·호주·미국에선 같은 질문에 대한 답이 각각 10.6%·22.4%·45.8% 수준이었다. 종교의 본질인 '진정한 믿음'을 좇는 50대 여성은 7.4%에 불과했다. 영국 필로소퍼스 매거진 줄리언 바지니 편집장은 "종교를 종교 자체로 믿는 사람은 높은 행복감을 보이지만, 현실 탈피를 위한 도구로 종교를 활용할 경우 행복감은 거의 상승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한국인이 아이를 낳지 않는 이유에 대해서도 50대 여성은 다른 세대와 동떨어진 답을 냈다. 한국인이 가장 큰 이유로 꼽았던 '경제적 부담'에 대한 답은 평균(52.6%)보다 낮게(48.1%) 나왔다. 대신 '살기 어렵고 고통스러운 세상에 아이를 태어나게 하고 싶지 않다'는 염세적 의견(20.4%)이 압도적으로 높았다.
고려대 사회학과 김윤태 교수는 "선진국의 50대 여성들은 자녀가 성인이 되는 순간 '가뿐하다'는 기분으로 그동안 누리지 못했던 개인의 취미 생활을 즐기는 것이 보통"이라며 "반면 한국의 중년 여성 중 대다수는 남편의 고용 불안, 자녀 결혼 자금 마련 등 가족이라는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상태"라고 말했다.
A River Runs Through It (based on the novel by Norman Maclean) 역저 2002(c)BongheeLee
출판사 사장님을 설득해서 처음으로 영화교재에 영화해설(<관람석에서>라는 부록을 뒤에 첨가하자고 설득해서)을 실은 책이다.
그 이후 그 출판사의 교재에는 해설이 함께 나오게 되었다. 우연히 다른 책을 검색하다가 내가 편집하고 번역해서 낸 이책에 역자가 낸 다른 책이란 소개에 내 책은 하나도 없고 엉뚱한 동명이인의 다른 사람의 책이 올라와 있어서 경악했던 기억이 난다. 참, 무책임한 인터넷이고 알라딘이다....
한 번도 똑같은 물결인 적이 없는 "흐름"앞에 나약한 작은 인간으로 서서 한결같은 인내와 희망과 겸손함과 훈련된 절제력으로 그리고 더 나아가서는 예술가적 직관으로 예측불허인 고기와의 해후를 기다리듯이 우리는 흐르는 인생가운데서 그 의미와 수수께끼의 답과 만나기를 기다리는지 모른다. 부록 : 이봉희교수의 <관람석에서> 중에서
보는 순간 ’혁명적’으로 다가오는 영화가 있는 반면, 어떤 영화는 의식하지 못한 가슴 한구석에 몰래 씨앗을 뿌린다. 그리고 순식간에 바오밥나무 급으로 자라며 몸과 영혼을 송두리째 먹어버리고 만다. 대학 신입생 시절 교수님 추천으로 만난 영화 <흐르는 강물처럼>이 그런 감정을 경험하게 해준 첫 영화였는데. 그 후 영화 보는 시각이 달라졌음은 두 말할 것 없다. .................... 결국, 대학 시절에 결코 쓰지 않을 낚시 용어만 마구 외우다가 끝났던 풋풋한 추억이지만. 영화도 역시 타이밍이 중요한가보다. 어느 잠이 오지 않던 밤. 새벽에 이 책을 지분거리다가 부록이자 번역을 하신 이봉희 교수의 글을 보며 서늘하고도 뜨거운 바람을 맛봤다. 정전하고 누운 고요한 방에서 내 심장소리가 들렸던듯 하다.
몇 년 동안 스크린 영어사도 발전을 하며, 테이프 대신 MP3 CD를 제공하고, 종이 질도 빳빳해지고, 흑백인쇄에서 컬러인쇄로 업그레이드 되고. 몇 년의 물가 상승을 반영하듯 3000원 정도 가격이 인상되었는데. 그 전보다 영화 분석 면에서 ’촌철감동’을 느끼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여전히 이 영화와 대본을 보면 울컥하는 감정, 부록을 읽던 새벽이 고스란히 기억에 남는다. 아마도, 파란 봄의 한 자락이 기록되었기 때문이리라. (coolcat** 님) ---------------------------------
사실 이 영화수업 후 형제간의 문제 해결을 받은 상담전공 대학원선생님도 있다.^^ 문학은 정말 예측할 수 없는 치료적 힘이 있다. 2002년 번역하고 편집한 역저서였는데 재판을 찍으면서 어느새 편집부 저, 이봉희 역이라고 맘대로 바꾸었네. 편집부에서 무얼 저술했단 말이지? 참 답답하다.
러시아의 위대한 작가 안톤 체홉의 “청혼”은 소극(farce)이다. 소극(笑劇)이란 인물들을 과장되고 엉뚱하며 실제상황에서는 있음직하지 않은 우스꽝스러운 상황 속에 놓이게 하여 사건을 전개시키고 웃음을 자아내는 희극(comedy)으로 주로 일상의 생활풍속의 문제점들을 비꼬고 풍자하는 내용으로 되어있다. 대개의 경우 의도적인 말장난이나 과장된 행동들, 그리고 넌센스, 부조리함, 신분 위장 등이 포함된다. 소극 속에 그려지는 인간들은 주로 허황되고, 비이성적이며, 돈밖에 모르고, 유아스럽고, 그 행동에 목적의식이 없으며 이성적인 생각이나 절제가 없는 자동적 반응을 보인다.
이 극에는 딸을 시집보내려고 애쓰는 홀애비 지주 스테판 스테파노비치, 그의 딸 나딸리아, 그리고 같은 마을의 청년 이반 로모프가 등장한다. 나딸리아는 지나치게 극적이며, 결혼을 하지 못할까봐 두려워하고 있는 노처녀(당시는 25살이 노처녀였다)이고, 로모프는 나탈리아에게 청혼하려 온 35살의 마을 노총각으로 심약하고 건강염려증에 사로 잡혀 있는 히포콘드리아 환자이며 그로 인해 심계항진증(자주 심장이 두근거리고 떨리는 증상)을 앓고 있다. 안톤 체홉은 잘 알려진 대로 의사이면서 작가이다. 그의 의학 지식은 인간의 우스꽝스런 일면을 병적 증세로 파악하여 생생하게 그리는데 도움을 주고 있다.
"청혼"은 결혼이라는 주제, 그리고 결혼을 위한 청혼의 과정을 부조리하고 우스꽝스럽게 그려보여 줌으로써 그 과정에 나타난 사람들이 본성과 위선, 사회와 전통의 결혼에 대한 문제점을 희극적으로 그러나 날카롭게 풍자하고 있다. 결혼에 필요한 경제적인 문제와 두 사람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 사이의 균형을 맞추기 위한 갈등과 투쟁, 특히 등장인물들이 결혼을 하고자 하는 결사적인 노력이 시종일관 희극적으로 그려진다.
