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Chagall- a Bride with a Fan1911

"그녀의 침묵은 나의 침묵이다. 그녀의 눈은 나의 눈이다. 그녀는 마치 오랫동안 나를 알아왔고 나의 유년 시절과 나의 현재, 그리고 나의 미래를 알고 있는 것 같다. 나는 전에 그녀를 한 번도 본 적이 없지만 그녀는 오래 전부터 나를 관찰하고 나의 깊은 속마음을 읽어왔던 것 같다. 나는 이 사람이야말로 내가 바로 '그 여자'-나의 아내-라는 것을 알았다." (샤갈)
샤갈이 22살에 운명적인 연인, 첫번째 아내 벨라를 만났을때 한 말이다.
모든 운명적 만남과 소울 메이트를 만난 사람들의 말에는 공통점이 있다. 마치 오래전부터 알고 있던 것 처럼 느껴지는 낯익음.
당신도 사랑하는 사람을 만났을때 그렇게 느꼈나요? 그 사람은 지금 어디 있나요?
-- 그녀의 갑작스런 죽음(1944)이후 샤갈이 그린 그림. Autour d'Elle(1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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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텅 빈 내 꿈의 뒤란에 시든 잡초 적시며 비는 내린다. 지금은 누구나 가진 것 하나하나 내놓아야 할 때 풍경은 정좌(正座)하고 산은 멀리 물러앉아 우는데 나를 에워싼 적막강산 그저 이렇게 저문다. 살고 싶어라. (이형기)---- 살고 싶어라... 적막강산이 두려워 적막강산이 되라한다. 살고 싶어라....
이번 학기 처음으로 개설된 문학치료의 이해. 55명이나 되는 학생들이 수강을 하게되었다. 부랴부랴 수강신청을 막았는데 너무 늦었다. 교양이므로 45명은 기본적으로 수강신청을 받아야 한단다. 문학치료의 이해가 실습수업이라는 것을 인정해주지 않았다. 당황했지만 최선을 다 한 수업이었다. 중간에 힘들어서 그만 둔 학생도 3명 있었다. 나머지 학생들은 힘든 글쓰기 과정을 정말 참 잘도 해내었다.
대형 수업이었는데도 많은 감사한 일들이 일어났다. 어떻게 일일히 내가 받은 편지들을 다 이야기할 수 있을까.
그 중에 한 학생이 보내온 편지를 올려본다. 방금 받은 편지여서....
이 학생은 처음 보았을 때 정말 어둡고 힘들어보여서 내 가슴이 답답해져왔었다. 어디서부터 도와야 할지.... 그의 아픔과 상처를 이 대형 수업에서 어떻게 도울지.... 참 많이 고민이 되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글쓰기의 힘을 믿었다.
이제는 얼마나 잘 웃는지! 그리고 어둡던 얼굴이 환하게 피어났다. 주변에서 모두 왠일이냐고 한단다. 처음에 들리지도 않는 목소리로 이야기하던 그가 이제는 밝게 또렷하게 높은 톤으로 말한다. 나는 문학과 글쓰기의 힘을 또 다시 확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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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치료의 이해 수업 마지막 글쓰기/문학치료 활동 이후의 후기] KS
한 학기 동안 내게서 많은 것을 캐낸 것 같다.
내가 내 자신이기에 당연히 잘 알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것은 산산히 부숴지고 나를 다시 알아가고 나를 대하는 방법을 처음으로 배웠다.
왜 내가 나에게 물어야 할까? 라고 생각한 적도 있었지만, 할 때 마다 신기했고, 줄줄이 사탕같이 나의 스토리가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참 다행이다. 내 자신이 너무나 아무것도 아니라고 느껴질 때도, 열등감이 심해서 끝없이 어두운 생각 속으로만 파고들게 될 때에도, '나는 사랑받을 수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진리로 깨달은 사람처럼 슬펐을 때에도 이 날이 올 거라곤 생각지 않았다.
자존감이 당장 생긴 것은 아니다. 그러나 나는 사랑할 수 있는 이유와 끈기를 배웠다.
내게 있는 것, 지금의 내 모습과 미래는 더 최고의 모습이 있을 거라는 기대를 멈출 수가 없다.
그러나 칠전팔기도 중요하다.
비판자부모는 내 내면에서 언젠가 또 나를 공격하겠지만, 나는 그 소리가 어디로 부터 온 것인 줄을 이제는 알기에 나를 사랑하는 것을 포기하지 않을 수 있다.
모든 것들이 웃고 있다. 자기연민과 우울함이 이제는 더 이상 달게 느껴지지 않는다.
정말정말정말 다행이다!
교수님!!!!! 한 학기동안 정말 수고 많으셨습니다. 가끔 고통스러운 때도 있었지만 끝에 와보니 산봉우리에서 내려다보는 기분입니다.
교수님께 정말로 감사드립니다. 몸의 병이나 그런 것이 당장 해결된 것도 아니지만, 그런 현상적인 부분이 아닌 가장 중요한 것들을 배웠습니다.
끝없이 버텨오던 삶에서 이제는 매일이 신나고, 즐거움에 취하는 삶이 되었습니다. 정말 감사드립니다.
항상 건강하시고 더 많은 사람들이 문학 치료를 알 수 있도록 기도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KS드림
이런 기쁜 소식을 전해들을 때 가장 귀한 선물을 받는 기쁨을 누린다. 지난 겨울 어떤 모임에서 만났던 분의 편지를 받았다. 코스모스 같았던 분. 매번 글을 쓸 때마다 놀라운 이야기들이 나와서 자신도 당황하면서 눈물을 흘리시던 분. 그 진솔함과 그 아픔에 모두를 같이 아파하고 감동했었다. 회기가 끝나고 헤어지게 되어서 맘에 걸리고 문득문득 생각났었는데....이렇게 좋은 소식을 전해주시니 가장 큰 스승의날 선물이다. 보고싶다...
교수님, 안녕하세요. 지난해 말에 평생학습관에서 수업을 받은 HSL입니다.
글쓰기치료가 무엇인지 모르고 시작해 첫날부터 눈물바람이어서 무척 당황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 때문에 두번째 시간엔 결석을 했었죠. 그런데 그 결석이 무색하게도 거의 매 시간 눈물을 흘렸습니다. 제가 분위기 망치는 게 아닐까 걱정하면서도 어쩔 수가 없었어요. 제가 어설픈 이타주의로 중도 하차하지 않아 다행입니다.
교수님께서 무척 신경써주신 것에 감사해요! ... 맘 속에 쌓아두어 썩어가는 이야기들을 꺼내어 들여다 볼 수 있게 도와주셔서 얼마나 감사한지요. '업은 애기 3년 찾는다'더니, 제가 무슨 생각, 어떤 느낌을 맘에 품고 있는지 잘 몰랐어요. 감추었던 감정이나 생각들이 떠오르고 제멋대로 튀어 나와서 깜짝 놀라고, 때로는 며칠을 머리가 깨질 듯 아파 앓을 정도로 결코 쉬운 과정은 아니었지만 마칠 때는 오히려, 회기가 너무나도 짧게 느껴지고 무척 아쉬웠습니다.
의지할 곳, 기댈 곳을 찾으면서 정작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 보는 수고는 미처 못해 왔는데. 이제는 때때로 글을 쓰면서 스스로 저를 들여다보고 맘이 해주는 말을 귀기울여 듣겠다는 마음가집으로 지냅니다. 수업을 받고 올해는 그야말로 제 일생을 통털어 가장 많이 자주 일기를 쓴거 같아요. 아직도 후기는 어려운데 그런대로 그냥 썼어요. 간혹 맘이 심하게 출렁러려 힘들 때도 있지만 시간이 갈수록 제가 진짜 저다워진다고 느껴져 기뻐요.
제가 유령처럼 거의 흔적을 남기지 않고 조용히 오갔지만 오늘은 꼭 교수님께서 사랑과 인내로 하시는 이 글쓰기치료나 그 바탕의 따스한 인간애가 얼마나 귀하고 감사한지 전하고 싶어 용기를 내봅니다. 제가 만난 참 좋은 선생님, 늘 건강하시길 바랍니다.
------------- 너무 바빠서 지난 몇 년간 이곳에 모임의 보고서를 쓰지 못했다. 오늘 19차 문학치료 마지막이었다. 이번 학기에 있었던 문학치료모임이나 특강 중에 있었던 수 많은 감사한 사연들 중 하나만 간단히 적어본다.
글쓰기문학치료모임에 참여하신 분들의 변화에 늘 놀라지만 어떤 강의에서 만났던 한 분이 18차부터 함께 하셨다. 그 분은 평생 처음으로 '행복'이라는 단어를 알게 되었다고 하신다. 그 분의 변화는 정말 놀랍다. 그 많은 말들을 어떻게 오랜세월 가슴에 묻어둔 채 사셨을까? 그래서 그렇게 늘 아프셨을까? 늘 이름모를 분노에 자신을 내어줄 수 밖에 없으셨을까? 요즘은 키보드에서 손이 발레들 하듯, 살아 춤을 추듯 글을 쓰신다고 한다. 하루 종일 너무나 하고픈 말이 많아서 글 쓸 곳을 찾아 다니신다고 하신다. 지난 회기때만해도 글을 못쓰겠다고 불편하고 부담스러워하셨었다. 왜 이 모임에 와야하는지 때로 모르겠다면서 화도 내시고 회의도 느끼시던 분인데 그래도 19차에도 계속 참여하시기를 권했었다. 그리고 거짓말처럼 어느날 부터 변화를 보이시더니 이제는 너무 행복하다고 하신다. 오늘은 또 말씀하시기를 이제는 그동안 피해자처럼 당하기만 하던 직장에서도 전에는 보이지 않던 타인의 숨은 의도가 보이고 상황을 판단하는 지혜의 눈이 생긴 것이, 그래서 자신을 방어할 수 있고 전과 달리 대처할 수 있는 것이 신기하고 놀랍다고 하신다. 문학과 글쓰기의 힘을 다시 한번 확인하고 있다.
이번학기에 개설하게 된 문학치료의 이해 시간에는 55명이 넘는 학생들이 선택을 하였다. 더 많은 신청자가 있었지만 더 이상은 받을 수가 없었다. 첫시간 수업목표와 내용을 설명하고 정말 듣고 싶은 사람, 들어야 하는 사람만 선택해서 대기 중인 다른 학생에게 양보하라고 부탁했는데 전원 그냥 남아서 고민을 참 많이 했다. (그렇게 많은 아이들이 스스로 자신을 알고 싶고, 상처나 문제를 해결받고 싶다는 것이다!!!) 대형 수업이라 일일히 한 사람 한 사람 facilitate해주지 못하는게 안타깝다. 그런데도 좋은 결과들이 나오는 것을 보면서 또 다시 글쓰기의 힘을 느낀다. 한 학생은 정말 염려가 되었다. 어린시절부터 트라우마가 너무 심해서였다. 그런데 지난 주 나와의 대화중에 말했다. 선생님 정말 신기해요. 그 사건이 더 이상 절 고통스럽게 하지 않을 뿐 아니라 제가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졌어요. 무척 긍정적으로 변했어요. 예전에 이런 건 상상도 못했어요라고 한다. 가장 많은 수(약 70%)의 학생들이 고통스런 사건으로부터 더이상 영향을 받지 않는다고 했고, 그외의 가장 많은 변화는 대인관계가 좋아졌다, (공부에) 집중이 잘된다, 전보다 자주 웃는다.. 등이었다. 몸의 통증이 사라졌다는 보고도 소수 있었다.
그 학생들을 다 보살필 수 없어서 과외처럼 주중에 2시간씩 따로 동아리를 만들어 소수 그룹모임을 가지고 있다. 내 몸이 감당하기가 사실 참 벅차다. 하지만 안타까우니까.... 눈에 보이는데.... 도와주지 않을 수가 없다.
수업 중의 또 한 학생은 오늘 문학치료 모임에 왔다. 그 학생은 첫시간 내가 대화를 해주었을 때부터 참 많이 울었었는데 2주전 수업시간에 내면아이를 대면하고 내가 개별적으로 f/c를 채주면서 이 모임에 오기를 청했다...(여기서 다 말할 수 없는게 안타깝다.).... 그런데 수업 중 그 프로그램을 통한 글쓰기/문학상담만으로도 눈에 띄게 달라졌다. 그 다음 주 '제 글이 밝아지고 기쁨과 행복을 느끼는 게 신기해요' 라고 말했다. 오늘도 모임에서 가장 어린 그가 '나도 절망이 뭔지 알아요. 그리고 희망이라는 단어도 얼마나 무서운 말인지... 절대 쉬운 말이 아니라는 걸 알아요..... 절망을 많이 디뎌보면 행복도 더 가까이 느낄 수 있어요."라면서 다른 어른 참여자들을 깜짝 놀라게 하기도 했다. 다른 참여자들은 학생일 때 이런 모임에 오게 된 그를 너무나 축하(?)해주면서 샘이난다고 해서 한바탕 웃었다.
19차가 끝나는 오늘은 오전시간엔 가슴 아픈 이야기도 있어서 눈물도 흘리시고 또 서로 아파했지만 오후세션에서는 내 안의 목소리를 맘껏 자유롭게 터뜨리는 프로그램으로 모두들 맘껏 웃으면서 마쳤다. 시간이 끝났는데도 모두들 아쉬워하셔서 오늘도 또 시간을 연장해서 함께 시를 하나 더 나누고 글을 쓰고 헤어졌다. 모두들 행복했다는 말씀에 나도 참 행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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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는 운명 같은 건 없다 있는 건 오로지 새날 풋기운!
(정현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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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겨울 8월에 선물로 받은 난의 꽃이 다 지고 말라버렸다. 그리고 봄이 오도록 그 난의 말라버린 꽃들이 실낱 같이 가는 꽃줄기에 매달려 아직도 떠나지 않고 있다. 바스러질 것 같은 저 꽃은 무슨 힘으로 아직도 견디고 있는가 시든 채 겨울이 다가도록 몇달이고 매달려 있는 저 꽃을 꽃이라고 부를 수 있는가 아니면 꽃이 아니라 불러야하는가? 일부러 손으로 떼어버려주어야 하는가? 매달려 있는 것이 힘겨워 누군가 --인간의 손이--차라리 떼어주기를 기다릴까? 아니면 줄기마저 다 말라버리기까지 아직도 그 공급하는 수액에서 작은 생명을 나눠마시며 저렇게 동반자로 매달려있는 것일까? 떠나기 싫다고 같이 있고 싶다고? 대체 생명이란 어디까지인가? 마른 생명... 나는 왜 저 이미 시들어 버린 위태로운 꽃들을 겨울이 다가고 봄이 오도록 볕 잘드는 창 앞에 열심히 놓아두는가 그래, 부디 마지막까지 살아있으라. 그 손을 놓지 말아라 시들어도 꽃은 여전히 꽃이다 시들어서도 너는 여전히 아름다운 꽃이다. --- 숨을 쉬는 한 다 알고 있다 다 들을 수 있다 다만 눈감고 있다.
조금씩 지쳐서 결국 안녕, 들리지도 않을 말 바스락 입술만 떨고
말라가는 정에 매달렸던 뼈마른 가지 손 놓으며 떠나는 거다.
[예전 공개된 홈페이지에서 가져온 공개된 글]- 제자와의 대화
*이 글은 한 제자가 공개글로 쓴 것이며 동의에 의해 실었음.
난 회사에 묻어 있다. 오물처럼
내가 일하고 있는 부서는 총무부 라는 곳이다. 영어로는 General Administraion Dept. 총무부는 회사 살림을 하는 곳이다. 집살림과 마찬가지로 눈에 띄는 일은 아니지만, 분명히 사람의 손길이 필요한 일이다. 눈에 띄지 않는 작은 일들이 모여 회사를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가는 과정은 큰 즐거움이다.
회사는 단지 사장과 Executive member들이 운영하는 것이 아니다. 너무나 당연한 일이지만, 아침에 우편물이 발송 또는 배달되고, 신문이 배달되고, 서류들이 도착하고, 전화가, 컴퓨터 네트웍 프로그램이 정상적으로 돌아가야 하고, 전기가 들어와야 한다.
우편물이 배달되는 건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전화가 되는 건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런 것들이 정상적으로 되기 위해선 365일 휴가 한 번 제대로 못가고,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적은 월급과 훨씬 안 좋은 근무 환경에서 성실히 일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월요일날 직원들이 회사에 출근했을 때 전화가 정상적으로 가동되게 하기 위하여, 담당 직원과 업체 사람들은 새벽까지, 주말도 반납하며, 성실하게 기계처럼 일을 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될까?
정상적으로 돌아가야 하는 것이 당연하기 때문에 총무부 일은 잘하면 본전, 못하면 욕 한바가지라고 한다.
회사가 실적 위주와 성과 위주로 그 직원의 능력을 평가하는 인사고과 프로그램을 진행할 때 난 정말 난감하다. 내 일은 내세울 것이 없기 때문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작은 일들의 연속이기 때문이다. 실적으로 혁혁한 뭔가를 이루어 낼 수 있는 성격의 일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날 힘들게 하는 건 상사와 소통이 안 된다는 거다. 내 부서에 대한 나의 태도와 내 생각을 말을 하지만, 전혀 알아듣지를 못하신다. 내 말을 알아 듣는 능력이 아예 결여되어 있는 분 같다. 내가 그렇게 어렵게 말을 했나? 내 친구들은 내 얘기들을 잘 알아 듣는데… 정말 신기한 경험들이다. 같은 공간에서 대화를 나누는데, 나 혼자 아득한 딴 세상에 있는 것 같은 외로움과 창피함, 수치심, 부끄러움이 뒤섞여 이상한 나라에 온 것 같은 경험이다.
요즘 회사 생활을 하면서 그런 현상을 자주 겪는다. 나의 일하는 스타일이 고집스럽게 미련해 보이지만, 그렇게 밖에는 할 수가 없고, 그렇게 해야 직성이 풀리는 나 때문에 절망스럽다.
자기가 필요할 때만 선량한 웃음을 지으며, 이용만 하려는 야박한 사람들. 알고보면 다 도둑들. 더 큰 도둑이 될려고 출세하려는 사람들. 무례하고, 이기적인 사람들.
이용 당해줄려고 마음 먹었는데, 결국 내 실력은 뽀록이 난다. 난 실은 그걸 감당할 실력이 없기 때문이다.
난 오늘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채, 어정쩡하게 하루를 보내고 있다. 그냥 회사에 묻어 있다. 오물처럼.
내가 절망하고 있을 때 누군가가 위로를 해준다고 한 말.“그래도 암선고 받고 한 달밖에 못사는 사람들도 있어. 네 처지가 그 사람들 보다는 낫잖아?” 정말 어이가 없다. 그래도 목숨 부지하고 살아 있는게 나은 거라니… 그게 나를 위로한다고 하는 말이라니… 웃음밖에는 나오지 않는다. ======
RE: 아, 얼마나 사무치게 고독한 일인데... 그 무리들 속에서 혼자 표정 관리하고 있는게. 심장이 멎는 일이지. 그 무리들이 그런 나의 연약함을 짐승 같은 본능으로 냄새맡고 덤비면 안되니까 들키지 않으려고 숨을 죽여 울어야 하지.
살면서 너무 자주 그런 걸 느껴. 사람들은 너무나 당당하게 뻔뻔스럽게 이기적이라는 걸. 눈에 불을 켜고 자신에게 유익한 일을 위해 덤벼든다는 걸. 오직 자신이 누구인지 그걸 드러내기 위해 24시간 호흡하는 것 같다는 생각. 그걸 어린 학생들에게서도 종종 본단다. .
모두가 비겁한 벙어리가 되어야만 가장 평화롭다는 생각이 서글프다.
세상은 갈 수록 사막이 되어가고 있다는 생각이다. 그 곳에서 모두는 그저 눈에 불을 켠 맹수들로 변하고 있어. 너무 서글픈일이야. 기가 죽어서 살고싶지조차 않단다. 고독이 사무칠 지경이란다. === RE:RE:
선생님, 세상이 점점 낯설어요. 전 마치 트루먼쇼에 나오는 주인공 같아요. 저만 철없이 아무것도 모르고 있는 것 같아요.
근데요, 정말 놀라운 것은 그 사람들이 정말 똑똑한 사람들이라는 거예요. 학교도 저보다 더 좋은 곳을 나왔구요, 학위도 높고, 외국에서도 공부했고, 저보다 좋은 경험들을 많이 한 사람들이예요,
정말 미치겠는 것은 이런 사람들이 최소한 상식적이지도 못하다는 거예요. 인격적인건 바라지도 않아요. 그 좋은 머리와 많은 공부, 경험이 대체 뭐였나 싶어요.
최소한의 상식과 예의조차 갖추지 않은 이기적이고 무례한 그리고, 도둑의 대가들. 그들의 욕심은 정말 끝이 없어요. 무슨 끝없이 먹어 치우는 괴물같아요. 전혀 소통을 할 수 없는 똑똑하고 잘난 괴물들이예요.
그 괴물들이 돈과 지위 앞에서 얼마나 추하게, 얼마나 쉽게 자신의 인격과 인간됨을 가차없이 버려버리는지... 실은 그 모습을 보지 말았어야 했어요.
그들 편에 서볼려고 한때는 분발한 적도 있었어요. 하지만, 바로 뽀록이 났어요. 너무 어설퍼서. 결정적으로 제가 그들 앞에서 너무 기가 죽어서 연습한대로 하나도 못했어요. 쩔쩔매다가 나왔어요. 그들한테는 사람을 그 앞에서 꼼짝 못하게 하는 기술까지 갖고 있더라구요.
선생님, 그들과 소통도 안돼지만, 전 아직 견딜 실력도 없어요. 가끔은 그들한테 붙어서 부스러기라도 두둑히 챙기는 사람들을 부러워하고 있어요.
====== RE:RE:RE: 아, 그렇게 말하는 그 맘 알아. 나도 그런 생각 수도 없이 오간단다. 옳고 그름의 기준이 사라진 세상에 나만 표류하고 있다는 생각에 너무 외로워서.