체홉의 시대에 러시아에서는 결혼은 사랑하는 사람들이 하나의 가정을 이루는 만남이기보다는 경제적인 안정을 위한 하나의 절실한 수단이었다. 사람들은 부와 재산, 그리고 사회적 지위를 얻기 위해서 결혼하였다. 이 극의 두 남녀는 결혼을 간절히 원하면서도 작은 풀밭 (Oxen Meadows)의 소유권이나 가족과 조상들 이야기, 아니면 Guess와 Squeezer라 불리는 개처럼 아무것도 아닌 작은 일에 목숨이라도 건 듯 바보 같은 논쟁을 벌이느라 정작 청혼의 기회는 번번히 놓치고 두 사람이 그렇게 원하는 혼인은 이루어질 길이 보이지 않는다. 체홉은 이런 바보스런 남녀의 행위에 초점을 맞춰 확대하여 보여줌으로써 물질주의적, 그리고 계약적 결혼제도를 날카롭게 풍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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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하면 우리는 인간이 존재한 이래 계속되어 온 그 오랜 신화를 잊을 수 있을까요? 마지막에 공주로 변하는 용에 대한 수많은 신화를. 어쩌면 우리 삶 속의 모든 용들은 우리를 만나기 위해 기다리고 있는, 한때는 아름답고 용감했던 공주였는지 모릅니다. 어쩌면 모든 끔찍스런 것들은 우리 존재의 깊은 곳에서 우리의 도움을 간절히 기다리고 있는, 스스로는 어찌할 수 없는 그 어떤 것인지 모릅니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
문학치료는 내 안에서 도움을 청하는 아름답고 용감한 그 무엇의 간절한 목소리를 찾아주는 일이다. 내 안의 나의 모습이 때로는 내가 원치 않는 피투성이의 모습이거나, 용처럼 끔직스런 모습일 수도 있다. 내 스스로 미로 속에 깊이 가둬둔 반인반수 미노타우로스처럼 나의 어둡고 고통스런 과거이거나 내면의 모습일 수도, 아니면 이카로스나 디달로스 같은 창조적 힘과 자유에의 욕망일 수도 있다. 그런 나의 모습이야말로 스스로는 어찌할 수 없어서 나의 도움을 간절히 기다리고 있는 진정한 "나"인지 모른다. 문학치료란 영어로는 포이트리테라피(Poetry Therapy), 비블리오테라피(Bibliotherapy), 저널테라피(Journal Therapy)를 모두 포함한 말로 참여자와 치료사 사이의 치료적 상호작용을 위해 문학과 글쓰기를 사용하는 것을 말한다. 다시 말하면 문학치료는 문학과 참여자(내담자)와 훈련받은 문학치료사/촉진자 간에 이루어지는 상호작용으로, 참여자에게 문제에 접근하는 새로운 방법을 배울 수 있게 하고, 또 다른 관점에서 그 문제를 생각할 수 있는 통찰력을 제공하여 줌으로써, 궁극적으로는 올바른 자아인식에 이르게 하는 “과정”이다. 이 과정에서 치료사(촉진자)는 참여자/그룹의 성격과 치료목표에 따라 선별한 여러 형태의 문학을 촉매로 치료적 대화와 토론을 사용하여 참여자의 통찰과 성장과 문제해결을 돕는다. 문학치료에서 말하는 ‘문학’은 여러 장르의 상상의 문학, 이야기, 신문기사, 노랫말, 연극, 시, 영화, 비디오, TV드라마, 일기 등 생각과 느낌을 이끌어내기 위해 사용될 수 있는 언어를 표현매체로 사용한 광의의 문학을 말한다. 문학은 치료를 위한 촉매의 역할을 하게 되며 치료 경험은 문학치료사, 시인, 또는 시/문학치료의 수련을 거친 전문가의 ‘촉진’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예술로서의 문학의 초점이 문학 자체에 있다면 문학치료에서 사용하는 문학은 예술적/문학적 가치나 위대함이 아니라 깨달음과 자아발견을 위한 도구로서의 가치에 중점을 둔다. 문학 치료를 위해 선택되는 문학은 사람들이 ‘같은 배를 탄’ 다른 사람들과 만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에 ‘보편적인 진실’을 담고 있으면서도 마음속 깊은 곳에 숨어 있는 목소리를 이끌어내기 위해서는 진부해서는 안 된다. 문학 치료 프로그램 중 참여자는 시, 저널(일기), 콜라주나 그림을 그리고 글쓰기 등을 하는데 이때 참여자가 쓴 글이 잘 썼는지 예술성이 있는지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오직 그 과정에서 일어나는 ‘아하!’의 순간, 뜻밖의 깨달음이나 자기 성찰이다.(많은 분들이 ‘나는 글을 못 써요.’ ‘문학은 잘 몰라요.’ ‘시는 어려워서 읽기도 겁나요.’라고 염려하거나 반대로 ‘나는 시인이에요.’ ‘수필가예요.’라고 말하는데 문학 치료와 소위 말하는 ‘글쓰기 재능’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오히려 글쓰기나 문학을 두려워하던 많은 분들이 자신이 쓴 글, 즉 자신 속에 숨어있는 시인을 만나고 놀라게 된다.) | 문학치료의 역사
고대 테베의 도서관 정문에는 "영혼을 치유하는 곳"이라는 글이 걸려 있었고 스위스의 한 중세 대수도원 도서관에도 "영혼을 위한 약상자"라는 의미의 글이 새겨져있었다. 이것은 고대로부터 문학이 가지는 치유의 기능을 보여주고 있다. 치료와 성장을 위해 시와 노래가 쓰인 예는 이미 원시인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종교적 제의에서 무당이나 제사장들은 개인이나 부족의 건강과 안위를 위해서 시나 노래를 읊었다. 고대 이집트에서는 최대한 즉각적인 효과를 위해 파피루스에 글을 써서 그것을 물(액체)에 녹여서 환자가 마시게 하기도 하였다. 기원전 1030년경에는 다윗이라는 소년의 시와 음악이 사울 왕 속의 “야수”를 잠재우기도 하였다. 의술과 예술이 서로 밀접한 관련이 있음은 신화 속 아폴로 신이 의신(醫神)이면서 동시에 시/예술의 신인 것을 봐도 알 수 있으며 테살리 지역의 의사로서 명성이 높았다는 아스클레피우스는 아폴론의 아들이라는 신화가 만들어지기도 했다. 또한 신화에 보면 오세아누스는 프로메테우스에게 ‘말은 병든 마음을 치료해주는 의사’라고 말한다. 프로이드는 “무의식의 세계를 발견한 사람은 내가 아니라 시인”이라고 했고 심리극(싸이코 드라마)이라는 용어에 이어 심리시(싸이코 포이트리)라는 용어도 생기게 되었으며 1960년대에 오면 집단 심리치료의 발달과 더불어 심리치료사들이 시치료를 함께 사용하기 시작하면서 점차 문학치료는 재활, 교육, 예술창작, 상담, 심리치료 등의 분야에서 전문가들에 의해 부흥하기 시작하였다. 최근 들어 정신의학전문가들은 첫째, 문학(시)의 환기작용과 둘째, 글쓰기의 힘이라는 문학의 치료적 힘을 확인하여주었다. 문학, 특히 시는 그것을 읽는 사람의 내면에서 연상 작용을 일으키고 의식적 무의식적 기억과 생각을 환기시켜 이끌어 내는 강렬한 힘이 있다는 것이다. 또한 내담자가 다른 사람이 쓴 문학(시)에 대한 개인적 반응을 글로 쓰든 아니면 자신만의 경험과 감정을 글로 쓰든 글쓰기가 놀라운 치료의 힘이 있음을 인정한 것이다.
| 문학치료의 목적
문학치료의 궁극적인 목적은 그것이 자기개발을 위한 문학치료이든 임상적 문학치료이든 환자/참여자의 자아 존중감의 회복과 향상, 그리고 사기진작에 있다. 참여자의 전인적 성장을 도와서 자신을 너그럽게 수용하고 보다 아름답게 자신을 개발하며 변화될 수 없는 현실과 실존적 상황에 보다 창의적으로 대처하게 함으로써 내재된 갈등을 해소할 수 있는 내적 능력과 적응기능을 증진시키는 것이다. 에리히 프롬이 주장하듯이 자신에 대한 사랑은 자신에 대한 존경과 관심과 책임, 그리고 올바른 이해를 바탕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또한 자신을 진정 먼저 사랑하지 않고는 결코 타인에 대한 사랑은 불가능하다. 문학치료는 인간관계에 대한 이해와 깨달음을 증진시킨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 시인 존 던의 말대로 “그 누구도 섬이 아니다.” 그 누구도 타인들과의 관계 속에서의 자신을 이해하지 않고는 자신을 바로 이해할 수 없다. 이것은 마틴 부버의 말을 빌리면, “만남을 통한 치유”를 이루는 것으로 특히 그룹/집단 문학치료 모임의 토론을 통해 더 잘 이루어질 수 있다. 문학치료는 더 나아가 현실을 직면하며 그에 근거한 사고를 하도록 돕는다. 문학치료는 참여자들에게 ‘실존적 문제’를 직면하도록 돕는다. 실존적 문제란 예를 들어 “삶은 때로 불공평하고 불공정하다, 고통과 죽음으로부터의 탈출구는 없다. 아무리 타인과 친밀할지라도 나의 삶은 여전히 내 홀로 직면해야한다. 나는 나의 삶과 죽음의 문제를 직면해야한다. 따라서 보다 정직하게 살아야하며 사소한 일에 얽매여선 안 된다. 타인들의 도움과 인도와 무관히 내 삶의 방식에 대한 궁극적인 책임은 내가 져야한다”와 같이 우리가 보다 성숙하게 직면하고 포용해야하는 실존적 한계상황을 말한다. 이러한 궁극적 목표를 이루는 과정에서 문학치료는 의사소통 능력을 강화하여 관계의 문제를 해결하고, 창의적 자아를 개발하며, 격렬한 감정들을 털어놓고 스트레스를 해소함으로써 긴장을 완화시키고, 새로운 생각, 통찰, 또는 정보들을 통하여 새로운 의미를 발견하며, 자유롭고 풍성하고 유익한 미의 가치를 체험하도록 하여 삶의 질을 향상시킨다.
| 나를 찾기 위해서는 낯선 자를 찾아가라
“나를 찾기 위해서는 낯선 사람을 찾아가라”는 말이 있다. 우리들 속에 있는 보물을 뜻밖에 “낯선 사람들”을 통해서 찾는 경우가 종종 있다.