네가 당하는 일들이 버거워서라기 보다는 외로워서 더 견디기 힘든 거야. 아무도 너와 같은 생각을 가진 동료가 없으니까. 사람들은 혼자이지 않기 위해, 외톨이가 되는 두려움에 가장 비참해지거나 비굴해지지.
힘내. 넌 혼자가 아니야. 그리고 그 사람들을 멀리서 떨어져서 바라 봐. 그들도 속에는 모두 두려움을 숨기고 있단다. 어쩌면 정말 바보들이야. 눈을 감고 사는... 그런 줄도 모르고 내일이면 사라질 안개를 움켜쥐려 일생 자신을 파는 사람들. 그것을 행복이라고 속고 사는 사람들. 그냥 한 발 멀리서 바라 봐. 네가 속한 곳은 여기가 아니야. 힘내. 네 곁에 있는 수많은 보이지 않는 친구들을 봐..
[ 우리의 특권, 우리의 긍지 ]
졸면서졸면서 한참을 썼는데 컴이 갑자기 움직이질 않아서 다 날렸네.
어제 밤 네 글에 답을 쓰고부터 갑자기 인터넷이 안되어서 이제야 고쳤어. 참 말성이야.-말썽 ( 난 새끼 손가락이 힘이 없어서 늘 쉬프트 누르는 글자는 두번 쳐야해. )
Y아, 네 말 한마디 한마디 너무나 공감해. 네가 처한 상황이 유리창밖에서 보듯 환히 보여... 너무 맘이 아프다... 너무 아파.. 너희들은 세상에서 잘 적응하고 살 줄 알았는데. 너희들은 나처럼 되지 않기를 그렇게 원했는데.
네 글 읽고 난 후 요즘 또 다시 읽는 [나의 라임오렌지 나무]에서 뽀르뚜가의 죽음 부분을 읽다가 엉엉 소리내어 한참을 울었단다.
Y아 넌 혼자가 아니야. 많은 말을 썼었는데 다 지워져서 그대로 다시 쓸수가 없네.
그들의 그런 행동은 지극 당연한 거야. 그게 인간의 적나라한 모습이야. 슬픈 일이지만...
그리고 우리는 절대 그들의 방법으로 그들을 이길 수 없어.
그런데 그게 우리의 긍지요 특권이라면 이해할 수 있겠니? 조용히 패배하는 것. 이 세상의 법칙과 이 세상의 가치, 이 세상의 잣대로는 우리의 정당성과 우리의 옳음과 우리의 억울함을 인정받을 곳이 없어. 우리의 정당함을 판결해줄 법정은 이세상엔 없어. 그래서 늘 그 싸움에서 지고 고통의 형을 사는 거야. 추방되고 낙인찍히고. 무고히 무고히. 그저 혼자 조용히 존재할 자유조차도 보장받을 수도 없지. 그게 순교야. 그게 바울이 말한 "날마다 죽노라"라는 의미야.
날마다 날마다 내가 세상에서 없는 자처럼, 수치를 당하고 부당하게 비정상적인 사람으로 취급당하고 소리나지 않는 총을 등 뒤에서 맞고 피투성이가 되어 사는 거. 그게 날마다 죽는 거야. 우리를 "미말에 둔 자 같이 하셨다"고 하잖아. 미말이란 사형장에 끝려가는 걸 말해. (투기장에서 맨 마지막..) 자기들은 소리나지 않는 총과 칼로 나를 난도질하고도 내가 한번 정당방위로 총을 쏘면 당장 체포당하지. 감히 소리내면서 총질이냐고... 그리고 유배당하는 거야.
그래도 난 믿는단다. 그래도 난 믿어... 그래도 내가 통곡하고 울어도 끝까지 다시 일어서는 이유는, 당당한 이유는, 내가 비록 육신은 세상에 속해 있어 두려움을 느낄지라도 (바울처럼, 다윗처럼) 결론은 "내가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날지라도 해를 두려워 않음은 -- I fear not evil--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심이라..."고 굳게 믿기 때문이야.
주님은 우리 곁에 계서. 잊지마. 넌 혼자가 아니야. 그리고 그들 앞에 나아갈때 늘 기도로 무장을 해. 다윗의 말을 봐. 그가 사망의 골짜기에서 두려워하는 것은 "해받는" 거야. 우리가 생각하는 남들이 해꼬지하는 해- 가 아니라 EVIL, 즉 내 영혼을 타락시키는 악을 두려워한다는 거지. (우리 수업 중에 오셀로 공부하면서 했던 말 기억나? 진정 비극은 무엇인지.)
얼마나 차원이 다른 기도요 고백이니. 세상에는 우리가 진정 바라봐야 할 멋진 사람들이, 멋진 믿음의 선배들이 여기 저기 숨어 있어. 내가 바알에게 무릎꿇지 아니한 70명을(400명인가??) 두었노라 고 하시잖아. 우리 시시한 사람들 바라보지 말고 저 높은 곳을 보자. 저 넓은 곳을 보자. 아무리 못 견딘다 해도 생은 꿈같이 지나간단다.
아직 다 안썼어. 또 쓸게.
우선 시 하나 보낸다. 오래전에 누구에게 보낸 시인데 그걸 전도사님이 방에 붙여 놓고 있더라구 해서 용기내서 올려본다.
다시 또 쓸게... 힘내. 네 곁에 주님이 부리시는 천군천사가 있어. 그리고 이기고 지고 그런 거 하지마. 우린 그들이 모르는 양식이 있자나. 세상을 두려워하지마...
야고보서와 로마서 앞부분을 읽어봐. 하늘로서 온 지혜와 땅에서 난 지혜의 차이가 무엇인지. 사람들의 행동이 어쩌면 그렇게 자세히 정확히 적혀있는지. 시기, 질투, 당파지어 남을 거부하기, 자기 사랑, 거짓말, 뒤에서 수근거림.... 너무나 구체적으로 나와있지? 그게 인간의 모습이야. 우리도 옛사람은 그런 사람이었어. 그러니 놀라지 마. 두려워 마. 알았지?
얼마나 인간의 속성이 악하면 10계명에서 거짓 증거하지 말라고 하셨겠니. 거짓을 '밥먹듯' 먹으며 양식으로 삼고 사는 사람들... 그게 인간의 타고난 모습이야.
네 생각만 하면 왜 이리 가슴에 마구 분노와 안타까움과 설움이 몰려오는지. 그렇게 똑똑하고 시원시원한 네가. 깔끔하고 깨끗한 성격의 네가 힘든 거 맘이 너무 아프다. 겉만 강하고 "아무치도 않아요 괜찮아요" 하면서 속으론 위경련이 나도록 두려워하고 위축되고 외로워하는 널 알고 있어. 내가 알 때 주님이 모르실 리 없잖아.
왜 우리에게 고난이 닥치는지 나도 모른단다.
얼마전에 E와 백화점 갔다가 갑자기 "잠간 어디가서 쉬자... "하더라구. 내가 금방 알았지. "너 울고 싶구나.." 했더니 끄덕이며 눈물이 그렁그렁하는 거야. 화장실에서 한참 울면서 그애가 말했어. "고난은 그냥 고난일 뿐이야. 무슨 의미가 있어. 이렇게 망가진걸. 그 고통 때문에 이렇게 불쑥 불쑥 병을 앓고 있는 걸... "
나도 말했어. 그럼. 고난은 그냥 고통일 뿐이야. 뜻이고 뭐고 몰라... 그냥 운명처럼 운이 없어서 걸리는 거야. 그리고 운명을 받아들이듯이 그냥 그걸 받아들이는 수 밖에 없어.
그애의 그 천사같이 예쁘던 옛날 얼굴이 점점 어두운 그늘로 덮여가는 것을 보면서 얼마나 가슴이 미어지게 아프든지..
나도 모른단다. 세상은 왜 이리 엉망진창 진흙탕같은지. 왜 그속에서도 어떤 사람들은 여전히 꽃을 피우려고 이렇게 아파해야하는지. 다만 세상은 어둠이기에 주님께서우리에게 빛이 되라 하셨지. 세상이 얼마나 악하면 예수님을 못박겠니?
역사상 가장 억울하신 분은, 가장 고독하신 분, 그분을 생각하면서 그분의 약속을 믿고 그 비밀을 배우며 살자. "네가 세상에서는 환란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힘내. 힘내. 넌 혼자가 아니야., -----------------------------------------
"[이 정원의 그림이] 현실과는 다르게 보일수도 있겠지. 하지만 내게는 이 그림이 내가 느끼는 시적인 정원의 모습과 스타일을 전달해주고 있다. 네가 이걸 이해할 지 모르지만, 색깔을 잘 배열하기만 해도 시를 말할 수 있다. 마치 음악으로 위로의 말을 하듯이.........그림 속에서 이 정원의 풍경과 인물들을 마치 꿈속에서 보듯이, 현실보다 더 신기하게 나타내주는 거지. "-고흐의 편지 11/12/1888 아를르 ---
Memory of the Garden at Etten (Ladies of Arles) (State Hermitage Museum/here only for therapeutic and/or educational purposes)
이 그림은 1888년 11월 반 고흐가 아를르에서 그린 그림이다. 그가 고갱과 함게 살고 있었던 때 그린 그림으로 다른 화가들과 친구가 되고 싶었던 열망들이 좌절되고 고갱과의 관계에서도 상처를 입던 시기이다. 그런 그의 좌절과 고통이 이 그림속의 색갈로 나타나고 있다. 프로방스는 홀랜드 고향을 생각나게 했고 그는 불안한 노란색, 녹색, 푸른색에 붉은 색을 여기저기 섞어 그의 그리움과 좌절과 고통을 "시"로 표현했다. 캔버스 표면, 그림의 질감은 두껍고 직접 물감을 짜 넣음으로써 고흐의 긴장과 절박한 심정을 드러내준다.
Chagall- Me & the Village/ The Dance (used here for therapeutic/educational purpose only)

사물은 우리들의 시선을 대하여 저의 시선으로 응답한다. 사물은 우리가 그것을 무심한 눈으로 보기 때문에 무심하게 보인다. 그러나 맑은 눈에는 모든 것이 거울이다. 솔직하고 진지한 눈길에는 모든것이 깊이를 가지고 있다. (바슐라르) ------------------------------------------ Chagall:
"석판화를 찍는 놀이나 동판을 손에 들고 있으면 나는 마치 부적을 만지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이 돌이나 동판에다 나는 나의 슬픔이나 기쁨의 모든 것을 내 맡길 수 있다고 생각했다. 기나긴 세월동안 나의 인생을 스치고 지나간 모든 것--탄생, 죽음, 결혼, 꽃, 동물, 새, 가난한 노동자, 부모, 밤의 연인들, 성서 속의 예언자들, 길 가, 집안, 성당, 하늘, 그리고 세월의 흐름 속에서 우리들의 인생의 내부와 주위에서 일어난 슬픈 사연을....[석판화] 1권 중
"나는 자주 이런 말을 들었다. '샤갈 자네는 실체적이 아냐'. 그리고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실체가 어떤 것인가를 이해하기 위해서 자네도 비실체적으로 되어버리는 것이 좋을 걸세'.