어떤 마을에 사는 현자가 3번의 꿈을 꾸었다. 꿈에서 천사가 나타나 이웃마을로 가라고 지시하면서 그곳에 가면 성문 앞, 다리 근처에 보물이 있다고 말해주었다. 그 현자는 이웃 마을에 도착해서 성의 파수병에게 그 이야기를 해주었다. 그런데 그 파수병은 자신도 꿈을 꾸었다는 것이다. 그의 꿈에서도 천사가 나타났는데 그에게는 바로 현자의 집으로 가면 그 집안 벽난로 앞에 보물이 숨겨져 있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그 말을 듣고 현자는 급히 집으로 돌아가서 벽난로 앞을 파보았더니 그 곳에 보물이 있었다.
이 이야기는 여러 의미에서 문학치료의 진수를 요약하고 있다. “낯선 사람”은 일차적으로 문학치료가 사용하는 도구인 문학을 의미하며, 또한 문학치료사/촉진자이다. 치료사는 또 다른 “타인들” 즉 치료그룹의 참여자들과 함께 보물을 찾는 일이 용이하도록 도와준다. 이 예화에는 중요한 사실이 하나 더 드러나 있는데 바로 자신의 집에 보물이 있었다는 점이다. 이 때 ‘보물’은 진정한 자아인식을 말하는 것으로 즉 치료란 바로 나 자신에게서 이루어지는 것으로 그 초점이 외부의 상황의 변화가 아니라 나의 인식의 변화와 자아의 발견과 성장, 확대에서 이루어지는 것임을 말해주고 있다.
시인 로버트 프로스트도 “시는 즐거움으로 시작해서 지혜로움으로 끝난다. 시의 일차적 기쁨은 내가 이미 알고 있다는 사실을 미처 알지 못했음을 기억하는 놀라움에 있다.”고 말한다. 즐거움으로 시작해서 지혜로움으로 이끌며, 그 과정은 외부에서 주어지는 것이라기보다는 참여자 스스로가 찾아가도록 돕는 것이 문학/시라는 이 말 속에 문학 치료의 과정과 효과가 단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다른 측면에서 보면 위에 인용한 설화에서 "낯선 사람"을 찾아간다는 것은 문학/예술이 제시하는 "새로운 시각"의 세계로 들어간다는 것을 의미하는 상징이다. 우리의 눈은 영국 시인 코울리지의 말대로 "낯익음과 이기적 근심걱정의 막"에 가리어져 있어서 세계의 경이로움과 아름다움 앞에 "눈이 있으되 보지 못하고 귀가 있으되 듣지 못하고 마음이 있으되 느끼지도 이해하지도 못한다." 이 막은 우리의 눈, 즉 판단력을 흐리게 할 뿐 아니라 구태의연한 습관성 때문에 통찰력이 무디어지고 자동화되어서 자동기계나 도식성으로 살아가게 만드는 것이다. 따라서 문학과 예술은 그 막을 거두어 새로운 시각을 보여주어야 하며 이것이 문학의 “낯설게 하기" 효과로 문학치료 참여자에게 자신의 문제를 새롭게 바라보게 해준다.◀ 두려움앞에서 한없이 작아지는 나를 표현한 그림일기(11세 남자아이)
요슈타인 가아더는『소피의 세계』에서 철학하는 유일한 능력은 “놀라워할 줄 아는 능력”이라고 했다. 문학은 우리의 삶의 사소하고 작은 일상에서 경이로움과 즐거움에 놀라워 할 줄 아는 능력을 다시 회복시켜주고 개발해준다. 이러한 능력의 회복은 자아성찰로 이끌 뿐 아니라 더 나아가 더 심오한 정신과 영적인 경이로움인 믿음, 신뢰, 우정, 사랑, 아름다움, 등을 깨달을 수 있도록 우리의 통찰력을 깨우쳐주게 된다. 아름다움이 인식되는 곳에서는 자아의 완성이 이루어진다는 말이 있다. 이 때 개개인은 산타야나가 말하듯 “자아의 속박”에서 잠시라도 해방되는 자유를 누리는 것이다.문학의 신선한 시각은 고착되고 습관화된 사고에 새로운 눈을 부여하게 되며, 우리의 건강하고 창조적인 상상력을 유발시켜준다. 상상력이 없다면 우리는 시공간의 감옥에 갇혀 살 수 밖에 없는 수인(囚人)과 같다. “지금 이 순간”과 “지금 이 장소”로부터 자유로이 해방되기 위해서는 상상력이 필요하다. 우리는 상상 속에서 “언어를 통해” 자유롭게 무한한 세계로 탐험하고 새로운 진실들을 발견하며 결국 현실 속 우리자신과 세계의 의미를 재발견할 수 있다.
| 시적(詩的) 요소들의 치료적 원리
문학이 내면의 진실을 환기시키고 감정의 공감과 해방을 통한 정화를 가져올 수 있도록 하는 데는 문학이 지닌 시적 요소들이 우리 정서에 미치는 영향력 때문이며 따라서 문학의 시적 요소들이 문학치료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문학, 특히 시의 힘은 주로 이미지(심상)를 통해서 마음의 눈으로 보는 데서 온다. 심상은 꿈과 무의식의 언어이며 그렇기에 무의식적 자료들을 의식세계로 불러오는 촉매역할을 한다. 우리의 심리는 내적인 심상의 자극과 표현에 의해서 발달, 성숙해져간다. 자아인식은 문학, 연극, 움직임(춤), 소리(음악), 글쓰기, 말하기, 그림그리기, 조형물 만들기 등을 통해 나타나는 여러 이미지를 탐구하면서 이루어진다. 이미지는 가능함과 불가능함, 실현가능한 꿈과 욕망하는 것 사이의 모순을 끌어안는다.