"아무 말도 없다. 나의 몸 속에 숨어 있는 모든 것이 움직여 날뛰며, 너에 대한 기억과 같이 방황한다. 너의 창백하고 가느란 손, 말라빠진 너의 뼈가 나의 목을 힘껏 조인다. 누구에게 기도드려야 할까?" Chagall, Monumental Week에서
현대는 감동이 솔직하게 눈물이 되지 않고 단지 아무 개성도 없는 미소가 우리들 눈앞에 커튼같이 드리우고 있는 그러한 슬픈 시대입니다. 바로 그런 이유로 나는 ............예술에 대한 나의 꿈, 이 세상의 인생과 이 세상 아닌 곳의 인생, 존재했던 것과 존재하지 않았던 것에 대한 나의 꿈을 여러분에게 털어놓고 싶은 것입니다. (1963년 일본 샤걀전에서 작가의 메시지)
"내 눈에는 예술이란 무엇보다도 먼저 어떤 영혼의 상태라고 여겨진다" (샤갈) ***********************
(낡은 샤갈의 화집 뒤에서 발견한 나의 빛바랜 메모들이다. 까마득한 그 시절... 내가 그리던 이 나이의 나의 모습은 어떤 것이었을까? -bhlee- ) *************************
자유로와진 이미지와 이미지의 원천들이 마음것 펼쳐지는 모습을 그 어느누구보다도 잘 보여줄 수 있는 사람은 아마도 샤갈(Chagall)일 것이다.
그는 후일 자신의 언어로 사용될 수 있는 이미지들을, 어린 시절동안 자신의 존재 속에 분간할 수 없을 만큼 깊이 뿌리내린 이미지들을 외부세계 속에서 취하여 간직한다. 그 이미지들은 아직 두꺼운 껍질이 생겨나지도 않은 채, 그토록 유연한 어린시절의 영혼으로서는 결코 잊을 수 없는 저 감미로운 상처들과 만났을 때 그의 내부로부터 들어온 것이다. 아주 일찍 그는 자기가 기구하는 소원들이 그 이미지들은 통하여 이루어 지리라는 것을 예감했었다. 그러나 그 때는 그 기도가 예술가의 기도라는 것 조차 알지 못하고 있었다.
"나는 거리를 헤매고 돌아다니면서 찾고 기도했다. 하나님, 구름들 속에, 신기료 장수의 집 뒤에 숨어있는 하나님, 내 영혼이 나타나게 해주세요. 아직 말을 더듬는 어린아이의 고통스런 영혼아, 나에게 길을 가르쳐다오. 나는 다른 사람들 처럼 되고 싶지 않다. 나는 새로운 세계를 보고 싶다."
도시는 그 기도에 대한 대답처럼 낯선 얼굴로 나타나는 것 같았다. 모든 주민들이 그들의 평소의 자리를 떠나서 땅위로 떠서 걷기 시작한다. 낯익은 인물들이 지붕위로 올라가 자리를 잡고 그곳에서 휴식한다...
초년기 궁금중 많은 눈이 포착한 그 일상의 이미지들, 시각적, 감정적 언어들을 샤갈을 그 본래의 환경에서 꺼내 새로운 환경, 즉 그의 영혼 속에 집어 넣는다. ... 즉 중력의 소멸이다. 새로운 별 속으로 자리를 옮긴 이미지들은 더 이상 중력을 느낄수 없게 된다. 그들의 존재이유처럼 여겨졌던 물질성으로 부터 마침내 해방되고 주관적이고 비밀스러운 그들의 의미에로 환원된 와관들은 오직 감각적인 자력에만 복종할 뿐이다. 그것들은 소옹돌이치고, 서로 잡아 당기고, 헤어지고, 공중에 뜨고, 혼연일체가 되고, 뒤집힌다. .....
거꾸로 서기 일쑤인 그의 인물들 처럼 가시적인 세계도 샤갈의 내부에서 뒤집혀 넘어지고 심연속으로 미끌어져 들어간다. ... (르네 위그/ 예술과 영혼 중에서)
왜 고래를 춤추게 해야하나 -칭찬에 대한 불만
항상 새로운 아이디어와 작품을 만들어 내야 하는 부담감에 시달리는 아이. 몇 년 전 포트폴리오를 준비하던 때, 아이가 말했다. "엄마, 가끔 사람들의 기대와 칭찬이 나를 불편하게 해. 내가 정말 얼마나 힘들게 그 일을 이루어냈는지 사람들은 모르는 거 같아. 그리고 언제나 당연히 그렇게 되리라고 기대하는 게 나를 너무 힘들게 해. 나를 믿는다고 나를 인정해주는 거겠지만 내게는 그 고통스런 과정을 또 겪어야 한다는 것도 그러다가 실패하면 그 사람들이 실망하면 어쩌나 하는 것도 너무 힘들어."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고? 나는 이 말이 처음부터 맘에 들지 않았다. 지금은 실종된 일기장에 썼던 기억이 난다. 고래가 춤추기 위해 얼마나 고통스런 훈련을 거쳐야하는가... 고래는 춤추기 위해 태어난 존재가 아니지 않은가? 고래가 춤을 출 정도로 칭찬은 못할일 없게 만든다는건 아주 묘한 잔인한 뉘앙스를 품고 있다고 여겨졌다. 아마 나도 우리 아이와 같은 기분을 느꼈기 때문일까? 넌 강해, 넌 뭐든 잘해, 대단해... 한 없이 위축되는 나에게 친구들은 늘 말했다. 넌 혼자서도 잘 하잖아. 누가 뭐래도 흔들림 없이.. 심지어 선배들도 말했다. 천하의 이봉희가... 그 말때문에 나는 힘들어도 힘든다고 말 할 수도 없었고 누군가에게 도움을 청하고 의지하는 법을 언젠가부터 접고 살았는지도 모른다.
나는 동물의 쇼를 별로 안 좋아한다. 여행지마다 새, 강아지들의 애교 뿐 아니라 고래, 심지어 코끼리가 까치발로 선다든가, 사자를 길들이고 곰들이 쇼를 하는 것을 보는 게 나는 한번도 유쾌한 적이 없었다. 길들인다는 자체가 나를 불편하게 하기 때문이다. 특히 일본 후쿠오카 여행에서 높은 돌 산에 갇혀서 길들여지고 있는 곰들을 바라보면서 위장이 거북했다. 할머니들처럼 까마득한 산 위, 바위 우리에 갇혀 관광객이 던져주는 음식을 받기 위해 재롱부리는 그들... 동물을 길들이기 위해 조련사가 하는 일은 물론 사랑도 있겠지만 첫째, 배가 부르게 주어서는 안되고 늘 조금씩 갈증나게 허기를 채워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배부른 동물은 길들일 수가 없다. 손가락만한 한마리 물고기를 선물로 받기 위해 재주부리는 돌고래의 춤이 칭찬 때문이라고? 대체 인간들은 왜 그런 것을 보고 즐거울까? 나의 아이들도 그렇게 길들이고 싶은 것일까? 설마....
이야기가 이상한 대로 흘렀다. 고래를 춤추게 한다는 것을 칭찬의 기적에 비유한 자체가 거부감을 주어서이다.
그런데 칭찬의 역효과에 대한 문제제기가 나왔다. 너무 반갑다.
칭찬은 상대에게 엄청난 부담이 된다. 그 기대에 못미치면 상대가 아, 이제보니 너 별것 아니구나. 내가 잘못 봤구나. 그런 생각을 하면 어쩌나 심리적으로 엄청난 부담을 가지고 어떤 수를 써서라도 (심지어 부정행위를 통해서라도) 그 사람을 실망시키지 않으려고 하게 된다.
어려운 문제 상자와 쉬운 문제상자를 넣어두고 선택하는 시험이 있었다. 1. 어려운 문제가 있었는데도 끝까지 침착하게 잘하네. 이런 말을 들은 사람은 어려운 문제를택하고 2. 넌 참 머리가 좋구나. 참 똑똑하구나 하는 칭찬을 들은 아이들은 쉬운 문제를 택하였다. 똑똑하다는 걸 증명해야하니까.
더 큰문제는 두 집단에게 문제푸는 방법이 있는 상자와 아이들의 점수가 있는 상자를 주고 선택하게 했을 때 1군은 문제푸는 방법 상자를 택하였다. 그래야 내가 틀린 문제를 알 수 있기 때문이라고 선택의 이유를 말했고 2군은 다른 아이들의 점수가 궁금하다며 그 상자를 선택함으로써 자신이 독똑한지 늘 증명하고 확인하는것에만 집착을 보였다.
칭찬을 들은 집단은 완벽주의가 되려고 한다. 칭찬을 듣는 아이들의 얼굴에는 기쁨보다는 불안이 숨겨져 있다. 칭찬은 판단이다. 칭찬은 통제이다. praise is judgement, controlling 칭찬이 자신감을 높여준다는 오래된 믿음은 틀렸다.
--- 칭찬은 중요하다. 아이의 자존감을 세워주는데 없어서는 안될 필요한 것이다. 칭찬은 정말 사람을 변화시킨다. 단, 이때의 칭찬은 상대가 어떤 상태이든 그 자체를 받아주는 상대에 대한 믿음을 근거로 하는 것이지 자신의 기대를 강요하는 칭찬은 안된다. 즉 인내심, 끈기, 실패를 했을 때도 그것을 이겨내는 힘, 올바른 판단 등 일을 이루어내는 과정과 노력에 대한 것이어야지 성취에 대한 것, 성취를 이끌어내기 위한 강요과 판단을 바탕에 깐 정치적인 것이어서는 안된다는 생각이다.
칭찬의 말을 바꾸어야 한다. 이제 어려운 일을 극복하기 위해 한 '노력'을 "인정"해주어야한다. 때로는 아이가 스스로 판단하도록 인내로 기다려 주기도 해야한다. 그 과정에 실패는 당연한 것이다. 그것이 진짜 "칭찬"이 되어야 한다.
-- 이런 말 하면 사람들은 그럼 어떤 칭찬을 해야하느냐고 칭찬 목록을 달라고 할것이다. 어떤 칭찬? 그것은 내가 상대에 대한 마음을 바꿔야 나오는 것이다. 언어 습관을 바꾸기 위한 근본적인 것은 모범답 같은 샘풀이 아니다. 그런 샘풀이 얼마나 많은가. 하지만 왜 번번히 실패하는가? 끝없이 훈련해야한다. 그것은 언어 훈련이 아니라 상대를 수단으로 사용하는 것이 아닌 진정으로 존중하고 사랑하는 법을 배우는 훈련을 말하는 것이다. 배나무가 되어야 배꽃이 피고 배 열매를 맺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가시나무가 단 열매를 맺을 수 없는 것과 같다.
(c)2011이봉희/이 글은 수정되어 [내 마음을 만지다]에 실림.
[2011년 한국인이여 행복하라] [6] 중년 여성과 행복
50代 한국 여성, 10개국 중 '불행 점수 1위' 기록 남성은 50代 들어 행복지수 상승 선진국 여성들은 개인 생활 즐겨 빚과 자녀의 굴레… 피로감 심해 "가족은 필요로 함께 사는 것"
전체 평균의 3배 넘게 답해 "삶의 위안 얻으려 종교 활동" 한국 78% vs 덴마크 11%
http://news.chosun.com
6·25 전쟁 직후인 1950년대 중반에 태어나 팍팍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부모는 남자 형제들에게 대학을 양보하라고 했다. 22세쯤 결혼해 시부모를 모시고 살면서 2명의 아이를 낳아 길렀다. 남편이 가져다주는 월급을 한푼 두푼 모아, 아이만큼은 '못 배운 설움'을 겪지 않도록 매섭게 공부시켰다. 사회는 이들의 열성에 '치맛바람'이란 별명을 붙였다. 남편이 한창 일할 때인 40대 초반, 외환위기에 가정이 휘청댔다. 생계, 그리고 아이들의 등록금을 위해 생전 처음으로 취업 전선에 뛰어들었다. 할 수 있는 일은 일용직, 혹은 임시직뿐이었다. 자녀가 대학을 졸업할 때쯤인 2005년, 20대 젊은이의 7.5%가 실업자인 '청년 실업의 시대'가 시작됐다. '88만원 세대'로 전락한 아이들은 아직도 부모에게 손을 벌린다.
통계청의 '인구주택 총조사' '경제활동인구 조사' 등을 토대로 재구성한 대한민국 55세 여성의 전형적인 삶이다. 전통적 가치관과 급변하는 사회를 치열하게 버텨온 한국의 50대 여성은 조선일보·한국갤럽·글로벌마켓인사이트가 신년기획 '2011년, 한국인이여 행복하라'를 위해 실시한 10개국 5190명의 여론조사에서 가장 불행한 집단으로 조사됐다. 중년 한국 여성의 불행 뒤엔 평생 축적된 경제적 부채의 굴레, 삶을 바쳐 뒷받침해온 가족에 대한 부담감이 자리 잡고 있었다.
◆한국 50대 여성, 10개국 중 가장 불행한 집단
영국 이코노미스트는 지난해 12월, 인생의 행복도가 20대에서 40대까지 꾸준히 떨어지다가 50대에 다시 올라간다는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인생이 내리 하락세가 아니라 40대에 바닥을 치고 반등하는, 이른바 'U자형 행복 곡선'을 그린다는 것이 미 프린스턴대의 연구 결과였다.
'행복 여론조사' 결과 한국의 남성은 전형적인 'U자형' 행복도를 보였다. 그러나 여성은 아니었다. 한국에서 가장 '행복하지 않다'고 느낀 세대는 50대 여성이었다. 스스로를 '행복하다'고 평한 여성의 비율은 40대 77.2%에서 50대 61.1%로 가파르게 떨어졌다. 한국의 50대 여성은 조사 대상 10개국의 모든 세대를 통틀어 '불행하다'고 답한 비율(37%)이 가장 높았다.
한국 여성의 행복도는 20대·40대 때 높고 30대·50대에 낮은 지그재그형이었다. 남성의 행복도는 20대에서 40대까지 떨어지다가 50대에 다시 상승했다. 50대 여성의 행복도가 세계 최저치를 기록하면서, 한국인 전체의 평균 행복도도 '50대 반등'에 실패했다. 행복한 한국인의 비율은 20대 80.2%로 높게 출발해 30대 69.2%, 40대 67.5%, 50대 64.2%로 꾸준한 내리막을 기록했다.
◆가족을 사랑한다… 그러나 한편으론 '인생의 큰 부담'
50대 여성은 빚과 관련한 질문에서 큰 부담을 드러냈다. 10명 중 7명이 '빚이 있다'고 답했고, 그중 42.6%는 빚으로 인한 이자 때문에 고민하고 있었다. 다른 나라의 경우 빚에 대한 부담은 주로 새 가정을 시작하는 20대·30대 몫이었다. 호주와 핀란드의 경우 30대 여성(각각 41.6%·29.5%), 미국은 20대 여성(35.9%)의 부채 부담이 가장 컸다. 반면 한국의 20대 중 '빚이 없다'고 답한 비율은 49.5%로, 조사 대상 10개국 중 가장 높았다. 대학에 입학한 후 학자금대출 등을 받으며 자립(自立)의 길에 들어서는 다른 나라 청년들과 달리 한국 젊은이 중 상당수가 20대가 되어서도 부모에 의존해야 하는 상황임을 드러낸다.
전통적인 가치관 아래 평생 가족을 보살피는 데 힘써온 한국의 50대 여성은 가족에 대한 애정과 피로감을 동시에 드러냈다. 그들에게 가족은 대체로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74.1%)이었지만 '필요에 의해 같은 공간에서 생활하는 사람들' '인생의 큰 부담'이라는 답이 한국인 평균을 웃돌았다. 특히 필요 때문에 가족과 같이 산다는 답은 전체 평균(1.4%)의 3배(5.6%)가 넘었다. 같은 세대의 남성 중엔 이 답이 한 명도 나오지 않았다. 이화여대 사회복지전문대학원 김미혜 교수는 "한국의 50대 여성은 전형적인 샌드위치 세대"라며 "보수적인 부모 아래서 자라 여성이라는 이유로 가족을 위해 많은 것을 희생하고서도, 정작 다음 자녀들에게는 자신의 노력에 대한 보상을 기대하기 어렵다는 박탈감에 빠져 있다"고 말했다.
◆"마음 수행 위한 종교 활동" 한국 50대 여성 78% vs 덴마크 11%
한국의 중년 여성은 삶의 위안을 종교에서 찾으려는 성향이 강했다. '마음의 안정을 얻기 위해 종교를 가졌다'는 비율이 77.8%로 평균(61.8%)을 크게 웃돌았다. '50대 한국 여성'은 전 세계에서 이 답이 가장 많이 나온 집단으로, 덴마크·호주·미국에선 같은 질문에 대한 답이 각각 10.6%·22.4%·45.8% 수준이었다. 종교의 본질인 '진정한 믿음'을 좇는 50대 여성은 7.4%에 불과했다. 영국 필로소퍼스 매거진 줄리언 바지니 편집장은 "종교를 종교 자체로 믿는 사람은 높은 행복감을 보이지만, 현실 탈피를 위한 도구로 종교를 활용할 경우 행복감은 거의 상승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한국인이 아이를 낳지 않는 이유에 대해서도 50대 여성은 다른 세대와 동떨어진 답을 냈다. 한국인이 가장 큰 이유로 꼽았던 '경제적 부담'에 대한 답은 평균(52.6%)보다 낮게(48.1%) 나왔다. 대신 '살기 어렵고 고통스러운 세상에 아이를 태어나게 하고 싶지 않다'는 염세적 의견(20.4%)이 압도적으로 높았다.
고려대 사회학과 김윤태 교수는 "선진국의 50대 여성들은 자녀가 성인이 되는 순간 '가뿐하다'는 기분으로 그동안 누리지 못했던 개인의 취미 생활을 즐기는 것이 보통"이라며 "반면 한국의 중년 여성 중 대다수는 남편의 고용 불안, 자녀 결혼 자금 마련 등 가족이라는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상태"라고 말했다.
출처 http://news.chosun.com/

A River Runs Through It (based on the novel by Norman Maclean) 역저 2002(c)BongheeLee 출판사 사장님을 설득해서 처음으로 영화교재에 영화해설(<관람석에서>라는 부록을 뒤에 첨가하자고 설득해서)을 실은 책이다. 그 이후 그 출판사의 교재에는 해설이 함께 나오게 되었다. 우연히 다른 책을 검색하다가 내가 편집하고 번역해서 낸 이책에 역자가 낸 다른 책이란 소개에 내 책은 하나도 없고 엉뚱한 동명이인의 다른 사람의 책이 올라와 있어서 경악했던 기억이 난다. 참, 무책임한 인터넷이고 알라딘이다.... 흰수염고래라는 분이 interpark에 쓴 리뷰다. ^^ 영화평을 행복하게 읽으셨다니 고맙습니다. ---------
한 번도 똑같은 물결인 적이 없는 "흐름"앞에 나약한 작은 인간으로 서서 한결같은 인내와 희망과 겸손함과 훈련된 절제력으로 그리고 더 나아가서는 예술가적 직관으로 예측불허인 고기와의 해후를 기다리듯이 우리는 흐르는 인생가운데서 그 의미와 수수께끼의 답과 만나기를 기다리는지 모른다. 부록 : 이봉희교수의 <관람석에서> 중에서
보는 순간 ’혁명적’으로 다가오는 영화가 있는 반면, 어떤 영화는 의식하지 못한 가슴 한구석에 몰래 씨앗을 뿌린다. 그리고 순식간에 바오밥나무 급으로 자라며 몸과 영혼을 송두리째 먹어버리고 만다. 대학 신입생 시절 교수님 추천으로 만난 영화 <흐르는 강물처럼>이 그런 감정을 경험하게 해준 첫 영화였는데. 그 후 영화 보는 시각이 달라졌음은 두 말할 것 없다. .................... 결국, 대학 시절에 결코 쓰지 않을 낚시 용어만 마구 외우다가 끝났던 풋풋한 추억이지만. 영화도 역시 타이밍이 중요한가보다. 어느 잠이 오지 않던 밤. 새벽에 이 책을 지분거리다가 부록이자 번역을 하신 이봉희 교수의 글을 보며 서늘하고도 뜨거운 바람을 맛봤다. 정전하고 누운 고요한 방에서 내 심장소리가 들렸던듯 하다.
몇 년 동안 스크린 영어사도 발전을 하며, 테이프 대신 MP3 CD를 제공하고, 종이 질도 빳빳해지고, 흑백인쇄에서 컬러인쇄로 업그레이드 되고. 몇 년의 물가 상승을 반영하듯 3000원 정도 가격이 인상되었는데. 그 전보다 영화 분석 면에서 ’촌철감동’을 느끼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여전히 이 영화와 대본을 보면 울컥하는 감정, 부록을 읽던 새벽이 고스란히 기억에 남는다. 아마도, 파란 봄의 한 자락이 기록되었기 때문이리라. (coolcat** 님) ---------------------------------
사실 이 영화수업 후 형제간의 문제 해결을 받은 상담전공 대학원선생님도 있다.^^ 문학은 정말 예측할 수 없는 치료적 힘이 있다. 2002년 번역하고 편집한 역저서였는데 재판을 찍으면서 어느새 편집부 저, 이봉희 역이라고 맘대로 바꾸었네. 편집부에서 무얼 저술했단 말이지? 참 답답하다.
photos/posters©2010 bhlee
Marriage Proposal by Chekhov
러시아의 위대한 작가 안톤 체홉의 “청혼”은 소극(farce)이다. 소극(笑劇)이란 인물들을 과장되고 엉뚱하며 실제상황에서는 있음직하지 않은 우스꽝스러운 상황 속에 놓이게 하여 사건을 전개시키고 웃음을 자아내는 희극(comedy)으로 주로 일상의 생활풍속의 문제점들을 비꼬고 풍자하는 내용으로 되어있다. 대개의 경우 의도적인 말장난이나 과장된 행동들, 그리고 넌센스, 부조리함, 신분 위장 등이 포함된다. 소극 속에 그려지는 인간들은 주로 허황되고, 비이성적이며, 돈밖에 모르고, 유아스럽고, 그 행동에 목적의식이 없으며 이성적인 생각이나 절제가 없는 자동적 반응을 보인다.