은유와 상징이 가장 풍성한 것은 시라고 볼 수 있다. 심상은 사람들에게 어떻게 그들의 창조적 상상력을 발휘할 수 있는지 가르쳐주며 우리 속의 숨은 원동력을 일깨워서 역기능요소들을 해소하고 변화를 촉구한다. 프로이드는 시인을 “전문적으로 백일몽을 꾸는 사람”라고 말하면서 꿈과 시의 유사함에 주목하였다. 그는 “무의식의 세계를 발견하는 사람은 내가 아니라 시인이다. 마음은 시를 짓은 기관이다”라고도 말하여서 무의식의 세계를 드러내는 시의 역할을 강조하고 있다. 꿈과 시는 심상, 전이(치환), 압축 등과 같은 동일한 심리학기제를 사용한다. 시의 섬세하고 미묘함은 참여자에게 거부감 없이 다가갈 수 있다. 참여자나 그룹의 성격에 맞는 신중하게 선택된 시를 소개함으로써 문학치료사는 그 치료세션의 토론주제를 소개하게 된다. 만일 그 집단이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지 않다면 그것을 회피할 것이다. 그러나 시의 섬세함 때문에 그 저항도 부드럽게 이루어지게 된다. 따라서 문학을 “매개”로 사용하지 않는 다른 치료와 달리 위협적이거나 거부감이 덜하여서 일반 전통적인 상담이나 치료를 거부하는 사람도 문학치료에는 기꺼이 참여하는 경우가 있다. 페리 롱고는 시를 읽고 쓰는 것은 “나”를 정의하도록 도와줄 뿐 아니라“나”를 강화시켜준다고 말한다. 나를 강화시키는 것은 세상의 일원으로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한 것이다. 고통 받는 사람들에게 가장 큰 위로중 하나는 나만 혼자 그런 일을 겪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다. 우리가 이 광대한 세계에 단절된 혼자가 아니며 이 세계의 모든 존재들에 연결되어있고 융화되어 있음을 느끼는 것은 자아 존중심을 키워주게 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정화(카타르시스)이론은 그 과정에 정서의 통제와 분출을 모두 포함한다. 문학치료는 정서적공감과 분출을 통해 워즈워즈가 “내게 찾아온 건 오직 슬픈 생각 뿐/ 때맞춰 그 슬픔을 말하니 그 생각 사라지고/ 나는 다시 건강해졌네”라고 노래한 것처럼 치료적 체험으로 이끄는 것이다. 시인 하이네도 “병은 모든 창조적 욕구의 궁극적 근거/ 창조하면서 나는 회복될 수 있었고/ 창조하면서 나는 건강해졌네.”라고 말하여서 문학치료의 카타르시스적 의미를 확인해준다. 또한 시는 은유를 사용하기 때문에 사람들이 다른 방법으로는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할 수 있게 해준다. 참여자(내담자)는 시 쓰기를 통해 산문 쓰기에서 표현할 수 없는 자신의 문제들을 표출하게 됨으로써 문학치료 세션은 참여자/내담자가 수치스럽거나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는 첫 발걸음이 될 수 있다. 문학치료사는 죽음, 상실, 이별, 외로움, 고독, 등과 같은 개인의 “실존적” 관심사들에 말을 건넬 수 있는 광범위한 문학을 찾아내어 사용한다. 이러한 주제들은 일반적으로는 금기시 되어있지만 문학치료세션에서는 가까이 다다가 살펴볼 수 있다. 시는 다양한 층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드러내면서도 감추는 이런 시의 능력은 바로 참여자가 자신을 비난받지 않고 감추어 드러낼 수 있는 자유를 누리게 해준다.
◀ (c) BongheeLee 차라리 침묵하라
분노나 슬픔 같은 감정들이 표현되지 않거나 억압되어 있으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대신 육체적, 정신적인 부정적 증상으로 우리 안에 남게 된다. 감정은 라틴어의 ‘흐르다’는 말에서 나왔다. 캐슬린 애덤스를 비롯한 여러 저널치료(글쓰기치료) 전문가들은 감정(이모션 emotion)은 좋고 나쁜 윤리적인 것이 아니라 “움직이는 에너지(에너지 인 모션Energy in Motion),” 즉 E(이)-모션 일 뿐이므로 억압할 것이 아니라 표현해서 해소시켜야 한다고 말한다. 심리학자인 페니베이커 교수도 우리가 경험한 심리적 외상(트라우마)의 심각성 자체보다는 그것을 억압하고 털어놓지 못하는 데서 정신적 육체적 건강상의 질병이 초래된다고 말한다. 영국시인 바이런의 말처럼 시는 감정 뿐 아니라“상상력의 용암이기에 지진을 막기 위해서는 분출되어야”한다. 시를 읽고 쓰는 과정은 용암처럼 폭발 잠재력을 가진 심리적인 에너지가 분출될 수 있는 안전한 출구를 제공하는 것이며 그럼으로써 심리적인 균형과 건강을 회복시켜준다. 또한 시는 미묘하고 다양한 층의 의미를 포함하고 있기는 하지만 동시에 감정을 솔직히 드러내기도 하는데 이 솔직성이 사람들로 하여금 어려운 문제를 탐색하도록 도와준다. 참여자가 시인, 또는 같은 동료 참여자가 진솔한 이야기를 털어놓는 것을 듣게 되면 그들도 부담 없이 자신의 문제를 털어놓게 되는 것이다.
특히 참여자가 내적 느낌을 시나 저널(일기)처럼 글로 쓰는 것은 그 이전에 형태가 없었던 느낌과 생각들을 흰 종이 위에 흑색글씨로 외면화하는 것이다. 이 구체화작업은 참여자로 하여금 자신이 문제를 통제하고 있다는 느낌을 갖게 해줄 뿐 아니라 글쓴이가 자신의 생각을 새로운 관점에서 바라보게 해준다. 문학치료의 정의 속에 저널치료(journal therapy)를 적극적으로 포함시켜 글쓰기치료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글쓰기치료는 다음 소개될 예정임)
| 나는 어떤 시가 될 것인가?
프로이드는 우리의 정신이 시를 짓은 기관이라고 말하면서 또한 우리 각자 속에는 시인이 살고 있어서 이 세상에서 인류가 멸망하는 날 마지막 시인도 사라질 것이라고 말했다. 도종환 시인은 프로이드를 인용하면서 “내 안의 시인”이라는 시에서 “모든 사람의 가슴속에는 시인이 살고 있었다는데/ 그 시인 언제 나를 떠난 것일까"라고 묻고 있다. 문학치료에서 말하는 참자아의 발견이란 또 다른 의미로 우리 속의 놀라운 아이(Wonderful Child)로 대변되는 창조적 자아의 발견이다. 이 참 자아는 프로이드가 말하는 내 안에 존재하는 “시인”이라 볼 수 있다. “치료사가 맨 먼저 해야 할 일은 사람들 속의 시와 작업하는 것이다. 그들과 함께 일할 때 그들 내면의 시가 우리를 인도하도록 하면 치료사의 일을 바르게 해낼 수 있을 것이다” 는 파프의 말도 프로이드의 말을 상기시킨다.
▲"이 연필 안에 말들이 웅크리고 숨어있다." 시읽고 시쓰기(30대 직장여성)
하지만 필자는 우리 각자가 하나의 시(詩)라고 생각한다. 우리 각자는 해석, 또는 번역되어야 할 고유의 언어이며, 시이며, 상징이며 암호이다. 오해라는 말이 해석의 오류를 뜻하듯이 사람사이의 소통은 타인의 언어, 즉 시(詩)로서의 타인을 이해하고 의미를 부여하고 번역하는 일이기도 하다. 우리는 누구나 각자의 안경과 시선을 가지고 있다고 흔히 말한다. 그 뿐 아니라 우리는 각자 자신의 사전을 가지고 있어서 그것으로 상대의 말을 해석/번역한다. 영어표현에 “나는 당신과 다른 언어를 쓰고 있습니다(I don't speak your language.)"라는 말은 많은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가끔은 세상에 ”나를 함부로 번역하지 말라, 당신의 언어로 나를 정의내리지 말라”(이봉희 시,"나를 함부로 번역하지 말라" 중에서)고 외치고 싶을 때가 있다. 이탈리아 극작가 피란델로의 말대로 누군가를 정의내림은 살인행위이며, 노자의 말대로 무엇인가 명명될 수 있다면 그 이름은 더 이상 그것의 영원한 이름이 아닌지도 모른다(名可名非常名). 그렇기에 문학은 우리에게 시(정의 내릴 수 없는, 물질화 될 수 없는 모든 인간과 세상의 정신적, 영적 존재가치를 상징하는)의 가치에 대한 끝없는 도전을 던지는 것이다.