이 극에는 딸을 시집보내려고 애쓰는 홀애비 지주 스테판 스테파노비치, 그의 딸 나딸리아, 그리고 같은 마을의 청년 이반 로모프가 등장한다. 나딸리아는 지나치게 극적이며, 결혼을 하지 못할까봐 두려워하고 있는 노처녀(당시는 25살이 노처녀였다)이고, 로모프는 나탈리아에게 청혼하려 온 35살의 마을 노총각으로 심약하고 건강염려증에 사로 잡혀 있는 히포콘드리아 환자이며 그로 인해 심계항진증(자주 심장이 두근거리고 떨리는 증상)을 앓고 있다. 안톤 체홉은 잘 알려진 대로 의사이면서 작가이다. 그의 의학 지식은 인간의 우스꽝스런 일면을 병적 증세로 파악하여 생생하게 그리는데 도움을 주고 있다.
"청혼"은 결혼이라는 주제, 그리고 결혼을 위한 청혼의 과정을 부조리하고 우스꽝스럽게 그려보여 줌으로써 그 과정에 나타난 사람들이 본성과 위선, 사회와 전통의 결혼에 대한 문제점을 희극적으로 그러나 날카롭게 풍자하고 있다. 결혼에 필요한 경제적인 문제와 두 사람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 사이의 균형을 맞추기 위한 갈등과 투쟁, 특히 등장인물들이 결혼을 하고자 하는 결사적인 노력이 시종일관 희극적으로 그려진다.
체홉의 시대에 러시아에서는 결혼은 사랑하는 사람들이 하나의 가정을 이루는 만남이기보다는 경제적인 안정을 위한 하나의 절실한 수단이었다. 사람들은 부와 재산, 그리고 사회적 지위를 얻기 위해서 결혼하였다. 이 극의 두 남녀는 결혼을 간절히 원하면서도 작은 풀밭 (Oxen Meadows)의 소유권이나 가족과 조상들 이야기, 아니면 Guess와 Squeezer라 불리는 개처럼 아무것도 아닌 작은 일에 목숨이라도 건 듯 바보 같은 논쟁을 벌이느라 정작 청혼의 기회는 번번히 놓치고 두 사람이 그렇게 원하는 혼인은 이루어질 길이 보이지 않는다. 체홉은 이런 바보스런 남녀의 행위에 초점을 맞춰 확대하여 보여줌으로써 물질주의적, 그리고 계약적 결혼제도를 날카롭게 풍자하고 있다.
극에 나타난 결혼 풍속도는 오늘날 우리사회의 결혼풍속도와도 크게 다르지 않다. 결혼의 진정한 의미는 무엇일까? 연극 속 인물들을 향해 맘껏 웃어주다가 그 속에 비친 우리의 모습을 생각해 보게 된다. 그 뿐 아니라 상징적으로 결혼 상대처럼 ‘내가 간절히 원하는 무엇’을 얻기 위해 내가 ‘구애하는’ 과정은 어떤 우스꽝스럽고 부조리한 모습을 띄고 있는지 한 번 생각해보라고 이 연극은 말해주고 있다.(©2010 bhlee/ 정확한 출처나 허락없이 일부 혹은 전부를 사용할 수 없음)
작렬하는 태양은 불모의 겨울과 닮아있다. 태양이 아우성치는 여름, 나는 불모의 겨울, 그 차가운 침묵을 앓는다.
photo by bhlee

Memory
You have the key.
-T. S. Eliot
010301080131 불모의 시간
2010. 제 2차 인문치료국제학술대회, Life, Happiness and Humanities Therapy (7/9-10) 강원대학교 S. Reiter-BongheeLee-J. Fox
*내 글을 잘 공개하지 않는데 다른 사람들에게 공개된 것이어서 여기에 실어봅니다.
글: 이봉희 (미국공인문학치료전문가 CPT/공인저널치료전문가 CJT/ 상담심리사) -문체부 문예위원회 웹진 아르코(webzine arko) 기획연재: 예술치유 (문학치유편)
| ▶ 내 안의 간절한 목소리를 찾아주는 문학치료 |
| 글 : 이봉희 (현 미국공인문학치료전문가(CPT) /공인저널치료전문가(CJT)/상담심리사 |
all rights reserved. cannot be reproduced without permission(저작권이 있는 글이므로 인용할 경우 반드시 출처를 정확히 밝혀주십시오.) 어떻게 하면 우리는 인간이 존재한 이래 계속되어 온 그 오랜 신화를 잊을 수 있을까요? 마지막에 공주로 변하는 용에 대한 수많은 신화를. 어쩌면 우리 삶 속의 모든 용들은 우리를 만나기 위해 기다리고 있는, 한때는 아름답고 용감했던 공주였는지 모릅니다. 어쩌면 모든 끔찍스런 것들은 우리 존재의 깊은 곳에서 우리의 도움을 간절히 기다리고 있는, 스스로는 어찌할 수 없는 그 어떤 것인지 모릅니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
문학치료는 내 안에서 도움을 청하는 아름답고 용감한 그 무엇의 간절한 목소리를 찾아주는 일이다. 내 안의 나의 모습이 때로는 내가 원치 않는 피투성이의 모습이거나, 용처럼 끔직스런 모습일 수도 있다. 내 스스로 미로 속에 깊이 가둬둔 반인반수 미노타우로스처럼 나의 어둡고 고통스런 과거이거나 내면의 모습일 수도, 아니면 이카로스나 디달로스 같은 창조적 힘과 자유에의 욕망일 수도 있다. 그런 나의 모습이야말로 스스로는 어찌할 수 없어서 나의 도움을 간절히 기다리고 있는 진정한 "나"인지 모른다. 문학치료란 영어로는 포이트리테라피(Poetry Therapy), 비블리오테라피(Bibliotherapy), 저널테라피(Journal Therapy)를 모두 포함한 말로 참여자와 치료사 사이의 치료적 상호작용을 위해 문학과 글쓰기를 사용하는 것을 말한다. 다시 말하면 문학치료는 문학과 참여자(내담자)와 훈련받은 문학치료사/촉진자 간에 이루어지는 상호작용으로, 참여자에게 문제에 접근하는 새로운 방법을 배울 수 있게 하고, 또 다른 관점에서 그 문제를 생각할 수 있는 통찰력을 제공하여 줌으로써, 궁극적으로는 올바른 자아인식에 이르게 하는 “과정”이다. 이 과정에서 치료사(촉진자)는 참여자/그룹의 성격과 치료목표에 따라 선별한 여러 형태의 문학을 촉매로 치료적 대화와 토론을 사용하여 참여자의 통찰과 성장과 문제해결을 돕는다. 문학치료에서 말하는 ‘문학’은 여러 장르의 상상의 문학, 이야기, 신문기사, 노랫말, 연극, 시, 영화, 비디오, TV드라마, 일기 등 생각과 느낌을 이끌어내기 위해 사용될 수 있는 언어를 표현매체로 사용한 광의의 문학을 말한다. 문학은 치료를 위한 촉매의 역할을 하게 되며 치료 경험은 문학치료사, 시인, 또는 시/문학치료의 수련을 거친 전문가의 ‘촉진’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예술로서의 문학의 초점이 문학 자체에 있다면 문학치료에서 사용하는 문학은 예술적/문학적 가치나 위대함이 아니라 깨달음과 자아발견을 위한 도구로서의 가치에 중점을 둔다. 문학 치료를 위해 선택되는 문학은 사람들이 ‘같은 배를 탄’ 다른 사람들과 만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에 ‘보편적인 진실’을 담고 있으면서도 마음속 깊은 곳에 숨어 있는 목소리를 이끌어내기 위해서는 진부해서는 안 된다. 문학 치료 프로그램 중 참여자는 시, 저널(일기), 콜라주나 그림을 그리고 글쓰기 등을 하는데 이때 참여자가 쓴 글이 잘 썼는지 예술성이 있는지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오직 그 과정에서 일어나는 ‘아하!’의 순간, 뜻밖의 깨달음이나 자기 성찰이다.(많은 분들이 ‘나는 글을 못 써요.’ ‘문학은 잘 몰라요.’ ‘시는 어려워서 읽기도 겁나요.’라고 염려하거나 반대로 ‘나는 시인이에요.’ ‘수필가예요.’라고 말하는데 문학 치료와 소위 말하는 ‘글쓰기 재능’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오히려 글쓰기나 문학을 두려워하던 많은 분들이 자신이 쓴 글, 즉 자신 속에 숨어있는 시인을 만나고 놀라게 된다.) | 문학치료의 역사
고대 테베의 도서관 정문에는 "영혼을 치유하는 곳"이라는 글이 걸려 있었고 스위스의 한 중세 대수도원 도서관에도 "영혼을 위한 약상자"라는 의미의 글이 새겨져있었다. 이것은 고대로부터 문학이 가지는 치유의 기능을 보여주고 있다. 치료와 성장을 위해 시와 노래가 쓰인 예는 이미 원시인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종교적 제의에서 무당이나 제사장들은 개인이나 부족의 건강과 안위를 위해서 시나 노래를 읊었다. 고대 이집트에서는 최대한 즉각적인 효과를 위해 파피루스에 글을 써서 그것을 물(액체)에 녹여서 환자가 마시게 하기도 하였다. 기원전 1030년경에는 다윗이라는 소년의 시와 음악이 사울 왕 속의 “야수”를 잠재우기도 하였다. 의술과 예술이 서로 밀접한 관련이 있음은 신화 속 아폴로 신이 의신(醫神)이면서 동시에 시/예술의 신인 것을 봐도 알 수 있으며 테살리 지역의 의사로서 명성이 높았다는 아스클레피우스는 아폴론의 아들이라는 신화가 만들어지기도 했다. 또한 신화에 보면 오세아누스는 프로메테우스에게 ‘말은 병든 마음을 치료해주는 의사’라고 말한다. 프로이드는 “무의식의 세계를 발견한 사람은 내가 아니라 시인”이라고 했고 심리극(싸이코 드라마)이라는 용어에 이어 심리시(싸이코 포이트리)라는 용어도 생기게 되었으며 1960년대에 오면 집단 심리치료의 발달과 더불어 심리치료사들이 시치료를 함께 사용하기 시작하면서 점차 문학치료는 재활, 교육, 예술창작, 상담, 심리치료 등의 분야에서 전문가들에 의해 부흥하기 시작하였다. 최근 들어 정신의학전문가들은 첫째, 문학(시)의 환기작용과 둘째, 글쓰기의 힘이라는 문학의 치료적 힘을 확인하여주었다. 문학, 특히 시는 그것을 읽는 사람의 내면에서 연상 작용을 일으키고 의식적 무의식적 기억과 생각을 환기시켜 이끌어 내는 강렬한 힘이 있다는 것이다. 또한 내담자가 다른 사람이 쓴 문학(시)에 대한 개인적 반응을 글로 쓰든 아니면 자신만의 경험과 감정을 글로 쓰든 글쓰기가 놀라운 치료의 힘이 있음을 인정한 것이다.
| 문학치료의 목적
문학치료의 궁극적인 목적은 그것이 자기개발을 위한 문학치료이든 임상적 문학치료이든 환자/참여자의 자아 존중감의 회복과 향상, 그리고 사기진작에 있다. 참여자의 전인적 성장을 도와서 자신을 너그럽게 수용하고 보다 아름답게 자신을 개발하며 변화될 수 없는 현실과 실존적 상황에 보다 창의적으로 대처하게 함으로써 내재된 갈등을 해소할 수 있는 내적 능력과 적응기능을 증진시키는 것이다. 에리히 프롬이 주장하듯이 자신에 대한 사랑은 자신에 대한 존경과 관심과 책임, 그리고 올바른 이해를 바탕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또한 자신을 진정 먼저 사랑하지 않고는 결코 타인에 대한 사랑은 불가능하다. 문학치료는 인간관계에 대한 이해와 깨달음을 증진시킨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 시인 존 던의 말대로 “그 누구도 섬이 아니다.” 그 누구도 타인들과의 관계 속에서의 자신을 이해하지 않고는 자신을 바로 이해할 수 없다. 이것은 마틴 부버의 말을 빌리면, “만남을 통한 치유”를 이루는 것으로 특히 그룹/집단 문학치료 모임의 토론을 통해 더 잘 이루어질 수 있다. 문학치료는 더 나아가 현실을 직면하며 그에 근거한 사고를 하도록 돕는다. 문학치료는 참여자들에게 ‘실존적 문제’를 직면하도록 돕는다. 실존적 문제란 예를 들어 “삶은 때로 불공평하고 불공정하다, 고통과 죽음으로부터의 탈출구는 없다. 아무리 타인과 친밀할지라도 나의 삶은 여전히 내 홀로 직면해야한다. 나는 나의 삶과 죽음의 문제를 직면해야한다. 따라서 보다 정직하게 살아야하며 사소한 일에 얽매여선 안 된다. 타인들의 도움과 인도와 무관히 내 삶의 방식에 대한 궁극적인 책임은 내가 져야한다”와 같이 우리가 보다 성숙하게 직면하고 포용해야하는 실존적 한계상황을 말한다. 이러한 궁극적 목표를 이루는 과정에서 문학치료는 의사소통 능력을 강화하여 관계의 문제를 해결하고, 창의적 자아를 개발하며, 격렬한 감정들을 털어놓고 스트레스를 해소함으로써 긴장을 완화시키고, 새로운 생각, 통찰, 또는 정보들을 통하여 새로운 의미를 발견하며, 자유롭고 풍성하고 유익한 미의 가치를 체험하도록 하여 삶의 질을 향상시킨다.
| 나를 찾기 위해서는 낯선 자를 찾아가라
“나를 찾기 위해서는 낯선 사람을 찾아가라”는 말이 있다. 우리들 속에 있는 보물을 뜻밖에 “낯선 사람들”을 통해서 찾는 경우가 종종 있다.
어떤 마을에 사는 현자가 3번의 꿈을 꾸었다. 꿈에서 천사가 나타나 이웃마을로 가라고 지시하면서 그곳에 가면 성문 앞, 다리 근처에 보물이 있다고 말해주었다. 그 현자는 이웃 마을에 도착해서 성의 파수병에게 그 이야기를 해주었다. 그런데 그 파수병은 자신도 꿈을 꾸었다는 것이다. 그의 꿈에서도 천사가 나타났는데 그에게는 바로 현자의 집으로 가면 그 집안 벽난로 앞에 보물이 숨겨져 있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그 말을 듣고 현자는 급히 집으로 돌아가서 벽난로 앞을 파보았더니 그 곳에 보물이 있었다.
이 이야기는 여러 의미에서 문학치료의 진수를 요약하고 있다. “낯선 사람”은 일차적으로 문학치료가 사용하는 도구인 문학을 의미하며, 또한 문학치료사/촉진자이다. 치료사는 또 다른 “타인들” 즉 치료그룹의 참여자들과 함께 보물을 찾는 일이 용이하도록 도와준다. 이 예화에는 중요한 사실이 하나 더 드러나 있는데 바로 자신의 집에 보물이 있었다는 점이다. 이 때 ‘보물’은 진정한 자아인식을 말하는 것으로 즉 치료란 바로 나 자신에게서 이루어지는 것으로 그 초점이 외부의 상황의 변화가 아니라 나의 인식의 변화와 자아의 발견과 성장, 확대에서 이루어지는 것임을 말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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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로버트 프로스트도 “시는 즐거움으로 시작해서 지혜로움으로 끝난다. 시의 일차적 기쁨은 내가 이미 알고 있다는 사실을 미처 알지 못했음을 기억하는 놀라움에 있다.”고 말한다. 즐거움으로 시작해서 지혜로움으로 이끌며, 그 과정은 외부에서 주어지는 것이라기보다는 참여자 스스로가 찾아가도록 돕는 것이 문학/시라는 이 말 속에 문학 치료의 과정과 효과가 단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다른 측면에서 보면 위에 인용한 설화에서 "낯선 사람"을 찾아간다는 것은 문학/예술이 제시하는 "새로운 시각"의 세계로 들어간다는 것을 의미하는 상징이다. 우리의 눈은 영국 시인 코울리지의 말대로 "낯익음과 이기적 근심걱정의 막"에 가리어져 있어서 세계의 경이로움과 아름다움 앞에 "눈이 있으되 보지 못하고 귀가 있으되 듣지 못하고 마음이 있으되 느끼지도 이해하지도 못한다." 이 막은 우리의 눈, 즉 판단력을 흐리게 할 뿐 아니라 구태의연한 습관성 때문에 통찰력이 무디어지고 자동화되어서 자동기계나 도식성으로 살아가게 만드는 것이다. 따라서 문학과 예술은 그 막을 거두어 새로운 시각을 보여주어야 하며 이것이 문학의 “낯설게 하기" 효과로 문학치료 참여자에게 자신의 문제를 새롭게 바라보게 해준다.◀ 두려움앞에서 한없이 작아지는 나를 표현한 그림일기(11세 남자아이) |
요슈타인 가아더는『소피의 세계』에서 철학하는 유일한 능력은 “놀라워할 줄 아는 능력”이라고 했다. 문학은 우리의 삶의 사소하고 작은 일상에서 경이로움과 즐거움에 놀라워 할 줄 아는 능력을 다시 회복시켜주고 개발해준다. 이러한 능력의 회복은 자아성찰로 이끌 뿐 아니라 더 나아가 더 심오한 정신과 영적인 경이로움인 믿음, 신뢰, 우정, 사랑, 아름다움, 등을 깨달을 수 있도록 우리의 통찰력을 깨우쳐주게 된다. 아름다움이 인식되는 곳에서는 자아의 완성이 이루어진다는 말이 있다. 이 때 개개인은 산타야나가 말하듯 “자아의 속박”에서 잠시라도 해방되는 자유를 누리는 것이다.문학의 신선한 시각은 고착되고 습관화된 사고에 새로운 눈을 부여하게 되며, 우리의 건강하고 창조적인 상상력을 유발시켜준다. 상상력이 없다면 우리는 시공간의 감옥에 갇혀 살 수 밖에 없는 수인(囚人)과 같다. “지금 이 순간”과 “지금 이 장소”로부터 자유로이 해방되기 위해서는 상상력이 필요하다. 우리는 상상 속에서 “언어를 통해” 자유롭게 무한한 세계로 탐험하고 새로운 진실들을 발견하며 결국 현실 속 우리자신과 세계의 의미를 재발견할 수 있다.
| 시적(詩的) 요소들의 치료적 원리
문학이 내면의 진실을 환기시키고 감정의 공감과 해방을 통한 정화를 가져올 수 있도록 하는 데는 문학이 지닌 시적 요소들이 우리 정서에 미치는 영향력 때문이며 따라서 문학의 시적 요소들이 문학치료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문학, 특히 시의 힘은 주로 이미지(심상)를 통해서 마음의 눈으로 보는 데서 온다. 심상은 꿈과 무의식의 언어이며 그렇기에 무의식적 자료들을 의식세계로 불러오는 촉매역할을 한다. 우리의 심리는 내적인 심상의 자극과 표현에 의해서 발달, 성숙해져간다. 자아인식은 문학, 연극, 움직임(춤), 소리(음악), 글쓰기, 말하기, 그림그리기, 조형물 만들기 등을 통해 나타나는 여러 이미지를 탐구하면서 이루어진다. 이미지는 가능함과 불가능함, 실현가능한 꿈과 욕망하는 것 사이의 모순을 끌어안는다.
은유와 상징이 가장 풍성한 것은 시라고 볼 수 있다. 심상은 사람들에게 어떻게 그들의 창조적 상상력을 발휘할 수 있는지 가르쳐주며 우리 속의 숨은 원동력을 일깨워서 역기능요소들을 해소하고 변화를 촉구한다. 프로이드는 시인을 “전문적으로 백일몽을 꾸는 사람”라고 말하면서 꿈과 시의 유사함에 주목하였다. 그는 “무의식의 세계를 발견하는 사람은 내가 아니라 시인이다. 마음은 시를 짓은 기관이다”라고도 말하여서 무의식의 세계를 드러내는 시의 역할을 강조하고 있다. 꿈과 시는 심상, 전이(치환), 압축 등과 같은 동일한 심리학기제를 사용한다. 시의 섬세하고 미묘함은 참여자에게 거부감 없이 다가갈 수 있다. 참여자나 그룹의 성격에 맞는 신중하게 선택된 시를 소개함으로써 문학치료사는 그 치료세션의 토론주제를 소개하게 된다. 만일 그 집단이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지 않다면 그것을 회피할 것이다. 그러나 시의 섬세함 때문에 그 저항도 부드럽게 이루어지게 된다. 따라서 문학을 “매개”로 사용하지 않는 다른 치료와 달리 위협적이거나 거부감이 덜하여서 일반 전통적인 상담이나 치료를 거부하는 사람도 문학치료에는 기꺼이 참여하는 경우가 있다. 페리 롱고는 시를 읽고 쓰는 것은 “나”를 정의하도록 도와줄 뿐 아니라“나”를 강화시켜준다고 말한다. 나를 강화시키는 것은 세상의 일원으로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한 것이다. 고통 받는 사람들에게 가장 큰 위로중 하나는 나만 혼자 그런 일을 겪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다. 우리가 이 광대한 세계에 단절된 혼자가 아니며 이 세계의 모든 존재들에 연결되어있고 융화되어 있음을 느끼는 것은 자아 존중심을 키워주게 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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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 BongheeLee 두팔로 햇빛을 막아줄게 울어보렴 목놓아 울어나 보렴 (이용악) |
아리스토텔레스의 정화(카타르시스)이론은 그 과정에 정서의 통제와 분출을 모두 포함한다. 문학치료는 정서적공감과 분출을 통해 워즈워즈가 “내게 찾아온 건 오직 슬픈 생각 뿐/ 때맞춰 그 슬픔을 말하니 그 생각 사라지고/ 나는 다시 건강해졌네”라고 노래한 것처럼 치료적 체험으로 이끄는 것이다. 시인 하이네도 “병은 모든 창조적 욕구의 궁극적 근거/ 창조하면서 나는 회복될 수 있었고/ 창조하면서 나는 건강해졌네.”라고 말하여서 문학치료의 카타르시스적 의미를 확인해준다. 또한 시는 은유를 사용하기 때문에 사람들이 다른 방법으로는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할 수 있게 해준다. 참여자(내담자)는 시 쓰기를 통해 산문 쓰기에서 표현할 수 없는 자신의 문제들을 표출하게 됨으로써 문학치료 세션은 참여자/내담자가 수치스럽거나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는 첫 발걸음이 될 수 있다. 문학치료사는 죽음, 상실, 이별, 외로움, 고독, 등과 같은 개인의 “실존적” 관심사들에 말을 건넬 수 있는 광범위한 문학을 찾아내어 사용한다. 이러한 주제들은 일반적으로는 금기시 되어있지만 문학치료세션에서는 가까이 다다가 살펴볼 수 있다. 시는 다양한 층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드러내면서도 감추는 이런 시의 능력은 바로 참여자가 자신을 비난받지 않고 감추어 드러낼 수 있는 자유를 누리게 해준다.