“오, 나여, 삶이여, 수없이 던지는 이 의문/ 믿음 없는 자들로 이어지는 도시/ 바보들로 넘쳐흐르는 도시 /어디서 아름다움을 찾을까? /오 나여, 오 생명이여!" (휘트먼) 대답은 오직 하나ㅡ네가 거기 존재한다는 것. 생명과 너의 존재가 여기 있다는 것. 인생이라는 놀라운 연극이 계속되고 있고 너 또한 그 연극에 한 편의 시가 된다는 것. 놀라운 연극은 계속되고 너 또한 그 연극에 한편의 시가 된다는 것…자, 너의 시는 어떤 것이 될까?” (톰 슐만, <죽은 시인의 사회>)
나는 과연 어떤 시일까? 끊임없이 계속되는 강렬하고 놀라운 인생이라는 연극에서 나의 시는 어떤 것이 되어야할까?
| 모두가 병들었는데 아무도 아프지 않았다
릴케가『말테의 수기』에서 말하듯 세상은 거대한 병원인지 모른다. 실존적으로 불완전한 인간들은 모두 이런 저런 의미에서 어떤 질병이든 병에 걸려있거나, 또는 잠재적인 환자이기 때문이다. “모두가 병들었는데 아무도 아프지 않았다”(‘그날’ 중)는 이성복 시인의 말대로 실존적으로 불완전한 존재인 인간들은 다만 병이 들고도 그것을 인식하지 못하거나 스스로 외면하고 살아갈 뿐이다. 어쩌면 사람들은 악하기 이전에 깊이 병든 상태라고 말하는 것이 옳을지 모른다. 신체적 질병과 달리 눈에 보이지 않는 정신적 심리적 상처와 감정적 격변을 겪은 이후의 후유증 등은 거의 전문적인 도움이나 보상을 받지 못하는 것이 우리나라의 실정이다. 심지어 전문가의 도움이 절실한 경우라도 본인 뿐 아니라 가족들이 그 도움을 받는 일 자체를 가족의 수치심으로 생각하는 경우도 빈번하다. 이렇게 상담문화가 보편화 되어있지 않은 우리나라의 현실에서, 그리고 정신적 스트레스나 트라우마(심리적 외상)가 진지한 관심과 상담, 그리고 치료를 받아야 할 질병의 하나라는 사회적 인식이 확산되지 못한 환경에서 문학/예술이 본래의 기능과 가치인 치료적 힘을 회복하는 일은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시대적 요청이다.
the broken column(1944) by Frida Kahlo (used here only for therapeutic and/or educational purposes) 프리다 칼로가 자신의 척추의 고통을 부셔지고 깨어진 기둥으로 표현한 그림으로 그녀가 평생 겪는 육체적 고통을 표현한 여러 자화상 중 하나.
"나는 병이 난 것이 아니다. 나는 산산히 부셔셨다. 그러나 내가 그림을 그리는 한 나는 행복하다. " "나는 나 자신의 현실을 그린다. 내가 아는 것이라고는 내가 필요해서 그림을 그린다는 것이다. 나는 그저 내 머리 속을 스쳐가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그린다. 다른 생각은 없다.(I paint my own reality. The only thing I know is that I paint because I need to, and I paint whatever passes through my head without any other consideration)" (프리다 칼로) ----
pictures are from the movie, Frida, and used only here for therapeutic and/or educational purposes)
발아, 날 수 있는 날개가 있다면 네가 무슨 소용있단 말인가? (발가락을 절단 한 후)
마지막 외출(퇴장)이 즐겁길, 그래서 다시는 돌아오지 않기를....
---- 그녀의 그림을 누가 초현실주의라 하는가 이보다 더한 생생한 현실이 어디있을까? 평생 소아마비로 시작해서 사고, 32번의 수술, 병과 통증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그녀의 "적나라한 현실"을, 눈물과 피와 고통으로 가득찬 그녀의 현실을 우리는 "초현실"이라 부른다.
공사장 인부가 벗어놓고 갔을 목장갑 한 켤레 상처가 터진 자리 촘촘했던 올이 풀려 그 生은 헐겁다 붉은 손바닥 굳은살처럼 박혀있던 고무도 햇살에 삭아 떨어지고 있는 오후, 터진 구멍 사이로 뭉툭한 손 있던 자리가 보인다 거기 이제 땀으로 찌든 체취만 누워 앓고 있으리라 그래도 장갑 두 손을 포개고서 각목의 거칠게 인 나무 비늘과 출렁이던 철근의 감촉을 기억한다 제 허리 허물어 집 올리던 사람, 모래처럼 흩어지던 날들을 모아 한 장 벽돌 올리던 그 사람 떠올리며 목장갑은 헐거운 생을 부여잡는다 도로변에 버려진 손 한 켤레 있다 내가 손놓았던 뜨거운 生이 거기 상한 손가락으로 나를 가리키고 있다
아이들이 점점 깜직하고 놀라운 글을 쓴다. 아이들이 너무 이쁘다..^^
여기 소개된 시는 모두 넌센스 시짓기이다. 부디 혹시 부모나 어른, 선생이 읽으신다면 맞춤법이 틀렸네, 글씨가 왜 저래, 말이 안되는 이야기네... 등 이상한 말을 하지 말아주시길 바란다.
모두 초등학교 1학년. 많은 글중에 가장 자신이 누군지 드러나지 않는 것만 모았다.
아이들과 [비밀이에요... 글쓰기치료]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누구인지 알아볼 수 있는 단서가 되는 것들은 지웠다.
사실은 마음에 감동이 되거나 찡한 이야기들이 숨어 있다.....
중고등생 10대 보다 아직 '학습된 사고방식'에 길들여지기 전의 아이들이라 너무나 글쓰기를 즐거워한다. 한 번도 빠지지 않고 '선생님 오늘은 글쓰기치료 안 해요? 너무 재미있어요"하는 아이들 때문에 방학도 없이 매주 진행하고 있다. 그래도 몇몇아이들은 자신이 하는 글쓰기, 그림그리기에 대해 '못한다... 못했다..' 등 여전히 어른들의 평가에 길들여져있는 모습을 보여주어서 마음이 안쓰럽다. 겨우 1학년인데...
특강 10개 9월 국제학술대회 사회. KNU학술원발표 애덤스 워크숍 교양교육학회. 대한문학치료학회 발표 댄스테라피협회특강 노인보건센터 간호사 대상 특강 독서치료학회 수퍼비젼 2회 독서치료학회 월례회 영화치료 1회
프로그램활동 : 문예위원회 통합예술치유축제(중등/ 초등) 2주 문예진흥원 노인 문학치료 특별프로그램 10주 (보고서, 사진집, 작품집 만들기) 어린이 글쓰기치료 10회 10대 글쓰기치료 8회
원고: 11개 시로여는 세상 문학치료 원고 시로여는 세상 저널치료 원고 인문총서- 인문학의 가치 새로운 발견 인문치료 수필- 시가 있는 마음풍경 행복이 가득한 집 문학치료 원고 문예위 아르코 웹진 원고 -문학치료 문예위 아르코 웹진 원고 -저널치료 코리아헤럴드 지면 인터뷰 부모를 위한 크리에이티브 저널 번역완성 지성과 창조 논문 한국현대영문학회 논문 어린이 글쓰기치료 원고
* 참가비: 사전등록(12월9일까지) 대학생 25,000원/대학원 및 일반인 30,000원 현장등록(12월12일)대학생 30,000원/대학원 및 일반인 35,000원 (자료집/점심식사/이수증발급비용 포함) * 사전등록방법: 아래 입금계좌로 참가비를 입금한 후, 메일 또는 전화로 이름/소속/주민번호앞자리/연락처를 알려주십시오. 임금계좌: 신한은행 110-284-357720 예금주: 조현춘 *신청마감: 사전등록-2009년 12월 5일(토)/당일등록-2009년 12월 12일(토) 환불은 12월9일 까지 접수받으면 전액환불 가능, 그 이후는 20%공제한 나머지 금액만 본인계좌로 이체가능함. --본 행사의 이수시간은 대한문학치료학회의 자격증 취득을 위한 수련시간(8시간)으로 인정됩니다. *신청 및 문의: 이메일(gkstllwq@naver.com), 010-9516-0668 한효정 간사
+찾아오시는 길 경북대학교 사회과학대학 132호 (정문과 동문에서 가깝습니다.) 교통안내: 시내버스 정문(410, 503, 937, 동구2, 북구2), 북문(300, 305, 323, 410, 좌석706, 719) 동대구역 정문(937) * 자가용은 당일 주차비가 1,000원 입니다. --------------------------------
지난주가 아이의 생일이었다. 작년에는 가을에 잠간 들렀을 때 미역국을 끓여 냉동실에 얼려놓고 왔었는데..생일날 먹을 수 있게... 올해는 카드와 엽서만 부치고 선물도 부치지 못했다. 집에 한 밤중에 들어가니 소포배달을 받을 수 없어서 우체국에 가서 찾아야하는데 그 시간조차 낼 수가 없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어쩌다 시간을 낸다해도 우체국에서 줄을 서서 낭비하는 시간이 너무 미안해서 이젠 소포를 보내는 것도 못하고 있다. ---
아이는 추수감사절에 태어났다. 추수감사절 저녁 친구 집에 가서 칠면조요리를 먹고 집에 돌아온 후, 새벽 3시부터 진통이 시작되었었다. 사실 예정일은 1주일 전이었는데 마침 남편의 시험기간이어서 간절히 기도했었다. 시험에 방해될까봐 부디 시험이 끝나고 출산하게 해달라고. 기도 덕인지 아가는 시험이 끝나는 날, 그리고 땡스기빙 연휴가 시작되는 목요일이 지나고 금요일 새벽에 내게 신호를 보내온 것이다. 하지만 거짓말 같은 무려 27시간의 진통이 계속되었고 아기는 토요일 아침에 태어났다. 아무도 없는 낯선 외국 병원, 춥고 작은 창고 같은 회색빛 대기실, 차갑고 딱딱한 침대에 나는 덩그마니 홀로 남겨졌다. 남편은 어디론가 말없이 사라졌고 (아마 어디가서 자고 있었을거다) 간호사는 어쩌다 한 번씩 들여다보고는 not yet, 한마디 하고 돌아가고 나는 공포에 질려있었다. 수술하지 않아야 했기에. 너무 고통스러웠지만 자연분만을 하고 싶다는 생각보다 수술을 할 경우 가난한 유학생으로 감당할 수 없는 수술비가 걱정되었기 때문이었다. 다행이 아가는 무사히 건강히 태어났다. 수업 사이사이 뛰어와 모유를 먹이고, 이유식도 그 흔한 거버가 아니라 일일이 다 만들어 먹이고, 아이는 엄마가 곁에 있어야 한다며 먼저 한국에 돌아가는 남편에게 아기를 함께 보내지 않았다. 나는 6개월밖에 되지 않은 아기와 단 둘이 남아 석사 과정을 끝내야 했다. 아는 친척, 친지 하나 없는 그 곳에서.... 베이비씨터 비용도 아껴야 했기에 도서관이든 어디든 아이들 데리고 갈 수밖에 없었다. 때로는 수업이 있는 날도 베이비시터를 구하지 못할 때가 있어서 아기를 유모차에 태워 학교에 가기도 했다. 잠을 재워놓고 대학원 세미나실 밖에 둔 채 (참 어쩌면 그렇게 철이 없었는지!! 지금 생각하면 끔직하다.) 수업을 하다 중간에 나와 보니 아기가 사라졌다. 알지도 못하는 중국계 여학생이 위험하다고 데리고 간 것이었다. 어떻게 찾았는지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데리고 갈게 뭐람 교실을 열고 엄마가 어디 있느냐고 물어봐야지.) 난 지금도 그 시절의 어떤 일들이 하얗게 기억나지 않는다. 내가 지워버린 것인지도 모른다.
하루는 침실 밖 거실의 책상에서 공부하는데 방에서 쿵하는 소리가 났다. 놀라 들어가 보니 아가가 안 보였다. 침대와 창 사이의 작은 공간에 굴러 떨어진 것이었다. 나는 밤새 쓰던 레포트를 막 끝내고 있던 중이었다. 놀라서 아이를 끌어안고 (그때까지 꼬박 밤을 새느라 세수도 못한 얼굴로) 레포트를 내러 학교로 뛰어갔었다. 한손에 아가를 안고 한손으로 레포트를 프루프리딩 하면서....(그때 남편은 어디 있었는지 기억이 통 나지 않는다. 아마 학교에서 수업 중이었을 거다. 어쩌면 학교 테니스장에서 친구들과 테니스를 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 당시는 휴대폰이 있던 시절도 개인 피씨가 있던 시절도 아니고 매뉴얼 타자기를 쓰던 시절이었으니까.) 교수에게 소설 레포트를 내러 연구실에 들어가자마자 나는 '아가가 침대 밑으로 떨어졌어요...' 하고 말하며 나도 모르게 그 선생 앞에서 울어버렸던 거 같다. 그 젊은 남자 H교수는 웃으면서 아이들은 항상 침대에서 떨어진다고 걱정 말라고 하면서 나보고 너무 힘들어 보인다고 한국 사람들이 있는 교회를 다녀보라고... 도움을 받아보라고 했던 거 같다. (솔직히 교회 갈 시간조차 없었다. 아니... 그 누군가와 만나서 한마디 잡담할 시간도 없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눈을 감으면 그 순간 잠이 오니까 눈을 뜨고 기도하는 것 그것 뿐이었다. 지금도 나는 눈을 떠야 기도가 잘된다.
아이를 침대에 잠재우고 샤워를 하면 마치 샤워기의 물소리가 아이가 우는 소리 같아서 몇 번이고 물을 잠그고 귀를 기울여봐야 했다. 아기는 잠을 곤히 자고 있었지만.... 그러다가 나중엔 그냥 아가를 유모차에 앉혀서 샤워부스 밖에 세워놓고 샤워를 했다. 아이는 한달에 20일 가량을 늘 열이 나고 아파서 밤새 공부를 하면서 아이를 욕조에 넣었다 뺐다 하면서 열을 내려야 했다. 갈기갈기 찢어지는 엄마의 마음... 나도 어린시절 하도 자주 아파서 날마다 가위 눌리고 열이 떠나지 않아 커다란 사기 대접에 시커먼 한약을 먹다가 토하고 다시 먹던 기억이 있다. 늘 깨어보면 내 몸에 침을 놓고 있었고 그래서 그 한의사 할아버지를 ...놈이라며 욕을 하며 울던 기억이 나는데.. 그 앓으며 컸던 어릴 때는 깨닫지 못하던 것을 아이를 보면서 배웠다. 생명은 앓는 것이라는 것을. 아무리 사랑해도 대신 아파줄 수 없다는 것을. 인간인 내 혼자 힘으로는 아이를 키울 수 없다는 것을. 아니, 나는 내 혼자 힘으로 사랑조차 온전히 할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누군가를 진심으로 사랑하면 깨닫는 그것--나의 사랑은 참으로 무력하다는 것을.
나는 오직 한 가지 마음 밖에 없었다. 어서 석사를 끝내고 집으로 돌아가야 해. 우리 아가를 위해서.... 얼마나 오랜 동안 기다려 30이 넘어 겨우 시작한 공부(유학)이었던가. 하지만 나는 2년 안에 급히 석사를 따고 서둘러 돌아왔다. 그 설움을 (외국박사학위를 따지 못해서 겪는) 여태 겪고 있다. 언젠가 외국박사 2명과 함께 참가했던 마지막 인터뷰에서 했던 말이 생각난다. 나는 그때 그렇게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고. 내 아이도 나의 인생이며 책임이므로. 그 일로 내가 오늘 면접에서 떨어질 것을 알아도 아마 내게 지금 똑같은 선택의 기회가 주어진다면 나는 또 다시 내 꿈을 접고 아이를 위해서 집으로 돌아올 것이라고...
아가는 내 무릎에서 내가 연필을 들면 연필을 뺏고 볼펜을 들면 볼펜을 빼앗았다. 불쌍한 아가. 그 좁은 기숙사 방에서 바로 엄마가 코앞에 보여도 잠을 이루지 못하다가 책상(식탁) 밑에 담요를 깔아주고 누이면 잠이 들곤 했었다. 항상 무릎에 앉힌 채 타이프를 쳐야했다. 옹알이 한번 해주지 못하고 가장 중요한 어린 시절 2살까지 오직 들려준 건 엄마의 옹알이 대화 대신 클래식칼 뮤직 뿐이었다. (옹알이를 해주었으면 지금보다 훨씬 머리가 좋았을 것을 나는 참 아이에게 어려모로 죄인이다.) 그래도 천사 같이 항상 눈만 마주쳐도 웃던 아가. 그 아가를 보면서 난 얼마나 감사기도를 했던지. “겁나게 착하다”는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던 아이. 애교가 어찌 많은지 외할머니의 간을 녹여버린 아이.