◀ (c) BongheeLee 차라리 침묵하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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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노나 슬픔 같은 감정들이 표현되지 않거나 억압되어 있으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대신 육체적, 정신적인 부정적 증상으로 우리 안에 남게 된다. 감정은 라틴어의 ‘흐르다’는 말에서 나왔다. 캐슬린 애덤스를 비롯한 여러 저널치료(글쓰기치료) 전문가들은 감정(이모션 emotion)은 좋고 나쁜 윤리적인 것이 아니라 “움직이는 에너지(에너지 인 모션Energy in Motion),” 즉 E(이)-모션 일 뿐이므로 억압할 것이 아니라 표현해서 해소시켜야 한다고 말한다. 심리학자인 페니베이커 교수도 우리가 경험한 심리적 외상(트라우마)의 심각성 자체보다는 그것을 억압하고 털어놓지 못하는 데서 정신적 육체적 건강상의 질병이 초래된다고 말한다. 영국시인 바이런의 말처럼 시는 감정 뿐 아니라“상상력의 용암이기에 지진을 막기 위해서는 분출되어야”한다. 시를 읽고 쓰는 과정은 용암처럼 폭발 잠재력을 가진 심리적인 에너지가 분출될 수 있는 안전한 출구를 제공하는 것이며 그럼으로써 심리적인 균형과 건강을 회복시켜준다. 또한 시는 미묘하고 다양한 층의 의미를 포함하고 있기는 하지만 동시에 감정을 솔직히 드러내기도 하는데 이 솔직성이 사람들로 하여금 어려운 문제를 탐색하도록 도와준다. 참여자가 시인, 또는 같은 동료 참여자가 진솔한 이야기를 털어놓는 것을 듣게 되면 그들도 부담 없이 자신의 문제를 털어놓게 되는 것이다. |
특히 참여자가 내적 느낌을 시나 저널(일기)처럼 글로 쓰는 것은 그 이전에 형태가 없었던 느낌과 생각들을 흰 종이 위에 흑색글씨로 외면화하는 것이다. 이 구체화작업은 참여자로 하여금 자신이 문제를 통제하고 있다는 느낌을 갖게 해줄 뿐 아니라 글쓴이가 자신의 생각을 새로운 관점에서 바라보게 해준다. 문학치료의 정의 속에 저널치료(journal therapy)를 적극적으로 포함시켜 글쓰기치료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글쓰기치료는 다음 소개될 예정임)
| 나는 어떤 시가 될 것인가?
| 프로이드는 우리의 정신이 시를 짓은 기관이라고 말하면서 또한 우리 각자 속에는 시인이 살고 있어서 이 세상에서 인류가 멸망하는 날 마지막 시인도 사라질 것이라고 말했다. 도종환 시인은 프로이드를 인용하면서 “내 안의 시인”이라는 시에서 “모든 사람의 가슴속에는 시인이 살고 있었다는데/ 그 시인 언제 나를 떠난 것일까"라고 묻고 있다. 문학치료에서 말하는 참자아의 발견이란 또 다른 의미로 우리 속의 놀라운 아이(Wonderful Child)로 대변되는 창조적 자아의 발견이다. 이 참 자아는 프로이드가 말하는 내 안에 존재하는 “시인”이라 볼 수 있다. “치료사가 맨 먼저 해야 할 일은 사람들 속의 시와 작업하는 것이다. 그들과 함께 일할 때 그들 내면의 시가 우리를 인도하도록 하면 치료사의 일을 바르게 해낼 수 있을 것이다” 는 파프의 말도 프로이드의 말을 상기시킨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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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연필 안에 말들이 웅크리고 숨어있다." 시읽고 시쓰기(30대 직장여성) |
하지만 필자는 우리 각자가 하나의 시(詩)라고 생각한다. 우리 각자는 해석, 또는 번역되어야 할 고유의 언어이며, 시이며, 상징이며 암호이다. 오해라는 말이 해석의 오류를 뜻하듯이 사람사이의 소통은 타인의 언어, 즉 시(詩)로서의 타인을 이해하고 의미를 부여하고 번역하는 일이기도 하다. 우리는 누구나 각자의 안경과 시선을 가지고 있다고 흔히 말한다. 그 뿐 아니라 우리는 각자 자신의 사전을 가지고 있어서 그것으로 상대의 말을 해석/번역한다. 영어표현에 “나는 당신과 다른 언어를 쓰고 있습니다(I don't speak your language.)"라는 말은 많은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가끔은 세상에 ”나를 함부로 번역하지 말라, 당신의 언어로 나를 정의내리지 말라”(이봉희 시,"나를 함부로 번역하지 말라" 중에서)고 외치고 싶을 때가 있다. 이탈리아 극작가 피란델로의 말대로 누군가를 정의내림은 살인행위이며, 노자의 말대로 무엇인가 명명될 수 있다면 그 이름은 더 이상 그것의 영원한 이름이 아닌지도 모른다(名可名非常名). 그렇기에 문학은 우리에게 시(정의 내릴 수 없는, 물질화 될 수 없는 모든 인간과 세상의 정신적, 영적 존재가치를 상징하는)의 가치에 대한 끝없는 도전을 던지는 것이다.
“오, 나여, 삶이여, 수없이 던지는 이 의문/ 믿음 없는 자들로 이어지는 도시/ 바보들로 넘쳐흐르는 도시 /어디서 아름다움을 찾을까? /오 나여, 오 생명이여!" (휘트먼) 대답은 오직 하나ㅡ네가 거기 존재한다는 것. 생명과 너의 존재가 여기 있다는 것. 인생이라는 놀라운 연극이 계속되고 있고 너 또한 그 연극에 한 편의 시가 된다는 것. 놀라운 연극은 계속되고 너 또한 그 연극에 한편의 시가 된다는 것…자, 너의 시는 어떤 것이 될까?” (톰 슐만, <죽은 시인의 사회>)
나는 과연 어떤 시일까? 끊임없이 계속되는 강렬하고 놀라운 인생이라는 연극에서 나의 시는 어떤 것이 되어야할까?
| 모두가 병들었는데 아무도 아프지 않았다
릴케가『말테의 수기』에서 말하듯 세상은 거대한 병원인지 모른다. 실존적으로 불완전한 인간들은 모두 이런 저런 의미에서 어떤 질병이든 병에 걸려있거나, 또는 잠재적인 환자이기 때문이다. “모두가 병들었는데 아무도 아프지 않았다”(‘그날’ 중)는 이성복 시인의 말대로 실존적으로 불완전한 존재인 인간들은 다만 병이 들고도 그것을 인식하지 못하거나 스스로 외면하고 살아갈 뿐이다. 어쩌면 사람들은 악하기 이전에 깊이 병든 상태라고 말하는 것이 옳을지 모른다. 신체적 질병과 달리 눈에 보이지 않는 정신적 심리적 상처와 감정적 격변을 겪은 이후의 후유증 등은 거의 전문적인 도움이나 보상을 받지 못하는 것이 우리나라의 실정이다. 심지어 전문가의 도움이 절실한 경우라도 본인 뿐 아니라 가족들이 그 도움을 받는 일 자체를 가족의 수치심으로 생각하는 경우도 빈번하다. 이렇게 상담문화가 보편화 되어있지 않은 우리나라의 현실에서, 그리고 정신적 스트레스나 트라우마(심리적 외상)가 진지한 관심과 상담, 그리고 치료를 받아야 할 질병의 하나라는 사회적 인식이 확산되지 못한 환경에서 문학/예술이 본래의 기능과 가치인 치료적 힘을 회복하는 일은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시대적 요청이다. 
※ 다음 호에는 문학치료 중 글쓰기치료(저널치료)에 대한 글이 연재됩니다. http://www.arko.or.kr/home2005/bodo/sub/forest.jsp?idx=1689&pidx=1655 http://www.arko.or.kr/home2005/bodo/sub/forest.jsp?idx=1689&pidx=166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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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broken column(1944) by Frida Kahlo (used here only for therapeutic and/or educational purposes) 프리다 칼로가 자신의 척추의 고통을 부셔지고 깨어진 기둥으로 표현한 그림으로 그녀가 평생 겪는 육체적 고통을 표현한 여러 자화상 중 하나.
"나는 병이 난 것이 아니다. 나는 산산히 부셔셨다. 그러나 내가 그림을 그리는 한 나는 행복하다. " "나는 나 자신의 현실을 그린다. 내가 아는 것이라고는 내가 필요해서 그림을 그린다는 것이다. 나는 그저 내 머리 속을 스쳐가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그린다. 다른 생각은 없다.(I paint my own reality. The only thing I know is that I paint because I need to, and I paint whatever passes through my head without any other consideration)" (프리다 칼로) ----
pictures are from the movie, Frida, and used only here for therapeutic and/or educational purposes)
 발아, 날 수 있는 날개가 있다면 네가 무슨 소용있단 말인가? (발가락을 절단 한 후)
 마지막 외출(퇴장)이 즐겁길, 그래서 다시는 돌아오지 않기를....
---- 그녀의 그림을 누가 초현실주의라 하는가 이보다 더한 생생한 현실이 어디있을까? 평생 소아마비로 시작해서 사고, 32번의 수술, 병과 통증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그녀의 "적나라한 현실"을, 눈물과 피와 고통으로 가득찬 그녀의 현실을 우리는 "초현실"이라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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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by bhlee

나는 이제 나무에 기댈 줄 알게 되었다 나무에 기대어 흐느껴 울 줄 알게 되었다 나무의 그림자 속으로 천천히 걸어 들어가 나무의 그림자가 될 줄 알게 되었다
(정호승, "아버지의 나이" 중에서)
here only for therapeutic and/or eduational purposes
어떤 그림 아래로 - P. 첼란
까마귀 뒤덮힌 보리밭 물결.
어느 하늘의 푸르름인가? 아래인가? 위인가?
영혼에서 튕겨나온 때늦은 화살.
보다 강렬한 울림. 보다 가까운 타오름. 두 개의 세계.
(출처: 고위공, <<문학과 미술의 만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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