가끔 변해버린 내 모습, 옛 모습이 사라진 나의 인상..을 바라볼 때면 아이 생각이 난다.
아이가 한국에 올 때 공항에서 만나면 늘 안쓰럽고 서글퍼진다. 외로움과 싸우고, 공부하느라 지쳐서 투사처럼 강인해 보이는 얼굴에 가슴이 아려온다. 그건 엄마인 나만 느낄 수 있는 변화이다. 그러다 나와 있으면 며칠사이 금방 다시 소녀답고 애교가 넘치는 아이의 모습으로 변한다.
내가 아이의 남편이 될 사람, 나의 사위에게 바라는 것은 하나다. 우리 아이가 가장 “그 아이답게” (아름답게) 살 수 있게 해주는 사람. 내 아이가 가장 아름다운 모습으로 살아가도록 해주는 사람. 아이에게 아이가 아닌 다른 사람이 되기를 요구하지 않는 사람. 그 아이가 세상을 살아가면서 혹시 자신이 아닌 남이 되어 살아가는 순간들이 있더라고 남편 앞에서 만은 안심하고 그 자신으로 돌아올 수 있게 해주는 사람... 그게 가장 큰 행복이므로....
제 워크숍에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여러분을 환영합니다. 아름다운 경험과 배움의 시간 되시길 바랍니다. - 캐슬린 애덤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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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카메라에 담긴 몇 개의 사진을 올려봅니다. 다른 분들이 찍은 사진이 모아지는 대로 또 올리겠습니다. 혹시 여기 있는 사진이 필요하신 분은 말씀해주시면 보내드리겠습니다.
이 사진에는 없지만 한국리쿠르트 이정주 사장님, 인사만 하고 그림자처럼 사라지신 '치유하는 글쓰기'님, 그 외 많은 분야의 선생님들 (경북대, 충남대, 한림의대, 연세대, 서울불교대학원대학교, 동원대, 한북대, 강원대, 교원대, 총신대, 그리고 한국정신건강보건학회의 교수님 등), 독서치료 현장에서 저널치료를 활용하고 계신 분들, 문학치료에 관심이 있는 많은 분들 감사합니다. 일일히 편지드리지 못함을 이해해주시기 바랍니다.
무엇보다 멀리 광주, 부산, 대구, 강원도, 충남에서 오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무엇보다 제게 가장 소중한 분들은 이 사진에는 없을 수 있지만 소리 없이 가슴으로 응답하며 말없이 글을 쓰시고 자신을 대면하는 힘겨운 일을 해주신 이름 없는 분들입니다. 저희는 바로 여러분들을 위해서 여기 있습니다. 케이와 저는 앞으로도 더 좋은 일과 프로그램을 위해 계속 의견을 주고 받으며 연구하고 개발하여 갈 것입니다. 여러분들을 저의 연구소 워크숍에서 다시 뵙기를 기대합니다. 문학과 글쓰기치료에 계속적인 관심과 따뜻한 열정을 가져주시길 바랍니다.
[문학이 나를 치유한다] 문학 치료를 경험한 이들의 이야기 치료는 나로부터 오는 것이었구나
BC 1000년경 고대 그리스의 도시 테베의 도서관 위에는 ‘영혼의 치유 장소(The Healing Place of the Soul)’라는 글이 걸려 있었다고 합니다. 문학이 지닌 치유의 힘은 이미 고대로부터 인정되었던 것입니다. 2차 세계 대전 이후 참전 군인의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치료 요법으로도 문학 치료가 쓰였다고 합니다. 최근에는 ‘감정 표현 글쓰기’가 감정적 문제를 해결해줄 뿐 아니라 면역 체계에도 영향을 미친다는 연구 결과가 나왔습니다. 저널 테라피를 통해 우울증이 호전됐다는 결과가 의학계에 보고되었고, 관절염과 천식 환자들의 증상이 완화됐다는 연구 결과도 의학 전문지에 소개되었습니다. 이렇듯 문학은 우리에게 치유의 힘을 선물합니다. 한 편의 문학 작품을 읽으며 그 안에서 나를 발견하고, 일기 쓰기(치료를 목적으로 한)를 통해 마음의 환부를 찾아내는 일, 시 한 편에서 ‘나’라는 존재의 귀중함을 깨닫는 일, 이것이 문학 치료의 시작입니다. 무엇보다 문학은 나만을 지지해주는 최고의 비밀 상담사요 친구가 될 것입니다.
저널 치료 사례 “나는 혼수 문제에서 시작된 시모와의 갈등으로 9년을 고통받고 있었다. 교수님께서 알려주신 대로 여러 저널 쓰기 기법을 사용해 계속 글을 썼다. 그 과정은 맘속 상처 드러내기, 내 맘 전하기, 관점 바꾸기, 저널 쓰기로 나누었다. 그리고 3개월 후 9년간의 갈등이 거짓말처럼 해결되었다.
문제 해결 방법 1 맘속의 상처 그대로 드러내기(5분 집중 글쓰기) 내 맘속에 숨겨놓았던 일들, 하소연하고 싶어도 누구에게도 속 시원히 못하고 마음속에 끊임없이 써 내려갔던 무거운 책을 들어냈다. 상처를 치유받기 위해 의사 앞에 환부를 드러내 보이듯 말이다. “언어폭력은 시간이 지나도 상처가 회복되지 않는다”는 글쓰기 치료 수업 중의 말이 가슴 깊이 와 닿았다. “쓰는 행위 자체가 의미 있는 일이기에 생각나는 대로 글쓰기를 멈추지 말라”던 교수님의 말씀에 내 맘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처음엔 글쓰기 치료 모임 중에 5분씩 멈추지 않고 글을 쓰기 시작했다. 잠깐이었지만 내 맘을 표출해내는 시도를 할 수 있었다. 그런 글을 썼던 건 처음이었던 것 같다. 그리고 수업 중에 교수님이 권해주신 대로 저널 기법으로 어머니와 내 상황을 재현하며, 대화하던 내용을 아주 재빨리 써 내려갔다. 하지만 자꾸 말문이 막힐 뿐이었다. 글쓰기에서조차 어머니 앞에서 자꾸 주눅이 들어 말도 못 잇고 한없이 작아지는 나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또 ‘인물 묘사’를 통해 내게 고통스러웠던 분을 적나라하게 묘사하며 원 없이 분노를 표출해보고 싶었지만 의지와는 달리 왠지 너무 버릇없이 지껄여대는 내 모습에 불안해져 화장실만 몇 번 다녀오게 되었다. 누가 보는 것도 아닌데 나도 모르게 어머니가 의식되면서 결국 마무리를 짓게 되었다. 이것을 통해 난 타인을 너무 의식하며 살았기에 비밀의 글조차도 원 없이 써 내려갈 수 없는 소극적인 사람이 되어버렸음을 깨달았다. 또한 내 속은 미움과 분노로 가득 차 있어도 다른 사람들 앞에서만큼은 착하고 인내심 많은 순진한 사람으로 인정받길 얼마나 원하는지도 알 수 있었다. 그만큼 남들에게 좋다고 인정받는 완전한 사람이길 절실히 원했던 것이다.
문제 해결 방법 2 ‘보내지 않는 편지’를 통해 내 맘 전하기 ‘보내지 않는 편지’를 어머니께 써보았다. 이 방법은 그래도 맘속에서 수없이 써 내려왔던 방법이기에 잘 써졌다. 억울할 때마다 머릿속에서 줄줄이 써 내려갔던 그 말을 직접 글로 쓰고 나니 맘이 시원했다. 상처받은 말들, 그리고 이해할 수 없었던 언행들에 대해 써 내려갔다. 글 속에서 난 항상 피해자였고 어머니는 그야말로 생각 없이 내뱉는 모든 말 속에 독이 있는 이기적이고 야속한 분이셨다. 나의 얼굴에 미소 대신 어둠이 자리 잡게 만든 악녀였던 것이다. 날 주눅 들게 만들고 한없이 작아지게 만든 분. 어머니 앞에만 서면 잘하던 것도 떨려서 제대로 하지 못하게 만든 분. 내 하소연을 다 쏟아붓고 나니 맘 한쪽에서 ‘그럼 넌 어머니께 어떤 며느린데?’란 생각과 더불어 ‘근데 정말 그런 나쁜 분이셨을까?’ 깊이 생각해보게 되었다. 이 과정을 통해 예전에 미처 깨닫지 못했던 어머니에 대한 편협된 생각과 내 편에서 잘 해주기만을 바랐던 내 자신을 돌아볼 수 있었다. 4주에 걸친 글쓰기에서 W 선생은 털어놓기, 대화하기, 카타르시스 등을 통해 문제를 객관적으로 보는 단계에 이르고 있었다. 이제는 관점을 바꾸어보는 저널 기법이 효과적인 단계가 된 것이다.
문제 해결 방법 3 새로운 관점에서 보기-상대방 입장에서 재해석해보기(내 생각 바꾸기) 어머니 입장에서 바라본 며느리의 모습은 어떠했을까? 어머니는 아들141을 너무 사랑한 나머지 모든 초점이 아들에게 있었기에 내가 보이질 않았던 것이었다. (중략) 어쩜 어머니로서 충분히 하실 수 있는 말씀조차도 내 마음 밭이 좋지 못했기에 다 역겹게 들렸는지도 모른다. 문제는 어머니의 그런 즉흥적인 표현과 거침없이 쏟아부으셨던 폭언들이 도저히 나의 내성적인 성격, 싫어도 감히 싫다고 말 못하고 살아왔던 내 입장에선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었다. 너무도 다른 상대방의 성격을 이해하는 것부터 하나 둘 해나갔다. (중략) 내 생각을 바꿔 어머니 입장에서 바라보며 생각해보니 그때부터 하나 둘 무겁게 엉켜 있던 실타래가 서서히 풀리게 되었다. 그 후로 글쓰기는 더 이상 하지 못했지만 내 머릿속에서는 계속 오해와 상처들이 회복되고 있었다. 눈이 조금씩 뜨이면서 가식이 아닌 진실된 마음으로 어머니를 이해하며 대할 수 있었다. (중략) 그러면서 나도 모르게 어머니를 용서한 것이다. ‘관점 바꾸기’ 글쓰기의 연장이었다. 그리고 놀랍게도 난 9년 동안 가슴 한쪽이 무겁게 짓눌려 아파했던 상처 덩어리가 없어졌음을 깨닫게 되었다. 더 이상 미움도 아픔도 없이 가벼워진 맘을 느낄 수 있었다. 그 후론 어떠한 일에도 어머니로 인해 싸워본 일이 없었다. 서로 진정한 마음이 오가며 시어머니는 내게 딸처럼 생각하고 대하겠다는 다짐까지 내보이셨다. (중략) 일 년이 지난 지금 어머니는 시어머니뿐만 아니라 인생의 선배로서 많은 조언과 믿음을 더해주신다. 서로가 자신이 생각한 그런 사람이 되길 요구했을 때는 상처투성이였지만 한 발자국 뒤에서 서로를 인정하며, 있는 모습 그대로 이해하니 사랑이 느껴졌다. 신기한 건 저널 치료를 배울 때 교수님께 들은 대로 ‘치료는 나로부터’ 오는 것이었다는 사실이다. 어머니의 성격, 언어 습관은 전과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 단지 내가 어머니를 바라보는 생각이 변한 것이다. 내가 달라지니 실타래처럼 엉킨 문제가 해결된 것이다.”_30대 주부 W의 글
시 읽고 모방 시 써보기 “네가 약하다는 것이 마음에 걸린다/ 작은 충격에도 쉬이 깨질 것 같아 불안하다/ 쨍그랑 큰 울음 한번 울고 나면/ 박살난 네 몸 하나하나는/ 끝이 날카로운 무기로 변한다/ 큰 충격에도 끄떡하지 않을 네가 바위라면/ 유리가 되기 전까지 수만 년/ 깊은 땅속에서 잠자던 거대한 바위라면/ 내 마음 얼마나 든든하겠느냐/ 깨진다 한들 변함없이 바위요/ 바스러진다 해도 여전히 모래인 것을/ 그 모래 오랜 세월 썩고 또 썩으면/ 지층 한 무늬를 그리며 튼튼하고 아름다운/ 다시 바위가 되는 것을/ 누가 침을 뱉건 말건 심심하다고 차건 말건/ 아무렇게나 뒹굴러다닐 돌이라도 되었다면/ 내 마음 얼마나 편하겠느냐/ 너는 투명하지만 반들반들 빛이 나지만/ 그건 날카로운 끝을 가리는 보호색일 뿐/ 언제고 깨질 것 같은 너를 보면/ 약하다는 것이 강하다는 것보다 더 두렵다”_‘김기택의 시 ‘유리에게’ 모방 시“네가 강해 보인 척한다는 것이 마음에 걸린다/ 내가 아무리 울고 매달려도 흔들리지 않을 것 같아 불안하다/ “날 내버려 둬”라고 말한 후/ 집을 떠난 너의 뒷모습을 보며/ 다시는 돌아올 것 같지 않아 두려움에 빠진다/ 바위처럼 보이기까지/ 많은 상처를 극복하고 단단해진 굳은살이라면/ 내 마음 얼마나 든든하겠느냐/ 달라진다 해도 또 다른 성장의 모습인 것을/ 그 상처 하나하나 모여 아름다운 다이아몬드 될 것을/ 내가 설명을 부탁할 때/ 너의 답답한 마음을 차분히 표현만 해준다면/ 내 마음 얼마나 편하겠느냐/ 너는 스펀지처럼 온갖 감정을 흡수하지만/ 결국 단단한 바위로 너를 무장할 뿐/ 깨질 것처럼 보이지만 바위로 맞서는 너를 보면/ 강해 보인다는 것보다 강해 보이는 척하는 네가 더 두렵다.” 성찰 평소 F 와 내 관계를 바라봤을 때 유리와 바위 같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가끔 F의 내면 깊은 목소리를 들을 땐 그도 약한 존재고, 나보다 더 많은 상처를 받고 사는 사람 같다. 그렇다면 툭 터놓고 말을 하지 F는 잘 표현하지 않는다. 때론 너무 날카로운 말들을 쏟아낸다. 요즘엔 부부 관계에서 내가 너무 앞서가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상담이니 뭐니 하면서 나는 나름대로 결혼상을 그렸고 F는 아직 구체성이 떨어지는 부분이 있다. 내 이상에 F의 모습을 끼워 넣으려니 그는 불편하다. 그렇다면 그는 왜 자신을 표현치 못하는가? 그가 유리고 내가 바위인가. 우린 서로 평행선을 달리고 있다. 지향은 비슷한데도. 유리와 바위가 지층이 될 때까지 더 많은 환경적 자극이 필요하다. 내가 그의 눈치를 보는 건 우리에겐 시간이 필요한데, 그가 그 환경적 변수를 견뎌내지 못하고 속내를 드러내 유리처럼 깨져버릴 것 같은 거다. 우리의 결혼이 끝을 보게 될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재성찰 이 글을 쓴 후에 교수님이 내게 준 “완벽한 일치를 꿈꾸지 마라. 내가 해결해주려 하지 말고 그 사람이 해결토록 곁에 있어주고 기다려주면 어떻겠느냐”는 도움의 말이 마음에 와 닿았다. 내가 꿈꾸는 것이 완벽한 일치여서 그도 힘들고 나도 힘든 것이 아닌가 싶다. 그도 나도 조금씩 한발 뒤에 가서 살펴보는 자유의 공간을 마련하게 되었다. _30대 직장인 신혼 주부 D의 글 자료 제공 이봉희 교수
*이곳에 실린 글은 모두 본인의 동의를 얻고 그분들이 보내준 내용을 실은 것이며 그 중에서도 사적인 내용은 생략했음을 밝힙니다. 협조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보다 감동적인 치유 사례가 많지만 사적인 내용이라 공개가 불가능합니다.
기자/에디터 : 최혜경・나도연 도움말 이봉희(나사렛대학교 영어학과 교수, 미국 공인 문학 치료・저널 치료 전문가) 그림 이미지 제공 유선태(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